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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연극 <이>의 이승훈
김현정 2006-01-21

연극 <이>(爾)의 장생은 곧은 사내였다. 낮고 깊은 목소리를 가진 장생은 그 목소리처럼 낮은 땅에 뿌리내린 광대였지만, 하늘에 닿은 권력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못했다. 자그마한 몸집마저 바위 같다는 인상을 주었던 장생. 그를 연기했던 배우가 <왕의 남자>의 광대 패거리 막내인 팔복과 같은 사람일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었다. 순진하고 겁이 많아 보이는 외모가 달랐고, 진짜 막내처럼 순박하고 귀여운 분위기가 달랐고, 무엇보다도 형님들에게 조르는 듯한 목소리가 달랐다. 그러므로 배우는 배우일 것이다. 다시 공연 중인 <이> 때문에 머리를 짧게 깎은 이승훈은 그 사이 또 한번 장생에게도 변화를 주었다며, 혹시 2년 전에 보았다는 장생과 달라진 걸 느끼지 못했는지 물어왔다.

영화에서 장생을 맡은 감우성과 서로 장생에 대한 이야기를 아꼈다는 이승훈은 시나리오가 분명하게 지시해주지 않은 팔복의 캐릭터를 파악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그가 도착한 단어는 ‘순박하다’는 것이었다. 남의 밥상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음모를 파악하지 못한 채 시키는 대로 귀한 이들을 놀리는 팔복은, 정말 순박하고 흙냄새가 난다. 그것은 어쩌면 이승훈이 배우로 자라온 시간과 기억에서 묻어나오는 진심일지도 모르겠다. “산골에서 도깨비도 보면서 자랐고, 진짜로(웃음), 가정사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집이 없다시피 해서 연습실이나 다른 사람 자취방에서 지내곤 했으니 어렵기도 했다. 배우는 자신이 연기하는 감정을 모두 직접 경험할 수 없지만, 그런 경험들을 기억에 담아두고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무대에서 회상할 수가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무술을 했던 이승훈은 킥복싱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결원을 메우려 봉산탈춤 공연에 참가했다가 연극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각의 링에 서는 건 무대에 서는 것과 비슷하다. 상대와 나밖에 없고, 때리지 않으면 맞아야 하고, 비겁하게 할 수 없다.” 눈이 동그란 스무살 청년은 연습실에서 먹고 자며 연기를 배웠고 선생님들이 시키는 대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책도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배우가 지녀야만 하는 감성은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은 그 자신 안에서도 우러나왔다. “아무리 테크닉이 뛰어나도 내가 정말 슬퍼해야만 그 슬픔을 관객에게 전할 수 있다. 어릴 적에 무술을 했고 시골에서 흙을 밟으며 살았던 정서가 지금 내게 큰 에너지가 되어주는 듯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장생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에쿠우스>의 앨런과 햄릿, 로미오처럼 남자배우들이 해보고 싶어하는 역을 두루 거쳤던 이승훈은 2000년 <이>에 장생으로 출연했고 그 인연은 영화 <왕의 남자>로 이어졌다.

그동안 이승훈은 <빙우> <안녕, 형아> 등의 영화 몇편에 출연했지만 <왕의 남자>의 팔복이 가장 비중이 컸다. 촬영이 없을 때면 배우들과 야구하고 낚시하며 “건전한 시간”을 보냈던 그는 <왕의 남자>에 이르러 영화라는 작업과 친밀해졌고 몇년 동안 연기해왔던 장생이라는 남자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도 했다. “감우성씨를 보며 자극을 많이 받았다. 장생도 사람이어서 떨림과 아픔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엔 눈을 뽑히고 나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엔 고통스러워하고 흔들리기도 한다. 인간적인 느낌이 나는 것 같다.”

좀처럼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는 그는, <왕의 남자>의 성공과 함께 연극 <이>도 거의 매일 매진을 기록하는 요즈음, 들뜨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촬영을 시작한 임상수 감독의 신작 <오래된 정원>에 주인공 현우(지진희)의 친구인 남수로도 출연하고 있다. “연극을 할 때도 운이 좋았는데 영화도 그런 것 같다. 이미지 한 가지로 고정되지 않고 출연하는 영화마다 다른 인물을 연기할 수 있어 좋다.” <이>의 작가이자 연출인 김태웅은 이승훈에게 잡초 같다 했다고 한다. 이름이 없는 풀이어서 잡초라 모아 부르지만, <왕의 남자>를 보고 나면, 팔복이라는 이름만은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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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