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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군 투덜양] 자존심은 스포츠에만 있나봐, <스윙걸즈>

투덜군, WBC와 <스윙걸즈>를 보며 문화적 따라행위에 대한 관대함을 한탄하다

요즘 <7일간의 사랑>이라는 영화 제목이 자꾸 떠오른다. 전교생이 한날한시에 같은 극장으로 몰려가 일제히 같은 영화를 관람하는 장관을 연출했던 ‘영화 단체관람’이라는 제도를 통해 관람했던 관계로다, 거의 기억조차 안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이 말이다. 물론 약간 변형은 됐다. <17일간의 사랑>. 그렇다. 비록 사랑은 떠났다 해도, 우리는 아름다운 팀을 사랑했던 나날의 기억들로 언제까지나 마음속을 훈훈하게 덥힐 수 있는 것이다. 아… 여튼 각설하고.

필자, 이번 세계야구클래식(WBC)이라는 시류에 편승하여 드릴 말씀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꽤 재미있는 일본영화 <스윙걸즈>와 관련된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스윙걸즈>(2004)에는 ‘멧돼지 습격신’이라 불리는 장면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본의 아니게 당 영화를 국내에 개봉도 되기 전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왜인가. 이 또한 다들 잘 알다시피, <웰컴 투 동막골>(2005)의 ‘멧돼지 습격신’과 대단히 흡사했기 때문이다.

<스윙 걸즈>

물론 단순히 멧돼지가 등장한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갑작스러운 멧돼지 습격과 일제히 경악하는 사람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오는 멧돼지의 최후 등등의 습격 과정을 보여줬던 방법, 즉 특수한 촬영(<스윙걸즈>는 플로 모션, <웰컴 투…>는 고속촬영과 CG)과 특수한 사운드 처리(음악 외의 모든 소리를 빼버림)를 통해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만들어낸 그 방법은, 단순히 흡사하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만일 누군가가 이에 대해 <방과후 옥상> 주최쪽이 <세시의 결투>에 대해 읊조리는 것마냥 ‘우연의 일치였어요’라는 멘트로 일관한다면 그것은 버럭 화를 낼 일만은 아니다. 만약 그게 우연의 일치라면 콩나물국에 콩나물이 들어가 있는 것도 우연의 일치다.

어쨌든 이번 WBC를 통해서 확실히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승부와 자존심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는 것 말이다. 이치로를 위시한 일본팀이 막판에 우리팀을 이겼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본팀은 대회 내내 자신들의 시건방짐을 지키기 위한 결과에만 연연했기에 스스로의 자존심을 꺾었다. 반면 우리팀은 경기 자체를 웃고 즐기는 여유를 잃지 않았고, 덕분에 그 자존심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심히 안타깝게도, 이런 자존심은 오로지 스포츠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듯하다. 우리는 TV에서, 음악에서, 영화에서 그리고 문화판 곳곳에서 스스로의 자존심을 꺾는 일에 너무나도 익숙하고, 또 관대하다. 누가 봐도 명명백백한 따라 행위를 창조적 재현, 적극적 인용, 효과적 변형이랍시며 대충 어물쩍 넘어가주는 일, 이젠 정말이지 쪽팔려할 때가 돼도 한참 됐다. 이치로의 주둥이도 꺾지 못한 자존심이 일본산 멧돼지 한 마리에게 받히는 이런 일이 계속돼서야, 어디 되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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