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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쉬>로 오스카 작품상 수상한 폴 해기스 감독
김도훈 2006-04-07

<크래쉬>는 올해 오스카의 가장 커다란 이변이었다. 리안이 감독상을 수상하러 연단에 오르는 순간, 사람들은 <브로크백 마운틴>이 당연히 작품상을 가져가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 해기스의 호기있는 데뷔작에 주목했던 미국 내 비평가들은 <크래쉬>의 수상을 그리 이변이라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다. 인종적 균열을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어놓는 휘발성 문제로 인식하는 미국인에게 온갖 인종과 계급과 마음이 충돌하는 <크래쉬>는 지금 가장 고통스러운 미국의 초상이었을 테니 말이다.

폴 해기스는 이미 1988년에 미니시리즈 <30대>(Thirtysomething)로 두개의 에미상을 거머쥔 TV계의 귀재였다. 그가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오던 TV를 떠난 것은 지난 2004년. 권투 매니저가 쓴 단편소설 하나를 장편으로 개작하겠다는 우직한 꿈 때문이었다. 캐스팅이 완료되고도 영화화가 지연되자 해기스는 각본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보냈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그렇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TV는 꽤 성실하던 각본가 한명을 잃었고, 영화계는 유능한 각본가를 새로 하나 얻은 것이다. 그리고 <크래쉬>로 할리우드는 미래를 흥미진진하게 점쳐볼 수 있는 새로운 감독 한명을 손에 넣었다.

<크래쉬>의 오스카 수상 이후 그는 끔찍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금 해기스는 자신이 각본을 쓴 이스트우드의 <우리 아버지들의 깃발들>과 제임스 본드 영화 <카지노 로얄>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스트우드의 신작 <죽음과 불명예>(Death and Dishonour)와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을 위한 각본을 쓰는 동시에 두 번째 연출작인 <해리와의 허니문>(Honeymoon with Harry)을 준비 중이다. 이러니 “죄송합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가 않네요. 지금까지의 대답이 충분하기만을 바랍니다(큰 웃음과 함께 폴)”라는 글과 함께 돌아온 짧은 서면 인터뷰에 불평할 여지가 없다. 마지막 이스트우드에 관한 답변들은 외지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오스카 시상식에서의 당신은 기대하지 않았던 <크래쉬>의 작품상 수상에 꽤나 감격해하는 모습이었다. 수상의 후풍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고 있는가. =제작진 모두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다. 사실 시상식이 열리기 몇주 전에 내가 만난 사람들은 <크래쉬>가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지인들이 퍼뜨리기 시작한 바보 같은 허풍이라고 들었을 뿐이다. 막상 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크래쉬>의 각본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당신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이같은 이야기를 창조하는 데 화약 노릇을 했나. =LA에서 30여년을 살면서 이 아름다운 도시에 팽배한 문제점과 불공정한 사례들을 계속해서 봐왔다. 몇년 전에는 강도에게 자동차를 강탈당하기도 하고, 잘못한 일이 없음에도 백인 프로듀서에게 굴욕을 당하는 흑인 감독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맷 딜런의 캐릭터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후) 내가 받았던 증오로 가득 찬 편지를 토대로 만든 것이기도 하다. 각본을 쓰면서 가장 신경을 많이 쓴 것은 우리가 머물고 있는 국가와 세계가 점점 공포와 불관용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당신은 그동안 할리우드영화에서 인종문제에 대한 발언들이 어느 정도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가. =글쎄. 그저 국제적으로 ‘투자할 만한’(bankable) 스타들을 보라. 몇몇 예외가 있겠지만 그들은 대부분 백인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 한 문장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크래쉬>에는 관객을, 특히 미국 관객을 불편하게 할 만한 장면들이 많다. 특히 당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테렌스 하워드가 연기한 TV 감독이 백인 프로듀서로부터 굴욕당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이같은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가. =가끔 일어나지만 누구도 그것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TV 감독들이 백인 남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 감독과 흑인, 중남미, 아시아인 감독들도 차츰 생겨나고 있기는 하다.

-각양각색의 인종적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한 각본을 쓰면서 세부적인 인종적 디테일을 표현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나. =나는 매일 공동각본가인 보비 모레스코에게 말했다. 도대체 우리가 무슨 빌어먹을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우리는 두명의 백인 남자들이잖아. 우리가 이런 대사들을 영화 속에 담을 권리가 있는 걸까. 우리는 정말 살해당하고 말 거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흑인 커뮤니티는 <크래쉬>를 정말 따스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내가 가장 걱정한 백인 자유주의자 커뮤니티는 언제나 똑같은 말만 한다. ‘우리는 이런 문제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난센스들은 다 해결했다고요. 대체 이런 문제를 왜 다시 꺼내드는 겁니까.’ 하지만 내가 더욱 신경을 썼던 것은 흑인 커뮤니티의 반응이었다.

-이 영화는 미국의 계급적인 인종주의에 대해 강렬하고 솔직한 발언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영화의 제작비를 지원받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가. =매우, 매우 힘들었다. 각본을 본 모든 제작사들이 투자를 거절했으며, 심지어 모든 인디영화 투자자들마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크래쉬>의 제작자인 밥 야리와 캐시 슐만은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는 반응을 보인 유일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투자한 적은 예산으로 겨우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캐스팅 문제도 마찬가지로 쉽지 않았을 듯하다. 일단 돈 치들(<호텔 르완다> <오션스 일레븐>)이 출연을 결정하자 다른 배우들이 우르르 따라서 가담했다는 뒷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미국의 인종문제를 다루는 영화에 할리우드 A급 스타들이 등장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다. =물론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국제마켓에서 영화를 사전판매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통할 수 있는 유명배우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국제적인 스타들은 모조리 백인이고, <크래쉬>에는 정말 소수의 백인 스타들만이 출연하지 않나. 결국 모든 배역이 다 찰 때까지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참여한 배우들은 엄청난 출연료를 제시하는 메이저영화들도 미루어두고 촬영에 매우 열정적으로 임했다.

-캐스팅한 배우들 중에서 가장 뜻밖의 결과를 창출한 배우가 있는가 =내 생각에 그건 크리스(자동차 강도를 연기한 래퍼 ‘루다크리스’)가 아닌가 싶다. 그는 영화를 촬영하는 순간부터 인기 래퍼가 아니라 배우이고 싶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항상 제시간에 촬영장에 오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능력의 110%를 보여주었다.

-할리우드영화에서 백인 배우와 흑인 배우의 성적인 관계를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종의 불문율이다. 물론 돈 치들의 연인으로 분하는 제니퍼 에스포시토가 라틴계 여배우이긴 하지만, 흑과 백의 침실 묘사를 처음 보는 한국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내 영화를 볼 필요가 있다(답변에는 ‘크고 익살맞은 웃음과 함께’라고 쓰여 있었다- 편집자). 이 영화는 편견과 관용에 대한 거다. 나는 이 영화가 한국 관객도 놀라게 만들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 관객도 자신의 신념에 관한 많은 질문들을 안고 극장 문을 나서기 바란다.

-당신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일해왔지만 그는 공화당원이다. 당신과 정치적인 성향이 완전히 다른 그와 어떤 공통점을 느끼며 작업하는가. =클린트에 대한 멋진 사실 하나는, 당신은 그가 무언가에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결코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얼마 전, 우리가 세 번째로 만들게 될 영화 <죽음과 불명예>의 각본을 완성해서 보냈다. 이것은 이라크전에 대한 매우 무거운 이야기다. 나는 그가 전화해서 “너 공산주의자 이 자식. 도대체 나를 왜 이런 일에 끌어들이는 거야”라고 소리지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전화해서 나에게 말했다. “와우, 이건 정말 어려운 작업이 되겠는걸. 정말 힘에 부치는 이야기야.” 내가 “하지만 이건 진짜라고요”라고 말하자 그가 대답했다. “좋아. 우리는 이 영화를 꼭 해야만 할 것 같군.” 나는 정말로 그를 존경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스트우드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미국 내 기독교 우파를 화나게 만들었고, <크래쉬>는 발언하기 까다로운 인종문제를 다룬다. 계속 이렇게 정치적으로 휘발성의 주제들을 건드리는 이유는 뭔가. =만약 내가 어떤 이야기를 쓰면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금방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 거다. 스스로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 쓰는 것이 좋다. 그래서 그것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파고들어서 찾아내기를 원한다. 영화감독은 누군가에게 해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좋은 영화감독은 관객이 극장을 떠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만든다.

-각본가에서 감독으로 데뷔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나. =각본을 쓰는 것보다 감독을 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 감독 자리에 앉아 있으면 단지 165여명의 사람들이 내가 뭘 바라는지 캐내기 위해 나를 쳐다본다. 각본을 쓸 때면 깜빡거리는 커서가 끊임없이 난를 쳐다본다. 후자가 훨씬 힘들다. 물론 나는 감독들에 대해서 엄청난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각본을 쓰는 것과 비교해본다면(웃음), 나는 감독 일이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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