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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2001-08-21

■ STORY 전직 보험수사관 레너드(가이 피어스)는 아내가 강간살해된 충격으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아내의 죽음 이전은 기억하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15분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 복수에 나선 레너드는 단서를 문신으로 새기고 폴라로이드카메라를 들고다니며 잃어버린 기억력을 대체한다. 부패경찰 테디(조 판톨리아노)와 의문의 여인 나탈리(캐리 앤 모스)가 그의 조력자로 등장하지만,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순 없다. 레너드는 범인이 테디임을 확신하고 죽이지만 과연 그럴까.

■ Review

<미이라2>를 관람한 직후에 <메멘토>를 본다면, 아마 30분도 채 안 돼서 극장을 나가버리고 싶을 것이다. 두뇌의 휴식을 원한다면 이런 영화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머리 쓰는 수고는 덜어드릴게요, 오직 다음 장면만 기다리세요, 라는 할리우드식 관객접대 수칙을 <메멘토>는 깡그리 무시한다. 오히려, 앞장면을 모두 기억하세요, 못하겠다면 포기하세요, 라고 거만을 떤다. ‘메멘토’는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다. 미국 독립영화계의 새로운 재능 크리스토퍼 놀란의 데뷔작 <메멘토>는 관객의 기억력을 가혹하게 테스트하는 짓궂고 영리한 영화다.

정작 주인공 레너드는 기억력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아내가 강간살해된 뒤로 15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손실증 환자가 된 것이다. 이런 사람이 <미이라2>를 관람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겠지만, 사립탐정처럼 범인을 찾아내 복수를 하려드니 문제가 보통이 아니다. 그의 결함은 치명적이다. 전화를 해도 15분이 지나면 자신이 누구와 통화하고 있는지 잊어버린다. 같이 잠자리에 든 여인도 15분이 지나면 기억하지 못하니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건 애초부터 글렀다.

<말타의 매>의 험프리 보가트처럼 명민하고 냉정하지 않으면 복수는커녕 살아남기도 어렵다.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범죄세계를 사립탐정의 기지로 돌파해야 하는 기억손실증 환자의 곤경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예컨대 그는 이런 상황을 맞는다. ‘내가 왜 뛰고 있지? 저기 건너편 친구를 내가 쫓고 있나? (총알이 날아오고) 아니 이런, 내가 쫓기고 있군!’ 일상생활을 꾸리기도 어려운 이 사내가 범인에 대한 최소한의 단서만 가지고 음습한 뒷골목을 헤치며 복수에 성공할 수 있을까.

<메멘토>는 주인공의 곤경을 대단히 교활한 방식으로 관객의 곤경으로 전이시킨다. 시간의 역순으로 사건을 배치하는 것이다. 레너드가 범인으로 보이는 누군가를 죽이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연다. 우리의 주인공은 벌써 성공한 것인가. 하지만 레너드는 그걸 확신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아직 어떤 정보도 제공받지 않은 우리도 당연히 알 수 없다. 이 지점에서 관객의 처지는 기억손실증 환자와 다를 바 없다. <메멘토>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정보를 흘린다. 먼저 <박하사탕>처럼 시간을 거스르며 사건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시간순서상으로 맨 앞에 놓일 레너드와 테디의 긴 통화를 삽입하는데, 기억손실증 이전의 레너드는 여기서 설명된다.

영화의 구성을 알아차리는 것만 해도 빨라야 20, 30분은 소요되지만, 그때부터 정신을 차려도 관객이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무엇보다 <메멘토>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버리고 레너드의 1인칭 시점으로 일관한다. 카메라는 좀처럼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가 기억력 대용으로 발견한 전신문신과 폴라로이드사진에 의존해 사건을 쫓아가야 한다. 레너드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기억은 믿을 수 없어. 내가 믿는 건 기록뿐이야.” 유감스럽게도 영화가 거의 끝날 때까지도 우리는 환자인 레너드보다 더 많이 알기 힘든 것이다.

스릴러의 결말을 미리 알리는 건 관객에게도 영화사에게도 욕먹을 일이지만, <메멘토>는 예외가 될 만하다. 내용을 미리 알고 봐도 <메멘토>의 퍼즐은 완벽하게 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정보 없이 처음 보고 100% 풀었다면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면 레너드의 감춰진 모습이 드러난다. 불행하고 미욱한 이 사내는 실은 그를 이용하려 한 모든 주변 사람들을 제압할 만한 생존 본능의 소유자다. 이 시점이 돼서야 우리는 그가 설사 복수를 했어도 이를 기억할 수 없다는, 아주 근본적인 난점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걸 알고 있는 레너드가 관객을 우롱했다는 사실까지.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메멘토>는 심오한 해석이 요구되는 난해한 예술영화가 아니다. 복잡한 퍼즐일 뿐이다. 두뇌게임을 싫어하지 않는 관객에게 <메멘토>는 올해 최고의 오락영화가 될 자질이 있다. 창의적이고 정교한 구성에다 가이 피어스의 자로 잰 듯한 연기와 불안과 강박증을 실은 카메라워크도 일품이다. 제작비 500만달러에 미국에서만 7월까지 2400만달러의 극장수익을 이미 올렸고, IMDB의 네티즌 평점은 10점 만점에 8.9라는 놀라운 성적을 기록했다. 늘 작가주의 편에 서진 않지만, 멍청한 대작도 싫어하는 네티즌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는 총명한 대중영화가 <메멘토>다.

이 지적인 오락엔 남다른 여운이 있다. 관객을 엿먹인 레너드는 신종 반영웅이다. 고전기 필름누아르의 낭만주의적 배음(背音)을 말끔히 걷어낸 냉혈한 영웅은 <유주얼 서스펙트>에도 등장했지만, <메멘토>는 좀더 차갑고 염세적이다. 레너드는 이전의 필름누아르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치명적인 결함과 이상심리의 소유자다. 그의 결핍과 혼돈에는 실재계의 권위가 사라지고, 자아의 절대성마저 붕괴된 오늘의 정신적 기후가 스며 있다. 육체적 현존 외에 레너드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의 자아는 오직 아내에 관계된 어둡고 아픈, 아스라한 기억만으로 구성돼 있다. 그마저 복수심으로 오염되고 말았다. 지상에서 기억할 것은 이제 사라진 것이다. <메멘토>의 원작 제목은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다. <메멘토>는 <세븐> 이래 필름누아르의 가장 창의적인 변주다.

허문영 기자 moon8@hani.co.kr

▶ 메멘토

▶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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