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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치포인트>와 우디 앨런의 세계 [1]
오정연 2006-04-12

매치 포인트는 탁구나 테니스 등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한점을 의미하는 스포츠 용어다. 일반적으로 매치 포인트 상황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실력보다는 운이다. 이러한 진리는 한 사람의 인생, 개인이 모여 이루어진 우주에 대입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우디 앨런은 그처럼 허무하고 두려운 세상의 비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40년간 그는, 심각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재담꾼 같았다. 그는 능청스럽고 피학적인 농담 속에 자신의 진심을 담아왔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의 현란한 화술에 먼저 매료됐다. 오는 4월13일 개봉을 앞둔 <매치포인트>는 <애니 홀>(혹은 <범죄와 비행> 혹은 <젤리그>… 이곳에 들어갈 영화의 제목은 아무래도 좋다) 이후 우디 앨런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에 없이 근엄한 표정으로 귀환한 냉소주의자는 더이상 말장난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웃음기와 함께 자신의 영화에 등장하던 그 숱한 인장들까지 지워버린 듯 보이는 우디 앨런. 그러나 그것은 변화이자 심화이고, 한결같은 변주의 일환이다. 문득 새롭게 다가오는 지인의 면모를 찬찬히 살피듯, 그의 전작들과 다르고 또 같은 영화 <매치포인트>에 나타난 우디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본다.

우디 앨런씨가 돌아왔다. 스캔들과 소송으로 얼룩진 1990년대를 경유하면서 범작을 재생산하는 그를 향해, 팬과 평단은 매너리즘 판결을 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드림웍스의 도움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평소 꺼려왔던 칸, 베니스처럼 북적대는 영화제에 얼굴을 비추는 그가, 영화에서마저 냉소와 자학을 거두고 화해와 긍정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랬던 우디 앨런이, 자신의 건재를 확인시켜주는 영화 <매치포인트>를 들고 지난해 칸영화제 비경쟁 부문을 찾았다. 그것은 짐짓 의미심장한 귀환이었다. <매치포인트>는 특유의 고전적인 타이틀 자막이 지나가고 나면, 적어도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는 이것이 우디 앨런의 것임을 인지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영화다. ‘내추럴 본 뉴요커’ 앨런이, 영국 런던에서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한 이 영화는 전혀 코믹하지 않고, 심지어 전에 없이 격렬하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우디 앨런식 캐릭터는 찾아볼 수 없다.

그간 우디 앨런의 그 어떤 인물보다도 모호하고 단호한 크리스(조너선 리스 메이어스)는 실력의 한계를 깨닫고 런던의 테니스 강사로 취직한 전직 테니스 프로선수다. 상류층의 톰(매튜 구드)과 친구가 된 그는 오페라와 도스토예프스키 등 꾸준히 연마한 고급 취향 덕분에 톰의 여동생인 클로에(에밀리 모티머)를 비롯한 그 가족들의 신임을 얻는다. 자신에게 빠져버린 클로에의 부탁으로 그녀의 아버지 ‘회사 중 하나’에서 일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은 크리스의 앞날은 그야말로 탄탄대로. 처남이 될 톰의 약혼녀인 노라(스칼렛 요한슨)와 사랑에 빠지는 식의, 명백한 자멸의 길로 뛰어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오기만 남은 미국 출신 배우지망생 노라와 은근히 무시당하기 일쑤인 아이리시 크리스는 서로의 비슷한 처지를 알아보고, 빠져들기 시작한다. 클로에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한 채로, 크리스는 부유한 삶을 향한 탐욕과 관능적인 사랑을 좇는 욕망 모두를 포기하지 못한다.

뉴욕에서 런던으로, 농담 대신 긴장감과 서스펜스

뉴욕에서 런던으로, 70줄에 접어든 우디 앨런이 자신만의 ‘신세계’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사유를 전개하려는 것일까. 정작 직관에 의존하여 영화를 만들어왔던 앨런 자신은 변화처럼 보이는 일련의 선택이 지극히 실용적이거나, 혹은 우연적인 이유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미국의 스튜디오 간부들은 캐스팅과 시나리오에 관여하고 매일매일 촬영분을 보고 싶어하지만, 영국은 ‘종이봉투에 담긴 돈을 받아서 몇달 뒤 영화로 갚는 방식’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미국을 배경으로 했던 시나리오를 영국으로 수정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전작에 담긴 뉴욕의 이미지와 달리 <매치포인트>에 비친 런던은 “그저 관광객의 시선에서 바라본, 심장도 영혼도 없는 곳 같다”는, 영국 평론가들의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영화의 공간적 배경을 이동한 결과는 제법 만족스럽다. 이방인 앨런은, 출신을 벗어나려는 젊은이의 욕망과 그 앞에서 공고하기만 한 상류층의 매너를 효과적으로 대비시키며 영국의 뿌리 깊은 계층사회를 냉소한다.

명백한 공간의 변화 이후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영화를 꽉 채운 에너지다. 타락에 몸을 맡기는 크리스와 노라가 비 오는 야외에서 연출하는 첫 번째 섹스신은, 더없이 뜨겁다. 열정과 안락을 저울질하던 크리스가 점점 자신에게 집착하는 노라에게 궤변에 가까운 변명을 늘어놓을 때 둘의 갈등은, 전에 없이 격렬하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행동에 옮기는 순간 도저히 구원받을 길 없는 주인공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은, 그저 차갑고 묵묵하다. 물론 비교 대상은 앨런의 전작들이다. 수다스럽고 소심하며 신경증적인 그의 영화가 언제 이토록 무겁게 치열한 적이 있었나. 제아무리 복잡하고 처절한 상황에서도 그의 인물들은 실존주의적 로맨스로 도피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어떤 인물이 비관적인 삶에 대해 한숨짓더라도 다른 한쪽에선 고민을 농담으로 바꾸기에 급급했다. 더군다나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를 손에 땀을 쥐며 보게 만드는 팽팽한 긴장감이나 내러티브상의 서스펜스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범죄와 비행>과 같은 듯 다른 <매치포인트>

우디 앨런의 전작 중에서 이와 가장 가까운 작품을 꼽자면 1989년작 <범죄와 비행>이 될 것이다. <매치포인트>가 칸에서 공개된 순간부터 많은 평자들이 비교대조표를 그려왔던 두 영화의 줄거리는 상당 부분 겹쳐진다. <범죄와 비행>의 주인공 역시 안락한 일상을 위해 과거의 열정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저명한 안과의사 주다(마틴 랜도)는 가볍게 만났던 정부 돌로레스(안젤리카 휴스턴)가 심각한 관계를 요구하며 현실적으로 협박을 가하자 동생 잭을 통해 그를 청부살해한다. “개인은 스스로가 내린 결정에 의해 정의된다”고 믿는 주다는 평생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도저히 감당 못할 짐은 아닐 거라고 우디 앨런은 결론내린다. 앨런의 또 다른 영화 <맨하탄 미스테리>가 살인을 소소한 재미로 활용했다면, <범죄와 비행> <매치포인트>는 죄의식과 신의 존재처럼 실존주의적 주제를 위한 은유로 사용했다.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려는 주인공의 궤변부터, 모든 죄가 처벌받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무고한 누군가가 영문도 모른 채 희생당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결말까지. 두 영화는 많은 지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진심을 다했던 여인이 용납할 수 없는 상대를 선택하는 결말을 목격해야 했던 클리프(우디 앨런)의 배신감을 주다의 죄의식과 비슷한 수위에 배치한 <범죄와 비행>의 반쪽은 명백한 코미디였다. 수많은 캐릭터와 각종 회상장면이 치밀한 구조를 이루는 <범죄와 비행> 속 인물들은 늘 고민하고 주저한다. 그러나 <매치포인트>는 희생자를 향한 주인공의 죄의식을 표현하는 데 인색하고, 고민보다는 행동을 통해 타락을 묘사하는, 일종의 누아르영화다. 주다의 고상한 삶을 위해서 돌로레스를 대신 처치하는 그의 동생 잭을 필요로 했듯, 당시 우디 앨런은 한켠에 코미디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는 심오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매치 포인트> 촬영현장의 우디 앨런 감독

자신의 선택과 그로 인한 죄의식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다의 원형은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였다. 그러나 주다는 크리스와 달리 이미 가진 것을 지키려 드는 쪽이다. 그러므로 크리스가 피를 나눈 것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아니라, 조지 이스트먼(<젊은이의 양지>)이 될 것이다. 주다와 달리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는 크리스는, 비뚤어진 욕망이 부른 파멸의 결과 자신의 아이를 밴 정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조지의 배다른 형제다. 그뿐인가. <재능있는 리플리씨>의 리플리, <적과 흑>의 줄리앙 등 사회적 지위를 향한 동경에 눈이 멀어 타락을 거듭하는 크리스의 형제들은 온갖 문학과 영화 속에서 심심찮게 등장했다. 이들과 크리스가 다른 점이 있다면, 노라를 향한 크리스의 욕망이 좀더 무의미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모함은 우리 시대의 욕망과 실천에 한 발짝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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