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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행간을 읽는 건축가 황두진
사진 오계옥김혜리 2006-02-24

건축가 루이스 칸은 “도시는 소년이 일생 동안 거닐면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교시를 찾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건축가 황두진에게 도시는 교시를 찾는 장소이며, 나아가 교시 자체다. 서울이 그의 도시가 된 것은 우연이지만 황두진은 그 우연을 전력을 다해 받아들인다. 건축과 글쓰기, 그의 집 거실에서 열리는 대화의 장(場) ‘영추포럼’이 황두진이 도시와 대화하는 몇 가지 방법이다.

황두진은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서 태어나 성북구 정릉동과 과천을 거쳐 지금은 경복궁 영추문이 건너다보이는 종로구 통의동에 사무실을 겸한 집을 마련해 살고 있다. 재미 건축가 김태수 문하에서 실무를 익혔고, 2000년 황두진 건축사무소를 차렸다. “주택, 기업 사옥, 병원 등 중소 규모의 설계 건물을 수준 높게 설계하는 것에 주력해왔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황두진 건축사무소의 대표작 중에는 서교동 해냄출판사 사옥, 통의동 열린책들 사옥, 재동 ‘나무와 벽돌’, 가회동 한옥 개축 프로젝트 등이 있다. 나는 황두진이 쓴 책을 그의 건물보다 먼저 만났다.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해냄)는 개인의 역사와 도시의 이력서가 담을 무너뜨리고 어울리는 내용의 책이었다. 저자가 태어나고 자란 집 구석구석에 얽힌 추억담에 통의동이 배출한 추사 김정희와 건축가·시인 이상의 일화가 따라나오고 뒤미쳐 항구 도시 서울에 관한 신나는 상상이 번져나와도 스스럼이 없는 책이었다. 저자는 자신을 ‘동네 건축가’라고 규정했다. 주변을 살피는 것이 의미 있는 건축의 출발점이고, 현실과 역사의 실증적 탐구가 작업의 전제라는 의미였다. 시간을 새기지 않는 도시 서울의 괴벽에 대해 불평만 하는 시민이었던 나는, 책을 덮은 이튿날 난생처음 1:10000 서울시 지도를 샀다. 그리고 손금을 읽듯 더듬어 보았다.

기록과 단상, 대화로 꾸며진 건축가의 홈페이지는 그의 책에 담긴 아이디어가 지닌 깊은 뿌리와 풍성한 가지를 확인시켜주었다. 한 줄의 문장이 유독 눈길을 오래 붙들었다. “나는 자유인이며, 건축은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고마운 나의 직업이다.” 그처럼 탄탄한 의제들을 차곡차곡 쌓아둔 대화의 달인에게 만남을 청하는 것은, 샘에서 목을 축이듯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보통 사람에게는 건축가라 하면 상류층이나 직접 만날 일이 생기는 사람으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기본적으로 건축이란 자본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건축가는 아무래도 자본을 소유한 사람을 접하게 되겠죠. 그런데 진짜 큰 자본은 공공의 소유거든요. 따라서 건축가는 지역을 조사하거나 동네 골목이나 공원을 개선할 때 함께 고민하고 조언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공공자본이 문제의식 있는 건축가들과 잘 연결되지 않기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계의 스타 건축가 대부분은 민간이 발굴하지 않았어요. 민간은 연줄도 업적도 없는 젊은 건축가에게 일을 주기 힘들지만, 공공은 차세대를 키우는 사회적 명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젊은 신인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거든요. 공공자본의 쓰임새가 잘못되어 건축가가 필요 이상 멀게 느껴진다고 말하고 싶어요.

-홈페이지 ‘블루프린트’(www.doojinhwang.pe.kr)에 본인의 프로필을 ‘수정란 착상 추정 시점’부터 시작해 연표 형식으로 정리해놓으셨습니다. 한국과 세계의 중요 사건 연대기도 나란히 쓰셨고요. 본인의 삶을 작은 역사처럼 정리하고 세계 속의 좌표를 살피면서 어떤 재미를 느끼셨습니까? =기본적으로 내가 없으면 세계도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죠.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도 개인의 경험에서 이야기를 확대하는 방식으로 썼잖아요? 형식적으로는 제임스 조이스가 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주인공이 자기로부터 우주까지 나아가는 정체성을 선언한 대목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저는 우리 시대가 해결할 과제 중 하나가 개인의 발견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추상적 이념이 아니라 구체적 개인들이 수고하며 힘들게 만드는 건데 그 의미를 우리 사회는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아요.

-유년기에 간염, 신장염 등을 호되게 앓으신 걸로 압니다. 제 경험으론 학교를 결석하고 오랫동안 혼자 있다보면 좀 다른 감각이 생기는 것 같던데요. 소년 시절 병상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세상을 세밀하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누워 있다보면 천장에 간 금도 보이고 그러잖아요? 가까운 사물이 지닌 질감과 색감, 광선과 어우러져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이 보이죠. 현대인들은 바쁘게 살다보니 만사는 고정돼 있는데 자기만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세상만사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걸 강제로 몸이 아파 누워 있다보면 체험하게 되는 것 같아요.

건축의 무거움을 매일 생각하며 삽니다

-뭔가 만드는 행위가 좋아서 건축을 선택하셨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법, 자본, 기능을 충족시켜야 하는 건축은 ‘만들기’ 중에서도 가장 무겁고 제약이 많은 창작입니다. 자아와 창작의 결과가 단순하게 연결되는 분야를 선택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요? =건축의 무거움은 매일 생각하며 삽니다. 사람은 비슷한 부류와 어울리려는 성향이 있지만, 사실 집을 짓다보면 늘 잡음이 있고 이웃부터 현장에서 일하는 분까지 온갖 다양한 사람을 상대하고 설득하게 되죠. 그러나 건축가로 살면서 좋은 것 중 하나는, 사회와 폭넓게 조우하면서 살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제가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사는 작가면 예술품 딜러나 큐레이터만 상대하겠죠. 저희는 무거운 창작 특유의 쾌감이 있어요. 작업 제1일부터 들어가는 온갖 인간의 수고가 건축을 재미있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건축 법규 중 가장 얄궂은 난센스라고 생각하시는 조항이 있나요? =현행 법규 중 일조권과 관련해 대지의 북쪽 경계선에서 일정 거리를 떼어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어요. 뒷집의 일조권을 내가 보호하는 방식이죠. 그런 식으로 하다보면 마당이 북쪽에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법 제정 상황은 이해하지만 우리는 대대로 기후와 문화 때문에 마당이 중요하고, 마당은 집 남쪽에 있어야 하는 걸로 인식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한 나라의 건축법에는 한 나라의 건축문화가 깊숙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마당을 남쪽에 만들기 힘들게 한다면 악법이라고 생각하죠. 사실 우리의 현행 건축법은 좋은 환경보다 효율적인 식민지 경영을 우선시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이제는 그 법을 부분 땜질해가는 건 한계에 이르렀고 장기 계획을 세워 건축법을 다시 쓸 시점이라고 봅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1994, 1995년 무렵에 소장님은 어디 계셨나요? =미국의 설계사무실을 다니던 중 서울 사무소의 팩스로 소식을 들었습니다. 건축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 하나는 “천년 만년 간다”입니다. 아마 마당 한복판에 페인트도 안 칠한 쇠막대기 하나를 꽂아놓아도 몇년 못 가 녹슬어 없어질 거예요. 원래 자연은 높은 데서 아래로 떨어지고 쇠는 녹슬고 건물은 쓰러지고 사람은 늙어죽게 돼 있어요. 그걸 어떻게든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건 다 인력이거든요. 그러므로 관리자들의 책임도 큰 것이죠. 성수대교 경우, 숫자는 과장이 있겠지만, 연인원 6천명이 자기 할 일을 안 해야 붕괴한다는 말을 당시 들은 적이 있어요. 어떤 한 사람이 이건 큰일이라 여기고 근본적 시정을 추진했으면 안 무너졌다는 거죠. 또 그런 일에는 늘 조짐이 있는데 인간이 조짐의 메시지를 빨리 알아채서 적절한 행동을 하면 대형 참사는 막을 수 있죠. 두 붕괴는 건축에 대한 제 생각에도 변화를 일으켰어요. 근본적으로 건축은 좋은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게 사람을 죽이는 것이구나”라고 깨달았죠.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같은 극적인 사태뿐 아니라 좋지 않은 도시환경 또한 사람을 천천히 죽일 수 있어요. 그 경우 죽임을 당하는 수는 어마어마하고요.

-소장님은 건축과 그것을 둘러싼 문화에 대해 글로써 활발히 발언하고 계십니다. 일찍이 대학원 수료 전부터 공적인 글쓰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또 ‘도시건축적 추리소설’을 언젠가 쓰고 싶다고 표현하셨듯이, 왜 이 골목과 이 땅은 이렇게 됐는지 상상하기도 좋아하시고요. 소장님에겐 건축 속에서 내러티브를 찾으려는 본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미술, 음악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이 나름의 가치를 나름의 형식에 담고 있어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궁극적 최종적 가치를 획득하는 건 문자의 세계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건축가로서 내가 몸담은 공간적·시각적 세계가 문자적 세계와 무슨 관련이 있을지에 항상 관심이 있어요. 건축적 리얼리티의 세계는 생각보다 영속적이지 않거든요. 길지 않은 경력 속에 제가 설계한 것도 없어지거나 심하게 변형된 건물이 있으니까요. 건축가들이 “너 엘리베이터 있는 것 해봤어?” “너 특별 피난 계단 해봤어?” “헬리포트 해봤어?”라고 농담을 할 때면 전 이렇게 거들죠. “나는 내가 한 건물 없어진 것도 있어.” (웃음) 건물보다 이미지가, 이미지보다 문자가 오래가요. 제약이 많은 건축과 큰 자유가 주어지는 글쓰기는 좋은 짝인 것 같아요. 상보관계죠.

-건축은 무엇보다 물질성과 양감이 압도적인 장르인 만큼, 시각예술, 공간예술로만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통의동 이야기’(통의동의 역사와 현황, 공간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탐구한 황두진의 프로젝트)를 읽어보니, 공간의 변화에도 방향과 시간성이 있고 경관과 이루는 조화도 가까운 미래를 내다보고 연출해야 하니 시간예술적 측면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점이 가장 어렵습니다. 서울처럼 선거 한 번 치르면 건축법이 바뀌는 동네에서 예측은 정말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변하는 도시환경 속에서 건축가가 취하는 최선의 전략이 주변과 건물을 단절시켜버리는 거죠. 주변이 어찌되든 문제가 되지 않고 환경에 의존하지 않는 건물을 짓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강인하고 가족과 잘 지내지만 커뮤니티 생활을 어려워하는 것과 평행한 상황이 건축에도 있는 거죠. 그러나 제가 설계한 열린책들 사옥 같은 건물은 앞에 있는 경복궁이 다른 건물로 바뀌면 가치가 떨어집니다. 경복궁이야 이사갈 리가 없다고 보지만. (웃음) 그러니까 변화하는 도시 속에서 예측 가능한 삶을 살고 싶다면 문화재 근처로 이사가세요. 물론 세계는 기본적으로 변하려고 합니다. 건축은 변화를 촉발할 수도 있고 불변하는 것을 찾아갈 수도 있어요. 다만, 우리나라는 워낙 경제 발전이 급속했고 새것을 좋아해 전자의 기능만 강조해왔어요.

-유학 기간 중 건축관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었습니까? =한국에서는 보통 사람이 살면서 하는 최고 수준의 건축 행위가 벽에 못 박거나 가구를 배치하는 정도라 건축을 관념적으로 접하는데, (웃음) 미국은 가족끼리 집을 고치는 일도 흔하죠. 거기서 오는 생각의 차이가 있어요. 역설적이지만 가까이 있는 것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일이 가치 있다는 것을 미국에서 배웠어요. 뉴헤이븐은 소도시인데 국제적 학교인 예일대에 의외로 동네 학교 분위기가 있어서 뉴헤이븐의 역사와 도시 구조를 가르치는 강의가 있었어요. 서울대가 신림동에 관한 강의를 운영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죠. 커뮤니티 연구자가 많은 미국에서는 중앙의 논리를 지방에 그대로 적용할 있다고 생각지 않아요. 오히려 중심지에서 주변에 대한 시선을 발견한 셈입니다.

야전의 학자들이야말로 흥미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동대문 시장 프로젝트(아트플라자 증축)는 지금까지 하신 작업 중 좀 이질적인 프로젝트였습니다. =민간 프로젝트였지만 여러 건축주를 상대하며 수많은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밀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공 프로젝트 성격이 있었어요. 또 건물 단위 작업을 했지만 도시적 사고를 배웠어요. 동대문 시장은 그 안에서 살지 않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일종의 생태계거든요. 상인들의 생활 패턴에 맞춰 은행이 찾아오고 식당은 배달 음식으로 대체되는가 하면, 동대문 시장의 영역은 그곳의 옷을 공급하는 창신동 지역까지 연결되죠. 덕분에 다음 프로젝트로 모든 면에서 시장과 대조적인 출판사를 설계하면서도 건물 하나를 짓는 관점을 넘어설 수 있었어요.

-지금 언급하신 통의동 열린책들 사옥이 독립 개업 뒤 건축적 심혈을 기울인 첫 작품 같습니다. 당시의 고민과 결과에 대해 자평을 해주신다면요? =처음엔 통의동에 대해 백지 상태였죠. 맞은편은 경복궁, 위쪽은 청와대, 뒤에는 변두리 같은 동네, 한때 있었다고 전해지는 백송, 그 모든 것이 내 재료일 텐데, 고수 요리사가 아니면 만들기 힘든 음식 같았어요. 그때부터 설계와 동네 공부를 같이 하기로 했고, 이제는 어떤 프로젝트를 하면 지역 연구를 병행하는 것이 버릇이 됐어요. 자평하자면 열린책들 사옥은 구석구석 현대건축이지만 맞은편의 600년짜리 궁궐과 무의미하게 불편한 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이 있는 지역에 건축이 개입해 들어갈 때 그중 하나의 답이 현대 건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 같아요. 통의동의 역사나 정보가 설계에 직접 반영된 부분은 많지 않지만, 심층적 차원에서 동네와 친화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사실 건물 하나 설계할 때마다 지역을 탐구한다는 건 건축가에게 힘든 이야기예요. 군인 가운데 기록을 가장 많이 남긴 롬멜이 제가 흠모하는 인물이에요. 그는 전장에서 치열히 싸우고 바로 뒤돌아서서 치열히 썼어요. 이론과 실천을 막상막하로 수행했는데, 저는 건축가로서 그와 비슷하게 가려고 애써요. 주변을 보면 삶은 참호 속의 보병처럼 살지만, 기본적으로 그것과 거리를 둔 정신세계를 가진 ‘야전의 학자’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그들이야말로 흥미로운 생각을 갖고 있다고 느낍니다.

해냄출판사 사옥 내부

-서교동의 해냄 출판사 사옥에도 가 봤습니다. 해냄 출판사 대표께서는 편집자의 감각이 둔해진다며 파주 출판단지 밖에 머물기를 결정하셨다더군요. 승효상, 김준성, 김영준 선생 등 많은 건축가들이 파주 출판단지, 헤이리 아트밸리에 작품을 남겼는데 예술가 집단 주거지, 출판단지에 대한 소장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일단 파주 출판문화단지나 아트밸리는 우리 현대건축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될 겁니다. 저는 그와 반대로 기존 도시 안에서 작업해왔는데 마침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 출판사 두 곳을 설계하는 바람에 “서울은 내가 지킬게”라는 농담도 했죠. (웃음) 지금 우리 옆집에는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가, 맞은편엔 다세대 주택이, 앞엔 출판사가 있는데요. 제게 도시는 그런 곳이에요. 만약 앞집에는 조각가, 옆집에 사진작가, 뒷집에 작곡가가 산다면 거기서 어찌 살까 싶어요. (웃음) 기본적으로 도시는 멤버십 클럽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불특정 다수가 서로 섞여 사는 곳이 도시고, 도시의 에너지는 그런 곳에서 나온다고 보기 때문에 디자인된 ‘멤버십 도시’에 대해서는 제 자신이 특별한 흥미는 없어요. 기존 도시를 고쳐서 낡은 것이 새것을 잉태하는 프로세스를 보는 것이 훨씬 흥미롭죠.

-해냄 사옥은 2층을 털어 천장을 높이 하고 그 안에 ‘집 안의 집’을 넣었습니다. 2층을 통틀은 한쪽 벽을 사다리 달린 거대한 책장으로 채우셨고요. 가장 멋진 부분은 건물 외벽에 두른 목재 루바(louver·채광과 통풍을 요하는 곳에 사용되는 미늘형 형태)의 수평선이, 블라인드를 걷으면 실내의 서가와 그대로 연결되는 대목이었습니다. 창밖에는 도시가, 실내에는 책이 꽂혀 있다고 표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요즘의 출판일은 결국 사람이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업무의 주종이라는 말씀을 건축주에게 들었습니다. 회의를 회의실에서도 할 수 있지만 발코니, 식당, 마당에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한 건물 안에 다양한 세팅을 만들어 이야기의 종류 따라 입맛대로 모일 수 있도록 계획했어요. 대기업의 마호가니 책상에 비싼 의자들이 줄지어 있는 자리에서 멜로드라마 기획을 한다고 상상해보세요. 그게 되겠어요? 또, 사람이 늘 시선을 한 군데에 고정하고 살 수 없으므로 집 안과 집 밖에 뭔가 바라볼 수 있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집 밖의 경치는 활용하고 집 안에는 경치를 창조하려고 했어요. 집 내부에 작은 광장과 계단과 집을 넣는다거나, 외부 계단에 동네의 지형을 불러들이는 식으로요.

-두 출판사는 모두 바닥 난방을 채택하셨습니다. 위생 문제 외에 어떤 장점을 보셨습니까? =저는 사무실이 어떤 의미에선 집 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신발끈 여행사 사옥은 그 생각을 확장한 경우인데, 거의 회사처럼 보이지 않죠. (그가 개축한 창전동 신발끈 여행사는 카페, 프레젠테이션 룸, 간이침실, 샤워실, 쇼윈도 등 아기자기한 공간이 많고 칸막이가 거의 없다.) 현대인은 집보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으면 좋은 집도 중요하지만 일하는 장소가 즐겁고 좋아야 해요. 회사는 근대적인 공장 개념에서 인간적·문화적 공간, 펀 플레이스(fun place)로 변하고 있어요. 대체로 집은 좀 사무실 같으면 재밌고, 사무실은 좀 집 같으면 좋죠.

-광화문의 레스토랑 ‘나무와 벽돌’도 개축하셨습니다. =레스토랑도 몇십 년 되면 하나의 인스티튜션이고 그런 레스토랑이 인테리어를 잘못 바꾸면 망해요. 그러므로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놓아둘지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어요. 시간의 두께와 지층을 다루는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었고 건축적으로 썩 중요한 작업은 아니더라도 매우 흥미로웠어요.

-답사에 동행해주신 김수현 팀장님의 말씀대로 차갑고 날카로운 소재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쓰시는 방안을 고민하신다는 것을 건물들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무는 따뜻하다”면 거짓말이거든요. 나무를 차갑게 쓸 수도 있고, 쇠를 따뜻하게 쓸 수도 있어요. 그래서 티타늄을 좋아해요. 따뜻한 금속이거든요. 과학적으로 바라보는 물성과 주관과 생각을 담아 바라보는 물성이 상당히 다른데, 건축가는 두 가지 다 관심이 있죠. 요즘은 콘크리트처럼 보이는 벽지, 벽돌처럼 보이는 타일 같은 소재가 많이 나왔어요. 꺼림칙하기도 하지만 콘크리트처럼 보일 수 있는 것도 벽지가 가진 물성의 일부거든요. 건축가의 창작 의지와 재료, 재료를 사용하는 방식 사이에는 수많은 긴장관계가 있을 수 있어요. 민감한 건축가들은 그 문제에 나름의 결론을 내리고 작업하겠죠.

열린책들 사옥

-건축을 평하는 온전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구경꾼의 눈으로 볼 때는 아무래도 조형적 요소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걸로 건축가의 스타일을 규정하려는 것이 본능입니다. 소장님의 작품 경우에는 목재 루바가 그리는 수평선, 접는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집의 내부와 바깥이 같은 높이로 연결되는 공간이 자주 보입니다. 그런 요소에 애착하는 까닭이 무엇인가요? =오늘 느끼셨겠지만 제가 블라인드 각도 조절에 집착하죠? 수평선을 많이 쓰는 건 빛의 퀄리티에 관심이 많아서예요. 루바는 지붕의 처마를 잘라 죽 내려놓은, 미분화된 처마라고 봐요. 처마 깊은 한옥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빛의 퀄리티를 제공하죠. 제 발명품은 아니지만 한옥 처마의 기능을 현대건축이 조형적으로 이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 것이죠. 그리고 길에서 바로 진입하는 방식의 설계는, 제 트레이드마크예요. 집이란 길과 어떻게 연결되느냐가 무척 중요해요. 상업공간의 경우 도로와 영업장의 바닥 높이가 1m 이상 나면 장사가 안 돼죠. 또 다른 이유도 있어요. 설계하는 디자이너의 머릿속에는 정상인이라는 개념이 있거든요. 그런데 실상 그 정상인이란 오른손잡이에 한국어를 즉각 해독하는 한국인이고, 사회적 공간에 남자가 많다보니 남자이고, 걷고 뛰고 물건을 집는 데 문제가 없는 사람이에요. 결국 현실에서 개념적 정상인은 거의 없어요. 저 역시 안경을 쓰고 왼손잡이거든요. 적어도 건물 1층까지는 휠체어가 들어왔으면 해요. 아버지가 20여 년 휠체어 신세를 지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내가 설계한 건물에 아버지가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있기도 해요. 그것이 ‘정상인’에게 안 좋냐면 그렇지 않아요. 이런 것을 ‘유니버설 디자인’이라고 부르죠.

사회가 진보를 믿는다면 임대주택을 많이 지어야해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한옥은 가난한 시절의 집, 불편한 집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사고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황두진건축사무소에서 개축한 가회동 한옥 가운데 취죽당의 건축주를 만나보았습니다. 본가는 따로 있고 별장처럼 쓰는 집이라 건축가의 입장에선 맘껏 전통적 양식을 복원하고 예술적 야심을 부릴 수 있었을 거라 하시더군요. 반면 쌍희재의 경우는 직접 거주 용도로 개축하신 걸로 아는데요. 보통 사람의 거주공간으로도 한옥에 관심이 있습니까? =겨울에도 반팔옷을 입는 것이 주거에서 기대하는 편리함이라면 한옥은 당연히 불편한 집이겠죠. 그러나 요즘은 워낙 건축 기술이나 자재가 좋아서 취죽당도 4인 가족이 살려면 살 수 있어요. 건축주는 세컨드 하우스로 용도를 정했다 해도, 집이란 주인도 운명도 변할 수 있으므로 건축가는 어떤 상황에 처해도 먹고살 거리를 집에 줘야 해요. 그래야 세상 속에서 집이 건강하게 자기 구실을 다하니까요.

-건축가로서 한옥에 대해 소장님이 지닌 관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한옥은 개인의 창조물이 아니고 오랜 시간 한 민족이 한반도의 자연지리적·인문지리적 환경에 맞게 만든 집단 창작물이에요. 순수하게 건축적 의미에서는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꽉 짜인 그 견고한 세계가 흥미로워요. 또 우리나라에서 전통문화를 생각한다는 것은 유럽인의 그것과 좀 다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전통을 버리고 싶으면 버릴 수 있지만- 버리는 것은 사실 가장 주인다운 행동이죠 - 단절을 겪은 우리는 애틋함이 강합니다. 한옥은 주택으로서는 개선할 여지도 많은데 역사적 주체성을 빼앗긴 몇십 년 동안 진화가 지체된 것 같아요. 영·정조 시대의 실학자 서유구 선생의 <임원경제지>를 보면 가차없는 한옥 비판이 있어요. 그런데 그 지적이 수용되지 않은 채 우리 세대까지 왔어요. 그러므로 한옥의 진화는 지금이라도 재개될 수 있을 겁니다. 현재 ‘나무와 벽돌’ 재동점에 한옥을 하나 짓고 있는데 지붕에 흙을 안 올리는 건식 기와집을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한옥 작업이 현대건축가로서 정체성을 흐릴 수 있다는 말도 듣지만, 한옥 실물을 다뤄보지 않고 전통 건축의 가치를 논할 염치가 없어요.

-우리 사회에서 주택이 반드시 소유해야 할 재산이 되고, 게다가 소유하기까지 많은 돈과 시간이 걸리는 일생일대의 과제 비슷하게 되면서, 오히려 젊은이들이 자기가 살 집에 대해 구체적인 꿈이나 철학을 갖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둔감함은 공공 영역의 비주거용 건물로도 확장될 것이고, 결국은 건축가의 무력감을 북돋우는 요소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사회가 진보를 믿고 한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진취적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임대주택을 많이 지어야 해요. 그런데 현재 우리는 주택은 꼭 소유해야 한다고 보거나, 전세제도에 의존하며 월세 사는 사람을 마치 사회에 뿌리 못 박은 부평초로 취급하는 문화를 만들어왔거든요.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독립의 하드웨어를 얻기 위해서 부모의 경제권 속으로 더 깊숙이 편입되는 일을 여러 세대가 반복해온 셈입니다. 나라도 개인도 경제적인 독립이 없으면 사고의 독립은 힘들어요. 그러므로 사회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양질의 임대주택을 싸게 공급해야 해요. 또 건축가가 그런 공공 임대주택 설계에 개입하면서 시민과 가까워질 수 있고요. 젊은 부부들이 승효상 선생님처럼 훌륭한 건축가나 하다못해 저 같은 사람이 설계한 집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거죠. 공공자본 운용만 잘되면 사실 우리나라는 지금 이 정도의 국가적 부로도 모두 훨씬, 폼나게 근사하게 살 수 있어요.

-아파트 CF들이 언젠가부터 불편합니다. CF가 해당 건설회사 아파트의 구체적 실상과 차별점에 대해서 아무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서양의 궁전과 성채, 펜트하우스를 따온 획일화된 이미지만 주입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문제도 있지만 실은 여성단체나 소비자단체에서 심각하게 딴죽을 걸어야 할 문제예요. 여성 모델을 보여주며 “주부의 마음까지 고려했다”고 내세우는, 주방을 여자의 공간으로 전제하는 광고가 세계 최고 교육 수준을 가졌다는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어떻게 먹히는지 모르겠어요. 친구를 초대해서 김치냉장고로 기를 죽였다. 이런 것도 사실 성희롱이에요. 여자를 대체 어떤 존재로 여기는 겁니까? 마치 남자들이 목욕탕에 친구랑 가서 물건 크기로 기를 죽였다는 것과 같죠. 사실 우리 아파트의 문제는 건축적 문제가 아니라 아파트가 상정하는 가치관이에요. 아파트가 서면 있던 골목도 돌아가야 하니 도시 입장에서는 뭐가 좋아지냐고 일단 반문할 수 있죠. 또 우리의 아파트는 15평이건 65평이건 문 안에 필요한 것이 다 있어야 하고, 공유하는 공간은 없어서 인간의 사회적 관점을 가족 이상으로 확대시킬 수 없게 하는 공간이에요. 그리고 평수가 늘면 문이나 부엌도 두 개 만들어 두 세대가 섞여 살 수도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당신 생활양식이나 구성원이 변하면 이사가라”는 투의 설계예요. 그 모든 것이 파편화된 개인, 생각없이 사는 사람을 만들어내요.

아파트 앞동에 스크린을 걸고 영화를 보면 어떨까요?

-영화 속에 자신이 설계한 건물이 나온 경험을 회고하시며 건축가의 저작권에 대한 단상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다른 예술처럼 건축의 창작자가 대중적으로 인지되면 문화적으로 어떤 장점을 예상할 수 있을까요? =영화 속 배경에 등장한 건물을 누가 설계했는지를 밝힐 어떤 법적 의무가 있다거나 하는 입장은 아니에요. 다만, 우리나라와 문화 선진국의 차이 중 하나가 서로를 엮어주는 풍토의 유무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백남준씨가 계속 한국에서 작업했다면, 뛰어난 개인임에는 변함이 없었겠지만 그를 인정하고 자기 작업 속에 동참시키려고 한 존 케이지나 요제프 보이스 같은 플럭서스 멤버는 없었겠죠. 그랬다면 과연 오늘날의 백남준씨가 존재했을까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문화, 예술은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고, 저 역시 많이 도우려고 해요. 딱히 띄워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문화예술가로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밝히는 차원이죠. 예컨대 영화를 모르면서 <프레시안>에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도 그것을 통해 저는 좀더 영화를 알고 제 글을 통해 가려졌던 영화의 측면이 드러나는 것이 좋아서입니다. 전번에는 <킹콩> 2편의 킹콩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아닌 월드 트레이드센터에 올라간 것이 패착이라는 요지의 글을 썼어요. 도시 공격자들은 도시의 상징물을 표적으로 정확히 선택하는 안목이 있어야 영화가 살거든요. (웃음) 서울의 경우 그건 남산타워가 아니라 한강이라고 생각해왔기에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 관심이 많습니다. 봉 감독님은 워낙 도시에 대한 시선이 있는 분이라 건축가들이 재미있어하는 분 중 하나예요.

-영화 말이 나온 김에 우리나라 극장 건축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십니까? 캘리포니아 스타일의 원색과 네온이 지배하는 멀티플렉스, 오래된 극장을 개축한 번쩍이는 상자형 건물이 대세를 이루게 됐는데요. =극장이 건축공간으로서 흥미로운 점은, 어둠이 주는 은밀함과 많은 사람이 고밀도로 모인 광장의 성격이 분리 안 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공공장소이면서도 시선을 압도하는 스크린 위 영상으로 인해 상당히 사적인 마이크로 스페이스가 만들어지죠. 수많은 연인들이 처음 손잡는 곳이 극장이고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보면 극장 안에서 성행위도 이뤄지는 것으로 나오잖아요. 제가 구상하는 것은 극장 설계보다 극장과 생활공간을 결합시킨 형식이에요. 우리나라 아파트단지가 획일적으로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있잖아요? 그 배치를 이용해 앞동의 벽에 영사막을 걸고 뒷동 발코니에서 영화를 보는 거예요. 음향은 전파관리국과 협의해 지역 FM으로 송신해 각 집의 오디오에서 듣고요. “과천 아파트 8단지 803동에서 오늘 영화 봅니다” 하면 그 뒷동 지인의 집 발코니에 가서 밥을 먹으며 영화를 보는 거죠. 영화 <시네마천국>을 보면 영사하다 말고 동네 광장 벽에 비추잖아요? 가끔 저도 프로젝터를 우리 마당에 비춰보는데 그러면 마당이 갑자기 공공의 영역이 되는 것 같은 매력이 있어요.

-유럽 여행을 처음 다녀와서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서울의 여성들이 어느 도시의 여자들보다 세련되고 예쁘게 옷을 차려입는데, 수수한 파리 여성들보다 들인 수고만큼 예뻐 보이지 않았거든요. 곰곰 생각해보니 거리가 아름답지 않아서였어요. 아무리 혼자 잘 차려입은들 사람은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으니 도시가 아름답지 않으면 개인이 아름다워지는 것도 힘든 일이다 싶었어요. =개성이 부족하지 않은 한국인들이 덜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는 낯선 사람한테 상냥하지 않은 데서 오는 매력의 반감 때문인 것 같아요. 이것도 가족주의와 관련있는데 가까운 이들에겐 친절하면서 길을 가다 만나는 사람에겐 뜨악한 거죠. 기본적으로 좋은 도시는 이방인에게 친절하고 공평한 도시라고 보는데 그것이 사람들의 미학적인 측면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봐요.

-2002년 11월부터 사무실이자 자택인 목련원 거실에서 정해진 주제를 강의하고 토론하는 영추포럼을 열고 계십니다. 일종의 살롱 문화를 구상하시는 건가요? =일종의 지적 호기심이 있습니다. 언제 어떤 것이 내 삶에 개입해 도둑처럼 찾아와서 혼을 빼앗아갈지 모르고 그런 가능성을 열어놓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낯설고 흥미로운 것이 어느 순간 다가올 때 중무장하고 있으면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니까요. 알게 모르게 서울에도 그런 식의 포럼이 많은데 영추포럼이 특이한 점은 초대장 없이 완전히 열린 모임이고 저희 집 거실을 개방했다는 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하는 데 어떤 자격이 필요하냐?”고 물으실 때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끊임없이 안과 밖을 구별하는 사회를 만들어왔는지 깨닫습니다. 살롱 문화와 함께 또 다른 레퍼런스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사랑방 문화예요. 두 문화의 공통점은 주거공간을 매개로 한 사회문화적 활동이란 거죠. 사실 주거공간은 사회의 공간적 자원 중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거든요. 특히 통의동은 중인들이 서로의 집을 오가며 문학을 했던 여항문학의 본거지라 영추포럼이 지리적으로도 말이 되는 것 같아요. (웃음) 기쁜 일은 영추포럼 이후 제 주변에 자택에서 포럼을 시작하신 분들이 생겼다는 거예요. 경쟁자가 생겨서 영추포럼 흥행력을 높여야 하는데. (웃음)

-현재 서울의 도시환경을 말하면서 이명박 시장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각에서는 “심 시티를 하는 건가?”라는 농담이 돌 만큼, 동상 제막식 하듯이 도시 곳곳을 저돌적으로 고쳐서 선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청계천도 사람을 초대한다는 느낌보다, 거기 복원돼 있다는 사실 자체로 자족하는 느낌이 강해서 실망했습니다. 이명박 시장의 정치적 경쟁자들이나 후임 시장 도전자들도 랜드마크 만들기 경쟁을 할까봐 불안하기도 합니다. =‘러브 하우스’의 도시판? (웃음) 도시 환경, 도시 디자인이 누가 정권을 잡든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게 된 건 사회의 성장을 뜻하지만 그것이 기껏해야 몇몇 랜드마크의 건설로 귀결되는 건 여전히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이에요. 바람직한 도시 만들기는 좋은 영화 만들기와 비슷할 거예요. 청계천은 도시적 특수효과의 전시장 같은 곳이죠. 예를 들어 “광주를 문화도시로 만듭시다”라는 데는 세 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째, 광주에 문화시설을 짓는다. 둘째, 광주에 문화산업을 유치한다. 셋째, 문화시설도 산업도 없지만 광주에서 사는 것 자체가 상당히 문화적이다. 정치가나 정부가 생각하는 문화 개념은 시설이나 산업에 치우쳐 있어요. 문화시설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반문화적인 문화시설도 있어요. 귀빈 계단이 따로 있는 세종문화회관이 그 예죠. 다시 말해 도시의 논리, 건축의 논리가 정치논리를 뛰어넘고 문화계가 결정한 걸 정치계가 해결해야지 그 역순은 아니라는 거죠.

-연역식이 아닌 귀납식의 도시 문화, 건축 문화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책이 나오고 나서 이런저런 서울 이야기를 소장님께 들려주는 분들이 많다고요. =책 제목은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지만 제가 전주에 살았으면 당신의 전주가 어디냐고 물었겠죠. 사실 행간을 읽어보면 그 책의 제목은 ‘당신의 동네는 어디입니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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