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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코닥 단편영화 제작지원작 발표 [3]
사진 오계옥이영진 2006-03-14

인생의 끝을 준비하는 노인들과의 동행

강원석 감독의 <준비된 인생>

강원석(30) 감독은 태어나서 28살 때까지 할머니와 같은 방을 썼다. 작고한 할머니를 “평생의 룸메이트”라고 부르는 그는 “<준비된 인생> 또한 할머니가 하늘에서 내려주신 선물”이라고 여긴다. 2004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동행> 역시 할머니에 대한 그의 애정이 물씬 묻어나는 16mm 단편. 숨이 다한 할머니를 돌보다 죽음의 길도 함께하는 손자의 이야기다. 그러나 <동행>은 할머니에 대한 애정 고백인 동시에 그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대학 시절 만들었던 단편영화들은 어떻게 하면 상상력을 부릴까 고민한 것들이었다. 몇번 상을 받긴 했지만, 현실에서 공감을 얻는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가 뭘까 방황하던 차에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이후 <동행>과 같은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대진대학교 영화학과 출신인 그가 <외출> <클래식> 등 충무로 연출부 경험을 쌓으면서 만든 <그녀를 위한 다큐멘터리> <Feel. Ring> 등의 장·단편영화들은 상상을 접고 현실과 접선하면서 내놓은 결과물이다. 그는 <준비된 인생>은 <동행>보다 한 걸음 물러서서 관조하되, “구석진 곳의 소외받는 이들을 그린다기보다 삶과 죽음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준비된 인생>은 어떻게 떠올리게 됐나. =노인들은 빨리 죽어야지를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그걸 우린 대개 거짓말이라고 받아들이고. 그런데 어느 날 그게 진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그들이 수동적으로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란다고 생각하겠지만 한편으론 죽음이 삶의 한 부분임을 체득한 이들만이 취할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싶었다.

-할머니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동행> 이전의 영화들을 할머니께 보여드렸는지 궁금하다. =보시더니 이게 뭐냐, 고 하시더라. 내 영화는 액션은 아니니까. 할머니는 하루에도 비디오 두세편은 해치우시는 액션 영화광이셨다. 특히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즐겨 보셨다. 밤마다 볼륨 줄여놓고 보시는데, 자막이 얼마 없어서 보시기 편하셨을 것이다. 보시고 나선 내게 언제나 줄거리를 요약해서 들려주시곤 했다.

-<준비된 인생>에도 할머니와의 구체적인 기억이 담겨져 있나. =언젠가 할머니가 노인정에 가셨다가 수의를 사가지고 오신 적이 있다. 자신의 죽음을 손수 준비하겠다는 뜻이셨을 텐데, 그 사실을 안 부모님이 수의를 되돌려주고 환불받으신 적이 있다. 그 에피소드를 빌려왔다.

-시나리오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노인정 장면이다. 결과적으로 수의를 팔려는 젊은 장사치들에게 노인들이 사기당하는 것 아닌가. =젊은 장사치들에게 사기당하는 것이지만, 그런 상황마저도 노인들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즐기려고 한다. 맘껏 노는 잔치처럼 그릴 거다. 노인정은 늙어 곧 죽을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고 여겼던 김 할머니도 결국 그 잔치를 받아들이고 수긍한다. 노인정을 노인들만의 에너지로 충만한 공간으로 그려내는 게 관건이다.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갖고 있음이 보여졌으면 좋겠다.

-캐스팅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외출> 연출부 하면서 뵀던 몇분이 있다. 최대한 대사를 줄이고, 얼굴의 주름이나 눈빛 그리고 손떨림만으로도 인물의 심리가 전달될 수 있도록 연출하려고 한다. 현재 시나리오는 좀 평면적이고 전형적이다. 디테일을 좀더 보강해야 한다. 할머니의 시간과 젊은이들의 시간, 그리고 세상의 시간을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죽음이 일상이 된 이들의 하루를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고민이 많다.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김 할머니의 슬프지만 힘찬 발걸음 소리가 도드라져야 할 텐데.

시놉시스

백발이 성성한 여든살 김여운 할머니는 오늘도 바람에 살랑이는 버드나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여느 때처럼 오씨 할머니는 노인정에 가자고 꼬드기지만, 김 할머니는 “할 일 없는 노인네들이 모인 곳에 뭐하러 가냐”고 손사래를 친다. 김 할머니의 유일한 즐거움은 버드나무 아래서 고물상을 하는 열살 아래 최 노인을 기다렸다가 모아둔 빈 병을 전하는 일. 최 노인을 짝사랑하는 김 할머니의 유일한 애정 표현이다. 아들과 며느리가 팔순잔치 때문에 말다툼을 벌이던 날, 김 할머니는 병원을 찾았다가 왼손 떨림 증상이 어찌할 수 없는 노환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이튿날, 김 할머니는 최 노인을 기다리다 못해 그의 집까지 찾아가지만, 최 노인 대신 노란 근조등이 김 할머니를 맞는다. 결국 노인정을 찾게 된 김 할머니는 젊은 장사치들이 파는 수의를 구입하게 되고, 몇 십만원 하는 수의 값 마련을 위해 빈 병을 주우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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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