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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된 죄의식의 자학게임, <히든>

유럽 부르주아의 극단적 자기혐오 전시하는 <히든>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당신이 <히든>을 다 보고 나서도 누가 테이프를 보냈는지 알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영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다”라고 감독 미카엘 하네케는 말했다. 하지만 결국 그 테이프 때문에 한 가족 전체가 신경쇠약에 이르렀고, 한 불행하고 착한 사내는 자살했다. 그러니 감독에게 멍청하다는 핀잔을 듣는다 해도 묻고 싶다. 도대체 누가 테이프를 보냈을까.

<히든>의 이야기는 ‘누가 그랬을까’를 관객이 궁금해하도록 설계된 일종의 스릴러다. 영화의 시작은 파리의 중산층 주택을 고정카메라가 한참 비추는 장면이다. 이 화면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곧 문제의 비디오테이프 화면임이 드러난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비디오 화면 속의 주택에 사는 조르주와 안느 부부다.

조르주는 책 소개 프로그램을 맡은 방송인이며, 안느는 출판사에 근무한다. 그들에겐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피에로가 있다. 그들이 본 테이프는 문 앞에 놓여 있었고 보낸 사람은 알 수 없다. 낮 동안 조르주의 집을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한 그 테이프에는 간혹 오가는 사람들과 사소한 소음들 외엔 특별한 게 없다. 조르주의 짓궂은 팬의 짓일까? 아들 친구의 장난일까? 조르주 부부는 감시당하고 있다는 불편함과 가벼운 불안감에 휩싸인다. 테이프는 계속 배달된다. 밤에 조르주의 집을 촬영한 두 번째 테이프에는 사람의 목에서 피가 터져나오는 조악한 그림이 동봉돼 있다. 첫 번째 테이프를 무심하게 넘긴 조르주는 그 그림을 보고 잊고 있던 어렴풋한 기억 속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점차 신경이 예민해진다. 세 번째 테이프에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조르주의 시골집이 담겨 있고 닭의 목을 따는 그림이 함께 배달된다. 극도로 예민해진 조르주는 발신자가 누구인지 짐작한다.

네 번째 테이프는 누군가의 집에 이르는 경로가 찍혀 있다. 테이프의 단서를 따라 조르주는 그 집을 찾아내고, 마침내 그가 발신자로 짐작하던 인물을 그곳에서 만난다. 그 인물은 알제리 출신의 마지드라는 중년 남자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것으로 짐작되는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마지드는 그늘이 있지만 온화한 얼굴을 지녔다. 그는 테이프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조르주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조르주가 집으로 돌아오자, 마지드 집에서의 두 사람의 대화장면이 담긴 테이프가 도착해 있다. 아내의 추궁에 조르주는 마지드와의 인연을 고백한다. 마지드는 옛날 조르주의 집에서 일하던 알제리인 부부의 아들이었다. 마지드의 부모는 알제리인 200명이 센강에 수장된 1961년 학살 사건 때 죽었다. 조르주의 부모는 마지드를 입양하려 했으나 자기 것을 나누기 싫었던 어린 조르주는 마지드를 모종의 거짓말로 쫓아냈다. 조르주는 아내에게 마지드의 집 안에서 촬영된 이 테이프가 바로 마지드가 범인이라는 증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안느는 동의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아들 피에로가 실종된다.

부르주아적 신경증의 치밀한 묘사

줄거리를 길게 소개한 이유는 여기까지 오프닝게임이었다면 여기서부터 본게임이기 때문이다. 관객으로선 마지드가 범인이라고 믿기 힘들다. 나중에 등장하는 마지드의 아들이 범인이라고 믿기도 힘들다. 신경질적이며 불안정한 조르주 가족에 비하면 두 알제리인 부자는 훨씬 건강하고 맑은 사람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느의 말대로 마지드는 자기가 촬영하면서 그같은 연기를 할 사람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테이프를 누가 보낸 것인가.

먼저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을 인정해야겠다. 하네케는 징그러울 만큼 솜씨 좋은 감독이며 여전히 부르주아적 신경증 묘사의 대가다. <피아니스트>에서 엄마를 가둬놓고 이자벨 위페르와 브누아 마지멜이 벌이는 폭력적 정사장면은 쉽게 흉내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히든>에서도 세련되고 안정된 중산층 가정이 불안을 거쳐 신경쇠약에 이르는 과정을 현미경 같은 관찰력으로 그려낸다. 그들의 정신은 종잇장처럼 얇아 평온을 깨트리는 작은 소란도 견디지 못한다. 현금계산기의 인쇄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에, 누군가가 코 푸는 소리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예민한 그들에게 도착한 것이 다름 아닌 비디오테이프라는 건 흥미롭다. 어떤 특정한 사건도 담겨 있지 않은 이 테이프는 시선 자체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위치 설정이 첫째와 둘째 테이프의 전부다. 조르주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그 시선의 일방성이다. 그는 나를 보는데 나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 이 응시의 불가역성 혹은 응시의 객체로서의 전락을 이 유럽 부르주아는 견딜 수 없다. 조르주의 직업이 방송 진행자이자 프로듀서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는 TV를 통해 보여지지만 편집실에서 보여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권력자다. 하지만 이 정체불명의 테이프에서는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다.

<히든>은 여기서 시선의 권력을 현실 권력의 문제와 연관시킨다. 테이프에 담긴 시선의 주체가 알제리인이라고 조르주가 상상할 때 그것은 3세계에 대한 1세계의 죄의식과 1세계와 3세계의 권력 전도에 대한 공포가 은밀하게 작동한다. 제3세계 수탈과 경제적 우위가 토대가 된 서구의 미디어 지배가 1세계를 응시의 주체, 3세계를 응시의 객체로 고착시켰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 설정도 흥미롭다.

비디오테이프를 탄생시킨 것은 조르주의 죄의식

하지만 마지드의 집을 알려주는 네 번째 테이프가 도착하면서 영화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제 테이프들은 조르주의 상상을 현실화하는 직접적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다섯 번째 테이프는 마지드의 방에서 촬영됐다. 그러나 그 방에 있던 누구도 그것을 찍은 바 없다. 그러니 이 테이프의 제작은 불가능하다. 마지드의 끔찍한 자살이 있고 나서는 비디오와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다. 집으로 돌아온 조르주가 잠자리에 든 뒤에 40여년 전 마지드가 고아원에 끌려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것은 마지드의 꿈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비디오테이프일 수도 있지만 그 구분은 불가능하다. 테이프는 이제 시공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전능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미카엘 하네케는 자신의 출세작 <퍼니 게임>을 할리우드 스릴러에 대한 패러디라고 했다. <히든>은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호러에 대한 패러디다. 테이프는 귀신이거나 괴물이다. 그것은 조르주라는 유럽 부르주아의 억압된 기억이 귀환해 물질화한 것이다. 귀신으로 부르는 이유는 <히든>을 사실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한 서사 논리 안에서 그 테이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드 부자가 범인이 아니라면 그 테이프를 만들 수 있는 건 조르주의 죄의식밖에는 없다. 그의 죄의식은 때로 그가 거짓으로 기억하고 있는 피를 토하거나 자신을 위협하는 어린 마지드의 모습으로 되살아오기도 하고, 마지드가 고아원으로 끌려가는 ‘평화로운’ 이미지로 되살아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거짓말이 추방한 40여년 전의 인물을 마주할 수 있게 만드는 비디오테이프로 되살아온다.

<퍼니 게임>에서 하네케가 패러디를 수행하는 방식은 텍스트의 경계에 구멍을 뚫는 것이다. 두 살인범 중 하나가 살인 모의를 하기 전에 관객을 향해 눈을 찡긋한다. 그 눈짓은 텍스트의 경계를 넘어 관객을 안전한 관음자의 자리에서 끌어낸다. 또한 살인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아 동료가 죽어버렸을 때, 비디오를 리와인드하는 듯한 화면이 나온 뒤 몇초 전으로 돌아간 두 범인은 다시 살인을 시도한다. 이번엔 성공한다. 관음자와 관음 대상의 안전한 자리를 뒤흔들면서, 재현은 장난이 되고 살인은 비디오게임이 된다.

<히든>의 등장인물들은 관객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들은 이 게임에 갇혀 있다. 누가 이 테이프를 보냈는가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조르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낸 그의 죄의식은 그러나 사악하다. 정체불명의 비디오테이프는 조용히 살아가던 피해자 마지드를 색출해 결국 그를 자살로 내몬다. 조르주는 아내에게 이 모든 과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결국 마지드가 바라던 대로 되었군. (테이프와 함께 배달된 그림에서처럼) 자기 목을 그은 건 지독히 뒤틀린 농담 아닌가.”

제3세계를 유럽의 타자로 고정시키는 묘사

마지드의 행위가 아니라 <히든>이 지독히 뒤틀린 농담이다.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낸 죄의식은 실은 위장된 죄의식이다. 죄의식을 가장한 극단적인 이기성, 거의 종교적인 에고이즘이다. 죄의식의 이면에서 작동한 이기적 목적이 완성됐을 때, 조르주는 편히 잠든다. 피에로의 학교 앞을 비디오 화면처럼 비추는 마지막 장면이 새로운 테이프의 생성을 암시하지만, 조르주가 그랬던 것처럼 이 유럽의 부르주아들은 며칠 동안 신경쇠약에 걸렸다가 죄의식의 대상이 제거되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참회해야 할 역사적 사건을 끌어들이면서도 어떤 역사적 진전도 윤리적 각성도 부인하는 이 극단적인 냉소주의와 자기혐오는 근본주의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제스처로 느껴진다. <히든>에서 가장 동의하기 힘든 것은 마지드 부자에 대한 묘사다. 성자 같은 표정의 마지드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하고, 마지드의 아들은 조르주를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아버지에게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빼앗았어요. 고아원에선 사랑보다 증오를 가르치죠. 하지만 아버지는 저를 잘 키우셨어요.”

자신이 추방한 타자를 이처럼 무기력할 만큼 고결한 인물로 묘사하는 건 악마로 묘사하는 것만큼 위험하다. 이런 방식의 묘사는 3세계를 소통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유럽의 타자로 고정시킨다. 마지드 부자는 나의 죄의식과 긴장하며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나의 사악함을 완성하는 도구다. <히든>은 자기비판이 아니라 자기혐오를 전시하는 노출벽의 영화이며 유럽 부르주아의 자학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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