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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시장에 고정된 시선, <무극>
김수경 2006-01-24

“불확실한 것은 운명이 지배하고, 확실한 것은 인간의 재주로 다스린다”는 라틴 경구가 있다. 누군가 운명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숲에서 맥베스를 홀리던 세 마녀처럼 <무극>에서도 강가에 여신(첸홍)이 등장해서 어린 칭청(장백지)에게 슬픈 미래를 예언한다. 칭청의 운명은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시간을 되돌리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는 한 평생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불운한 칭청을 사랑하는 세 남자의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의 가장 큰 불행은 ‘마음은 털어놓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연애의 상식을 망각한 점이다.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대장군, 쿤룬, 북공작은 무작정 기다리고 그녀를 가둬두거나 시키는 일만 수행할 뿐이다. 그런 몸짓을 사랑이나 의지라고 칭하기는 어렵다. 쿤룬의 빛보다 빠른 발놀림으로 뒤쫓아도 따라잡기 힘든 운명의 여신을 소극적으로 기다리기만 한다면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헐벗고 굶주린 전쟁 고아 청칭은 빵을 건네준 여신에게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듣는다. 20년이 지나고 청칭은 왕비가 된다. 한편 노예 쿤룬(장동건)은 이민족과 싸우던 대장군 쿠앙민(사나다 히로유키)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다. 황제를 구출하려던 대장군은 숲에서 길을 잃고, 검은 늑대(리우예)라는 자객에게 중상을 입는다. 그는 쿤룬에게 황제를 구하라고 명령한다. 쿤룬은 대장군의 붉은 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성으로 향한다. 정권을 탈취하려는 북공작(사정봉)의 군사에 포위된 황제는 갑자기 청칭을 인질로 이용한다. 이를 목격한 쿤룬이 칼을 던져 황제를 살해한다. 청칭과 북공작은 가면을 쓴 쿤룬을 대장군으로 착각하고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무극>은 의도적으로 시간과 역사성을 거세한 판타지다. 그리스 비극의 전령처럼 수시로 개입하는 여신의 내레이션과 지역성이 탈각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 <무극>의 장르적 성격은 서사시 <반지의 제왕>보다 SF인 <스타워즈>에 가깝다. 중국 역대 최고의 오프닝을 기록한 <무극>에 대해 “무국적 대작, 지나친 특수효과”라고 현지 언론이 비판했던 점도 이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를테면 전쟁터에서 마주친 대장군이 신변에 관해 묻자 “집도 없고, 고향도 어딘지 모르며, 언제 노예가 된 지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쿤룬은 답한다. 쿤룬이 기억상실증을 앓 듯 시공간을 지워낸 <무극>의 이야기는 첸 카이거 감독이 말한 “운명에 대해 도전하는 태도”로,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할망정 과거로만 뒷걸음질친다. 북공작은 어린 시절 칭청에게 입은 배신의 상처 때문에 모든 사람을 의심하며 살아왔고, 쿤룬은 설국에서 살던 시절 부모와 여동생이 당했던 참극을 되돌리려 한다. 대장군은 자신을 쿤룬으로 착각해서 사랑에 빠진 칭청에게 진실을 밝힐 수 없어 괴로워한다. 시종일관 지속되는 <무극>의 과거 지향적 세계관은 제작 과정에서 의도했던 “개인의 자각이나 각성”이라는 주제와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자신의 과거를 목격하는 쿤룬에게 자객 검은 늑대가 충고하듯이 “네가 본 것은 이미 일어난 일”에 불과하지만 주인공들은 자신의 의지를 명확히 표시하거나 미래를 향해 당당히 나아가지 못한다. 따라서 인물간의 관계도 평면적인 교착 상태에서 허우적거린다. 긴장감이 상존해야 할 연적 대장군과 쿤룬 사이에는 그저 상명하복의 위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대장군과 북공작이 국가와 청칭을 얻기 위해 벌이는 투쟁도 상투적인 대립에 불과하다.

<무극>은 아쉬움만큼 장점도 명확하다. 중국 역대 최고의 제작비 3500만달러가 투입된 <무극>은 아시아에서 제작한 대작영화 중 괄목할 만한 시각효과를 선사한다. <와호장룡>에서 선보였던 여백을 중시하면서도 간결하고 힘있게 구도를 이끌어가는 피터 파우의 촬영, 몽환적이고 강렬한 색조의 의상과 세트 디자인을 담당한 티미 입의 손길, 두 사람의 호흡과 재능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무극>은 흑·백·적·황의 색깔을 계급과 인물에 따라 사용하면서 각각의 색이 맞물릴 때도 중간색을 배제한 채 과감하고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화려한 이미지를 마음껏 발산한다. 이 과정에서 대담한 색조의 배합은 푸르스름한 화면 톤과 맞물리며 매력적인 미장센을 만들어낸다. 장마 때문에 원래 계획했던 햇살이 좋은 운남성의 촬영분량이 대부분 내몽골로 옮겨져 촬영된 프로덕션 상황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광량이 충분한 곳에서 촬영됐다면 전투 장면들은 현재보다 훨씬 따뜻하고 강렬한 톤으로 카메라에 담겼을 것이다. 내몽골의 건조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군중신에서 두드러지는 피터 파우의 역동적인 카메라워크는 속도, 동선, 색감을 모두 훌륭히 살려낸다. 물길로 벽을 만들어 과거와 현재를 평행하게 배치한 후 수평이동으로 찍은 쿤룬이 바라보는 설국의 회상 장면도 장관이다. 다만 안타까운 부분은 이러한 촬영과 세트 디자인의 미덕을 CG와 특수효과가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요 장면만 300컷, 총 1000컷이 넘는 <무극>의 CG 작업은 아름다운 미장센에 균열을 일으킨다. 버라이어티의 로버트 쾰러는 <무극>의 조악한 CG를 꼬집으며 “현재 중국의 CG의 방향은 효과적이던 과거의 카메라를 이용한 효과가 경시되고 디지털 기술로만 집중돼서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기대했던 사나다 히로유키보다는 조연 유예와 사정봉의 연기가 신선하다. 액션 장면이 많지만 오랫만에 멜로적 감수성으로 돌아와 애절한 눈빛을 보여주는 장동건의 연기도 준수하다. 중국영화의 관례인 성우 기용을 마다하고 직접 북경어를 녹음한 노력도 기억될 것이다. 이러한 다국적 캐스팅과 스탭들의 명성을 바탕으로 아시아 시장과 헐리우드를 겨냥했던 애초 의도와는 달리 완성된 <무극>의 시선은 중국 시장에 철저히 고정됐다. 이를테면 무수한 격투에도 불구하고 피 한방울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액션 장면은 전체관람가만 허용하는 중국영화 시장의 검열을 감안한 처사였다. <무극>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대작영화는 비주얼에 천착하다가 스토리라인과 구성에서 자멸을 초래하는 운명을 넘어서야 할 시기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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