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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화합과 이해, <메종 드 히미코>

이 영화의 감독 이누도 잇신과 각본가 와타나베 아야는 참 영리하다. 매번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슈들을 건드리면서도 ‘정치적 올바름’과 동화적인 낭만성을 적절하게 버무릴 줄 알기 때문이다. 전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장애인 소녀와 미남 청년의 러브스토리로 심금을 울렸던 그들이 게이 실버타운에 관한 영화 <메종 드 히미코>로 돌아왔다. 그들은 전작에서 장애인을 다루면서도 사회적 불평등을 교조적으로 설파하거나 동정심에 호소하여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고, 단순히 소년 소녀의 미묘한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깊은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냈다. 이번 작품에서 그들은 ‘메종 드 히미코’라는, 황혼기에 접어든 게이들의 정서적·육체적 보금자리를 통해 동성애자 커뮤니티와 그들 가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중소 페인트 회사의 그렇고 그런 여직원인 사오리는 한 남자의 집요한 접촉 시도를 따돌리는 중이다. 그의 전화도, 그의 방문도 그녀는 전혀 반갑지 않다. 이쯤 되면 그 남자, 하루히코가 그녀의 헤어진 남자친구쯤 되는 것이 아닐까 착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는 긴자의 전설적인 게이바 ‘히미코’의 2대 마담이었던 사오리의 아버지 요시다 테루오의 애인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수술비 때문에 빚에 시달리는 사오리에게 하루히코는 테루오의 간병을 제의한다. 사오리는 표면적으로는 하루에 3만엔이라는 유혹적인 일당과 아버지의 유산 때문에 그 제안을 수락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사오리의 애증이 숨어 있다. 그곳은 테루오가 긴자의 마담 생활을 은퇴하면서 만든 게이 양로원이다. 사오리는 매주 그곳에 들러 암과 싸우며 죽음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간병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그녀와 철없는 소녀들 같은 게이 할아버지들과의 즐거운 주말이 시작된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아 2대 ‘히미코’가 되고 엄청난 매력으로 뭇 남성들을 사로잡았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는 아버지 테루오를 만난 사오리는 분노하고 원망한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가정을 버린 무책임한 가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뜨게 된 원인이 아버지의 직무 유기에 있다고 믿는다. 그런 그녀가 아버지를 점차 이해하게 되는 것은 그가 만든 또 다른 의미의 가족, 집인 ‘메종 드 히미코’의 구성원들의 삶과 욕망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더없이 퉁명스러운 메이드인 사오리는 나이든 할아버지들의 수다스러운 자기표현을 점점 포용하게 되면서 일반인들의 일상적인 욕구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힘들게 욕망되는지 알게 된다.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입는 것,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 심지어 자신들이 가고 싶은 장소에 가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아버지 살해’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아이의 사회화를 강제하는 강력한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으되 부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남성으로서의 삶을 포기한 아버지 히미코/ 테루오는, 그리고 그 이름 뒤에 숨어 있는 무수한 게이들은 페니스를 상실한(혹은 포기한) 남성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를 유지하는 모든 질서를 총괄하고, 무소불위의 힘을 갖는 아버지라는 존재와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가 된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사회로 끌어주기는커녕, 스스로조차도 사회 안에 들어가기를 거부(당)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성 중심적 혹은 이성애적 세계관을 통해서 그러한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은 원래부터 불가능하다. 그들은 그런 질서를 비껴나간, 비딱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에게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사회화되는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세상을 보는 다른 시선을 선사한다. 비스듬히 바라보면 이 세상은 온통 균열투성이고,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은 모두 허위라는 걸.

그러므로 사오리가 아버지 히미코에게 던졌던 여러 가지 질문을 의역하면 “당신은 왜 나를 그렇게 폭력적으로 지배했나요?”가 아니라 “왜 당신은 언제나 부재했나요?”이다. 사오리는 “나를 사랑했었느냐고, 아니 보고 싶기는 했었느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그 질문에 그저 현재의 너를 “좋아하고 있다”라고만 대답한다. 늘 사랑했었다는 대답을 듣기 원했던 사오리는 아버지의 솔직한 대답 앞에서 망연자실해진다. 더구나 늘 피해자였다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아버지의 삶을 이해했고, ‘히미코’라는 공간에서 행복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어머니의 그림자를 벗어버리고 완벽하게 혼자 힘으로 아버지를 대면하며 극복해야 함을 깨닫는다.

이 영화의 미덕은 섣불리 부녀간의 화해를 강요하지 않는 데 있다. 그녀는 아버지의 젊은 애인 하루히코와의 느리고 불투명한 사랑을 통해서 청년 테루오에게 접근한다. 사오리와 하루히코는 서로에게 조금씩 매혹되지만 둘 사이에는 성적 지향이 동일하게 남성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결국 이 둘은 육체라는 표피를 극복하지 못한다. 섹스란 결국은 찰나의 합일 이후에 존재의 극복 불가능한 개별성을 인식하게 만들지만, 그러한 찰나적 합일마저도 가능하지 않은 그들의 관계는 그 이상의 미래를 도모하는 일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오리는 하루히코와의 관계를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눴던 사랑과 아버지가 현재의 자신에게 보내고 있는 사랑의 실체를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하게 된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메종 드 히미코’라는 남프로방스풍의 건물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 공간이 뿜어내는 이국적이고 낯선 느낌은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에서는 그렇게 달콤하게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화합과 이해라는 주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이 영화의 결말은 게이 할아버지 루비가 언제나 중얼거리던 주문 “피키피키피키”처럼 다소 낭만적이고 동화적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의 치열한 반목과 무자비한 차별을 눈 가리는 ‘거짓 화해’라고 비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기존의 편협한 시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거나 존재하는 상처들을 무화하거나 덮어두는 데 기여하지 않으면서도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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