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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숨겨진 욕망, <음란서생>
문석 2006-02-21

풍모 번듯한 조선의 선비가 한지를 깔아놓은 책상 앞에서 시름시름 고민하고 있다. 보아하니 뭔가를 써나가려는 참이다. 한획 한획에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품은 애끓는 상소문인가, 주군에 대한 하염없는 충정을 꾹꾹 눌러 담은 송가(頌歌)인가. 마침내 슥슥, 하얀 종이 위에 검은 길이 뚫린다. 그 종이 위엔 한글로 또박또박 이렇게 적혀 있다. “그의 굵은 음경이 그녀의 음부를….” 이게 웬 황당 시추에이션이냐고? 그런데 잠깐만. 근엄하기 짝이 없는 조선 선비가 음탕하고 난잡한 이야기를 쓴다는 설정만으로도 쿡쿡 웃음이 터지려 하지 않나.

<음란서생>은 이런 기본적인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아이러니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근엄한 유교적 덕목이 공기에까지 스며 있었던 보수적인 세상에서 노골적으로 야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양반이라니.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리고 과연 그의 육신은 끝내 안녕했을까. <음란서생>은 꾸역꾸역 치밀어오르는 궁금증을 화려하면서도 넉넉한 필치로 풀어낸다.

지금으로 치면 검찰에 해당하는 사헌부의 고위 관리이자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윤서(한석규)는 알고 보면 꽤 딱한 남자다. 그의 가문은 현재 권력을 잡은 세력가의 반대편이라는 이유로 심한 고초를 겪고 있다. 심지어 그의 동생은 의금부에 불려가 고문을 당한 뒤 반불구 신세가 된다. 그가 딱한 진짜 이유는 부친을 비롯한 주위로부터 ‘동생의 꼴을 보고도 상소문 하나 올리지 못하는 새가슴’이라는 비난을 듣는 ‘샌님’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문중 어르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부인으로부터 “사람들이 뒤에서 당신보고 뭐라고 수군대는 줄이나 아시오? 제 몸 다칠까 두려워서 벌벌 떠는 겁쟁이라고 합디다”라는 꾸지람까지 듣겠는가.

영원히 소심남으로 기록될 뻔했던 윤서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건 왕이 총애하는 후궁 정빈(김민정)의 족자 위조 사건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면서부터다. 유기전 주인 황가(오달수)가 이 사건과 관련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의금부 도사 광헌(이범수)과 함께 이곳을 덮친다. 그곳 비밀공간에서 인봉거사라는 자가 지었다는 요망한 책을 접한 윤서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책은 성기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더불어 남녀가 합궁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었던 것. 알고 보니 이곳은 음란물을 필사해 유통시키는 공간이었고 황가는 최고의 음란물 유통업자였다. 정말 희한한 일은 사건을 해결한 뒤에 찾아온다. ‘음부’ 따위의 단어가 윤서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과 아랫도리를 수없이 호통쳤음에도 동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그는 마침내 음란물을 직접 적기에 이르고, 황가는 아예 연재를 제안한다. 그렇게 탄생한 <흑곡비사>는 장안의 화제작이 되고, 윤서는 평소 힘찬 그림을 그리던 광헌까지 ‘삽화가’로 영입해 음란물계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다.

윤서에게 음란한 이야기를 쓰는 일은 낯설고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는 모험이자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어떤 제약도 없이 노골적인 성묘사를 하는 가운데 그는 그를 옥죄고 있던 올무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느낀다. 양반이라는 신분과 사대부라는 명분, 가문이라는 껍데기 등 그를 갑갑하게 만들던 모든 것은 이 환상의 세계 속에서 모두 사라진다. “꿈꾸는 것 같은 거, 꿈에서 본 것 같은 거, 꿈에서라도 맛보고 싶은 것”으로 정리되는 음란물의 ‘진맛’을 깨닫게 된 것이다. 윤서가 소설 안에 자신을 투영시키면서 스스로를 호방하고 정력적인 마초로 묘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 개인적이며 자족적인 방식의 시스템에 대한 항거는 ‘초월의지’의 비뚤어진 형태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시스템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현실의 외곽 또는 바깥에서 승자가 되고자 한다. 결국 윤서는 김대우 감독이 각본을 썼던 <반칙왕>의 대호와 같은 인물이다. 그는 ‘추월색’이라는 마스크를 쓰고 지하 음란물 시장이라는 링 위를 활보한다. 어쩌면 그 아웃사이드 또는 언더그라운드야말로 진짜 사람들의 진짜 삶이 이뤄지는 공간이지도 모른다.

<음란서생>의 한축이 윤서의 모험담 또는 자아발견기라면, 또 다른 중요 축은 윤서와 정빈의 로맨스다. 족자 사건이 끝난 뒤 정빈은 윤서에게 도발적으로 접근한다. 윤서 또한 정빈에게 매혹되지만, 이 ‘왕의 여자’와의 ‘위험한 관계’가 발각되는 날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여 윤서는 정빈을 판타지 속 여인의 원형으로만 두려 하지만, 차츰 ‘거(시)기서 나오는 령(令)’을 거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초점이 멜로쪽으로 옮겨가면서 영화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정사를 도모하는 윤서의 마음이나,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안 가지고는 못 배기는” 데서 비롯된 듯한 정빈의 마음이나 사랑이라 부르기에 어색한 감이 있다. 때문에 사랑과 배신과 질투가 영화 전체를 휘감는 후반부의 격앙된 감성은 다소 뜬금없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다른 두 남자의 정빈에 대한 감정이나 윤서와 광헌의 우정 이상의 애정 등 영화 전반에 걸쳐 캐릭터들의 감정은 꾸준히 축적되지 않은 채 극적 순간으로 치닫는 듯하다.

그렇다고 <음란서생>이 이룬 성취를 외면할 수는 없다. 꼼꼼하고 성의있는 미술과 의상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발칙하면서 소구력 있는 상상력으로 과거를 재현함으로써 조선시대의 숨겨진 욕망을 보여줬다는 사실은 한국 사극의 진일보라 일컬을 만하다. 여기에는 <정사> <반칙왕>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등의 시나리오를 쓴 김대우 감독의 역할이 가장 컸을 터. 특유의 유장한 대사와 시의적절한 코미디 템포는 <음란서생>을 ‘웰메이드 사극’의 반열에 올리는 것을 주저치 않게 한다. ‘댓글’, ‘동영상’, ‘폐인’ 등 현대적 기호를 등장시키거나 황가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제작을 풍자하는 등 곳곳에 배치된 유머 또한 시대의 간극을 좁히려는 애교섞인 시도로 받아들일 만하다. 물론 영상도 대사만큼이나 좀더 ‘음란’했더라면, 하는 일부 관객의 아쉬움까지 피해갈 순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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