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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근과 율법의 세계, 승자는 누구인가, <왕의 남자>

<왕의 남자>에서 벌어지는 세 가지 대결 - 왕과 왕, 중재자와 중재자, 예술과 권력

“부와 폭력의 위세 앞에서 그대들을 보호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과 풍자 이외에는.” - 하이네

지난주(<씨네21> 536호)에 정성일이 <태풍>과 <청연>을 논하면서 지적한 대로 자살 행렬은 두 영화를 거쳐 <왕의 남자>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자살이라는 결말은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연극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원작 연극 <이>의 광대 장생은 자살하지 않고 반란세력에 가담한다.

<왕의 남자>는, 풍자가 아니라 자살이다. <이>의 장생은 풍자가 아니라 반란을 택했다. 장생은 왜 자살하는가. 삶의 고통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인가. 혹은 풍자가 실패했기 때문인가. 혹은 자살이 역설적 승리라고 믿어서인가.

그 이유를 눈먼 채 피 흘리며 외줄 위에서 최후의 공연을 벌이는 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어느 잡놈이 그놈 마음을 훔쳐가는 걸 못 보고, 그 마음이 멀어져가는 걸 못 보고.” 여기서 ‘어느 잡놈’은 왕이고 ‘그놈’은 왕의 남자 공길이다. 그의 자살이 우리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가 사랑을 잃었기 때문이다. 자살의 이유는 실연이다.

두 남자, 또는 대결자들

그의 실연은 두 가지 힘이 작용한 결과다. 하나는 외적인 힘인 권력이다. 그의 연적은 왕이다. 왕의 연인을 빼앗을 수 있는 힘은 장생에게 없다. 다른 하나는 그 연인이 남자라는 점이다. 남성간의 성교를 뜻하는 ‘비역질’이란 단어를 그가 왕을 비난하면서 쓸 때(“이번에는 사내놈하고 붙어먹는 짓도 서슴지 않는데…”) 그는 내면적으로 동성애를 승인하지 못한다. 외적인 율법과 내면의 의지가 모두 그의 사랑을 금한다.

다행히 장생은 광대다. 연행의 마당에선 그가 왕이다. 또한 그 연행 안에서 공길은 여자다. 그는 오직 놀이판에서 연애의 퍼포먼스를 행할 수 있다. 그는 왕을 놀려먹은 담대한 인물이지만 풍자가가 아니다. <왕의 남자>의 장생에겐 풍자 대상과의 실존적 긴장이 없다(“왕이 그렇게 허약할 줄 알았으면 놀려먹지도 않았어”). 영화 속의 첫 공연에서 그가 양반에게 적대감을 품은 것도 그 양반이 공길의 몸을 탐하기 때문이다.

장생의 숨은 목적은 풍자가 아니라 연애다. 자전적 퍼포먼스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줄타기에서 장생은 “어느 광대놈과 짝 맞춰 노는 게 어찌나 신이 나던지 그 신명에 눈멀고”라고 말한다. 공길을 잃는 순간 풍자도 해학도 무의미해진다. 연인을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그는 자살을 택한다. 이게 장생의 이야기다. 다른 한편에 왕(연산군)의 이야기가 있다. 연산의 딜레마는 장생보다 훨씬 복잡하며 깊다. 그는 광대의 영혼을 가진 인간이다. 그는 놀고 싶다. 그가 공길을 데리고 가서 “놀자”라고 말할 때 그는 놀이의 쾌활함을 알고 있다. 자신을 놀려먹는 가면극을 보며 폭소를 터뜨릴 때 그는 풍자와 해학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놀이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장생과 다르다.

연산은 모성의 결여로 고통받고 있다. 어머니를 죽인 건 아버지의 율법이다. 그는 어머니를 되돌려받고 싶다. 혹은 어머니를 살해한 자들을 죽이고 싶다. 하지만 그는 율법의 최고 집행자인 왕이다. 또한 막강한 권세를 지닌 중신들이 그 율법의 집행을 감시하고 있다. 왕은 자신의 소망을 발설할 수 없다. 아버지의 율법을 폐기하는 순간 자신도 폐기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연행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해방구다. 그를 홀린 기생 출신 장녹수는 “젖 먹자, 우리 아기”라고 가슴을 내밀며 왕과 사적인 퍼포먼스를 벌인다. 또한 왕은 그림자놀이의 연행자가 되어 “아바마마, 어마마마가 보고 싶사옵니다”라며 흐느낀다. 마침내 그는 경극 안에서 사약을 받는 공길에게 달려가 “어머니”라고 부르짖으며 오열한다. 왕이 다시 장녹수를 찾아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들어갈 때 그것은 여인의 성기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자궁으로 돌아가고픈 퇴행의 퍼포먼스이다. 그의 무의식은 어머니와 연인을 구분하지 못한다. 공길을 포함한 그의 여인들은 대체 어머니이며, 연행은 어머니와의 불가능한 조우의 장소다.

놀이는 왕에게 좀더 복합적이다. 그것은 단지 쾌활함의 양식만이 아니라, 행위의 직접적인 동력을 만들어낸다(왕은 누가 탐관오리인지, 또 누가 어머니 살해의 조력자인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처단하지 못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장생에게 연행은 말하지 못한 것을 말할 수 있는 장소이지만, 왕에겐 그것에 더해 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행하게 하는 일종의 정치적 선동이기도 하다. 부수적으로는 <햄릿>에서 아버지의 살해범을 밝혀내는 공연이 그런 것처럼 감춰진 죄인이 긴장하여 스스로 죄인임을 드러내도록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연산은 연행에만 만족하지 않고, 연행에 고무 혹은 선동돼 아버지의 율법에 도전한 것이다. 그가 장생의 공연을 보고 처음 시도한 일은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머물렀으면 그는 더 버틸 수도 있었다. 그는 연행자 가운데 한 사람인 공길에게서 또 다른 어머니를 발견하고 그에게 빠진다. 그런데 그 새로운 어머니는 남자였다. 이것은 장생과 공유한 문제다. 그도 동성애를 내면적으로 승인하지 못한다. 자신을 놀려먹는 온갖 광대짓에 매혹되던 그도 ‘비역질’이라는 단어를 듣고선 참지 못하고 장생에게 화살을 날린다. 하지만 왕은 장생보다 적어도 욕망의 부름에 더 충실했다. 장생은 공길의 이불을 끌어올려줄 뿐이었지만 왕은 공길에게 입 맞춘다. 그리고 그에게 벼슬을 내린다. 공길은 왕의 어머니를 살해한 자들을 처단하려는 에너지를 왕에게 분비시킴으로써, 어머니를 되돌려준 존재이기 때문이다. 혹은 더 사랑스런 대체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대에게 벼슬을 내리고 남자를 사랑하는 순간, 아버지의 율법은 더이상 그를 용납할 수 없다.

중요한 점은 그가 아버지의 율법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대안의 법을 마련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법을 세우지 못했으며, 아버지의 율법 바깥에서 놀기를 원하다가 이제 그것을 폐기하려 할 뿐이다. 율법의 집행자가 율법을 폐기하고 광대가 되려는 순간 그에겐 자멸의 길만 남는다. 이게 <왕의 남자>가 그려낸 한 불행한 왕의 이야기다.

두 남자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대결을 벌이지만, 서로 싫어하지 않았다. 왕에게 장생은 처음으로 쾌활함을 알게 해준 소중한 인물이며, 장생에게 왕은 궁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승인한 유일한 그리고 가장 강한 인물이다. 두 사람은 실은 서로의 자리를 동경한다. 장생이 “큰 판을 벌여야지”라고 말할 때 왕의 자리를 원하며, 왕이 공길에게 “놀자”라며 천진난만하게 웃을 때 장생의 자리를 탐한다. 두 사람의 상호 존중과 동경은 또 다른 한 남자인 공길의 존재로 결국 무너지긴 하지만.

<왕의 남자>는 실패하여 자멸의 길을 택한 두 남자 혹은 두 왕, 광대판의 왕과 현실권력자로서의 왕의 이야기다. 두 남자에 대한 이 영화의 묘사는 사려깊고 예민하다.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가 특정한 시대가 아니라 어떤 시대나 품고 있는 계급에 관한 이야기라고 자평했다. 가졌으나 공포와 억압의 괴물로 변한 자신의 소유물들로 질식당한 사람들, 그리고 가지지 못했으므로 맨몸으로 부딪히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 누구나 이 영화에서 자신의 친구를 발견할 것이다.

또 다른 두 남자 또는 중재자들

이 영화는 또한 두 남자를 중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을 파멸로 이끈 또 다른 두 남자 처선과 공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들은 영화의 서사를 작동하는 인물들이면서 또한 이 서사의 결함을 드러내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두 중재자는 이면에서 은밀하게 충돌하며 또 다른 대결 서사를 작동시킨다.

서로 만날 수 없을 계급에 속한 연산과 장생의 만남을 주선하는 인물이 ‘방울 소리를 낼 수 없는’ 내시 처선이다. 방울 소리를 요란하게 내는 중신들에 적의를 품고 있는 연산군의 유일한 참모인 처선은 장생의 광대패를 궁으로 불러들여 멍석을 깔아준다. 그러나 처선이 두 남자의 이례적인 만남을 주선하고 중재하는 목적은 모호하다.

그의 입으로 밝히는 이유는 “간신들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처선은 부패한 중신에 대한 풍자극이 그들에 대한 단죄로 이어질 것임을, 즉 풍자의 정치적 선동 효과뿐만 아니라 왕의 심리적 반응 패턴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더 많이 알고 있다. 그가 장생의 광대패에 내민 첫 과제는 임금을 웃기라는 것이었다. 궁중의 첫 공연에서 광대패는 기생 출신 후궁과 음탕한 놀이에 열중한 왕을 풍자하는 것이었다. 처선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이 불경한 풍자가 왕을 웃게 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처선의 가장 놀라운 지식은 그가 장생에게 경극을 주문할 때 드러난다. 연산군 모친의 비극적 죽음을 재현하려 할 때 한국 가면극의 희극성이 그 서사에 부적합하며 중국의 경극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처선은 또한 많은 걸 모르고 있다. 당연하게도 왕의 공길에 대한 사랑을 예상 못했다. 무엇보다 왕이 선왕(왕의 아버지)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려 할 때 왕에게 닥쳐올 위험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다. 또한 왕이 재현된 어머니의 죽음을 직면하면서 미쳐갈 것임도 모르고 있었다.

처선은 뛰어난 예술학자, 어설픈 심리학자, 실패한 정치학자의 믿기 힘든 결합이다. 그의 지식은 자의적으로 조합된 지식이다. 실패한 중재자로서의 처선의 지식과 무지는 두 남자가 자멸의 길에 이르는 서사의 경로를 마련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동원된다. 처선은 하나의 주체라기보다, 예컨대 난데없이 경극을 등장시키려 할 때, 개연성 없는 서사의 핑계로 동원되는 기능이다. 장항선이라는 뛰어난 배우의 존재감으로 웬만큼 가려지긴 하지만, 이 점이 <왕의 남자>의 결함 가운데 하나다.

처선이 정치학으로 두 남자를 중재한다면, 공길은 연행과 육체로 두 남자를 중재한다. 그런데 공길의 주체도 불투명하다. 그는 대상으로서만 투명하다. 그는 아름답고 다정다감하며 유능한 광대다. 하지만 그는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는 자기 몸을 탐하는 양반을 거부하지 않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가련한 두 남자를 연민한다. 그는 늘 남자들이 원하는 자리에 가 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말하지 않으며 남성인 자기 몸에 깃든 여성을 응시하지 않는다. 캐릭터의 순응성과 피동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그의 시선을 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성적 접촉이 금지된 대상이다. 공길은 남자이므로 왕과 천민에게 동시에 금지되는 유일한 성적 대상이다. <왕의 남자>의 ‘금지된 대상’에서 중요한 건 대상이 아니라 금지다. 그 대상은 단 한번도 자기 응시의 주체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아름다우나 금지된 어떤 것으로 우리에게 남는다. 금지된 것을 욕망한 대가를 치르면서도 금지가 누구의 율법인지를 두 남자는 묻지 않는다.

광대는 그 금지를 풍자하지 않고 자살한다. 혹은 왕은 금지를 교정하지 않고 옥쇄한다. 여기서 공길은 실패한 두 남자의 자기 연민이 투사된 존재, 혹은 실패의 알리바이로 존재한다. 왕은 정치에 실패했고 장생은 풍자에 실패했지만, 그 실패는 그들에게 책임이 없는 금지 때문이다. 대상은 마침내 사라지고 남성들의 거대한 자기 연민만이 이 서사에 메아리친다. <왕의 남자>가 동성애 코드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영화에 속하기 힘든 이유는 이 영화의 동성애가 율법의 경계를 뚫고 혹은 그것과 긴장하며 생동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억눌리고 입 막힌 채 고정된 ‘금지’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방식으로 개인사를 드러내고 자신의 욕망을 발설하는 연산과 장생과는 달리, 처선과 공길은 이 서사 안에서 연원이 없으며 자기 욕망을 말하지 못하는 존재다. 두 중재자는 스스로를 주체로 드러내기보다 하나의 서사적 기능으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중재자는 은밀한 층위에서 대결한다. 물론 그 대결은 서사적으로 설계되어 있지 않으며 징후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남성인데도 남근이 없다는 점이다. 물리적으로는 있지만 기능하지 않는다. 처선은 그 기능을 박탈당했고 공길은 그 기능을 원치 않는다. 남근이 없는 한 그는 역사적 주체로 나서지 못한다. 그들의 기능은 남근들의 조력자다. <왕의 남자>의 서사가 그들의 주체성을 승인하지 않는 것은 남근적 세계관의 반영이다. 남근은 광대놀이에서 거대한 호리병으로 둔갑해 오줌을 갈겨대며 놀이판을 휘젓는다. 그리고 왕은 실제로 가장 큰 남근의 소유자로 공인된다(“임금님의 물건이라면 그 정도는 커야 되지 않나 싶어서…”, “왕의 물건이 워낙 커 궁이 시녀들의 자지러지는 소리로 가득…”).

이 서사 안에서 남근없이 자기 존재를 승인받기 위해선 자기 완결적인 주체가 아니라 거대 남근의 제1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왕의 남자가 되어야 한다. 처선은 연산의 남자였고, 공길은 장생의 남자였다. 문제는 공길이 연산의 남자 자리를 차지하면서 발생한다.

처선은 왕의 가혹한 처단의 설계자였고, 왕의 절대적인 동지였다. 그는 남근이 없는 대신 노회한 정치학이 있었고, 그것으로 왕에게 봉사한다. 그는 단 한번 왕에게 반항한다. 공길에게 종4품 벼슬을 내리자 처선은 왕에게 “광대 한명에게 정신이 빠졌다”고 불경한 진언을 올린다. 심지어 중신들의 언어인 “죽어도 선왕을 뵐 낯이 없다”는 표현까지 동원한다.

왕이 아버지의 율법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심지어 그 증오를 이용해 구파 중신들을 처단하는 데 이용한 처선에게 그것은 왕과의 결별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왕도 처선을 용서치 않는다(“네가 정녕 미친 게로구나”). 그는 네 번째 왕을 모시자는 반란세력의 권유를 거절한다. 세명의 왕을 모셨으므로 그는 이미 절개를 지키는 신하가 아니다. 지금 그를 움직이는 건 절개나 종묘사직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그의 웃음을 보고 싶었던 한 남자 곧 연산에 대한 애정이며 공길에 대한 질투다. 그의 정치학을 실패로 몰고 간 것은 이 애정과 질투다. 왕의 남자 되기를 실패하자 그도 정치학을 포기하고 자살한다.

공길은 울다가 잠든 왕의 눈물을 훔쳐줄 때 왕의 남자 되기를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이 서사 안에서 그는 처선과 달리 모든 남자를 매혹시킬 만큼 아름다운 몸의 소유자이므로 처선의 대체 남근이었던 그의 정치학을 배울 필요가 없다. 단지 왕의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도 실패할 운명이다. 그에겐 왕을 품어줄 자궁이 없기 때문이다. 장생은 자궁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나, 한 여인에게 어머니의 자궁과 여성의 질을 함께 원하는 연산에게 공길은 결여된 존재다. 그는 몸으로 장녹수와 대결해야 하지만, 장녹수의 자궁이 없다. 연산이 그를 버리고 장녹수의 가랑이 사이로 투항할 때, 그것은 공길의 원천적 결여와 운명적 패배를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그 역시 왕의 남자 되기에 실패한다. 그가 죽어가는 또 다른 왕, 장생에게 돌아가는 것은 필연적이다.

두 중재자의 실패는 두 왕의 실패보다 더 가련하다. 온전한 여성은 남성의 하위에서나마 안정된 자신의 자리를 배정받는다. 그 자리에서 어떤 여성은 장녹수처럼 자궁의 힘으로 거대 남근을 품음으로써 자잘한 남근들을 제압한다. 반면, 두 중재자의 욕망은 끝내 말해지지 못한 채 혹은 말해지기를 금지당한 채, 결국 자궁의 소유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준다. 남근없이 살아가는 남자에게, 남근의 세상은 영속적인 역할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 감춰진 또 다른 계급은 남근 혹은 남근성의 유무에 따라 결정되는 계급이다. 처선과 공길은 패배한 남성보다 그리고 온전한 여성보다 계급적으로 더 불행한 존재들이다. 남근성을 거세당해 애타게 대체 남근을 찾아 헤매다 추락한 사람들 혹은 남근성이 원천적으로 부재해 여성의 자리에 안착하느라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친구를 발견할 것이다.

또 다른 대결 - 권력과 예술

<왕의 남자>는 연산과 장생으로 대변되는 권력과 예술의 대립 서사이기도 하다. 표면상으로는 왕과 광대의 대결에서 광대의 영혼 곧 예술이 승리한다. 장생은 “다시 태어나면 왕으로도 싫다. 양반도 싫다.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될 것이다”라고 외친다. 하지만 <왕의 남자>에서 이 대결이 가장 부실하게 그려져 있다. 이 영화에는 장생의 호쾌한 선언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자의식이 보이지 않으며, 예술 양식에 대한 존중이나 매혹도 없다. 장생은 더 큰 판에서 더 강한 대상을 놀려먹는 것이 광대의 길이라고 믿고 있지만, 광대패의 풍자는 공격적 선언이나 비웃음이기 이전에 고도의 숙련이 요구되는 양식이다. 이 영화의 이상한 점 가운데 하나는 뛰어난 광대를 그리면서도 그 수련과정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생과 공길이 한양으로 가는 길 위에서 저들 홀로 벌이는 장님 공연은 <서편제>의 진도아리랑 장면을 상기시키고, 경극 장면은 <패왕별희>를 상기시키지만, 이 영화에는 <서편제>와 <패왕별희>가 그렇게 공을 들인 수련 장면이 없다. 장생의 재능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으며 그는 자신의 재능을 한번도 회의하지 않고 변치 않는 자부심을 드러내며 항상 최상의 공연을 만들어낸다.

경극 공연 대목은 좀 지나치다. 언문도 겨우 익힌 조선의 지방 광대패가 중국 경극 교본만으로 그렇게 짧은 시간에(<패왕별희>의 경극 배우들은 어릴 때부터 가혹한 수련을 거친다) 발성은 촌스럽지만 거의 완벽한 분장과 세팅의 경극 공연, 그것도 그들이 이전까지 한번도 하지 않았던 비극을 만들어낸다. <왕의 남자>는 예술 양식의 고유성을 외면하면서 공연들의 인과론적 서사 기능에만 몰두한다. 노상 장님 공연은 장생이 정말 눈멀어 벌이는 최후의 공연을 위해 필요한 장치이고, 경극은 유희적인 광대패 놀이가 연산군 모친의 비극을 다룰 수 있는 그릇으로 부적합하기 때문에 혹은 색다른 구경거리로 선택된 것이다. 이 영화대로라면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장생 일행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공연 예술가들이다.

최고의 예술가가 단 한번도 자신의 예술을 결코 회의하지 않을 동안 권력자는 단 한번도 자신의 권력에 매혹되지 않는다. 이 대결은 처음부터 승부가 정해진 싱거운 게임이다. 예술은 늘 최고의 완성에 이르는데, 권력은 혐오와 불안과 광기와 균열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가는 공연장에서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할망정 사생활에선 한번도 자신의 성욕을 표현하지 않는 도덕주의자인 반면, 권력자는 욕망을 과잉 분사하는 악동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예술을 제대로 묘사하지 않는 만큼 권력도 제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두 광대와 두 권력자는 모두 사실상 자살로 끝맺는다. 이 마지막 장면은 권력과 역사를 동일화해 나쁜 타자로 밀어낸다. 사극의 무대 위에서 그들의 죽음을 응시할 인물조차 남겨두지 않고 주요 인물이 모두 죽는 이 설정은 과격하게 순진한 반역사주의다. 나쁜 역사의 반대편에 갖가지 방식으로 사멸한 남성들의 자기 연민이 있다. 남성들의 자기 연민과 자살은 한국영화의 변치 않는 유혹이다.

몇몇 결함들에도 나는 한 인물 때문에 이 영화를 지지한다. 그는 정진영이 연기한 연산군이다. 자기 연민과 자기 혐오, 천진함과 노회함, 광기와 열정, 잔인함과 순진성이 뒤섞인 이 권력자는 한국 사극에서 유례없는 캐릭터다. 자신이 승인했고 사랑한 그러나 자신이 두눈을 빼앗았고 사랑하기를 멈춘 두 광대가 마지막 줄타기 놀이를 벌일 때 천진난만한 웃음이 환하게 퍼지는 그의 얼굴은 오래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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