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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이 가져온 폐소공포, <날 보러와요>
김현정 2006-04-14

1986년에 시작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공소시효 만료를 앞둔 지금까지도 미결로 남아 있다. 범죄는 많아도 연쇄살인은 드물었던 한국에서, 그것도 80년대 한국에서, 사람들은 비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인만 골라 살해했던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으로 유명해진 <날 보러와요>는 시골 지서의 좁은 사무실 안에만 머무르며 복잡한 시선과 입장의 교차를 만들어내는 연극이다. 1996년 처음 무대에 올랐던 <날 보러와요>는 비록 공간은 화성이 아니지만 그 배경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태안 지서 형사계는 잇따라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뒤숭숭하다. 서울에서 자원해 내려온 김 반장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시를 쓰는 김 형사, 지역 토박이인 박 형사, 무술 9단인 조 형사가 이 사건을 수사하며 차례로 용의자를 체포하고 있다. 가장 먼저 잡혀온 용의자 이영철은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정신병원에서 도망나온 그는 횡설수설하며 범행을 자백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다. 형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수사를 계속하지만 이영철이 열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면서 언론의 표적이 된다. 그 위기 속에서 김 형사는 살인이 일어나는 날이면 라디오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봉준호 감독이 치밀하게 각색한 <살인의 추억>은 역사의 현장에서 엇나가 있는 듯한 화성연쇄살인사건에 시대의 공기를 겹쳐놓았다. 부천 성고문사건과 80년대 시위현장, 등화관제 훈련이 표면으로는 스릴러였던 영화의 바탕에 스며 있었다. 그러나 <날 보러와요>는 그 반대에 가깝다. <날 보러와요>는 닫힌 공간과 제한된 인물이라는 연극의 형식에 성실하다. 그 때문에 관객은 불가해한 사건을 만나 우왕좌왕하는 태안 지서에 갇혀, 코믹하지만 폐소공포를 자아내는 드라마에 포박된다. 어쩌면 이런 형식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 되새기는 데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80년대 중반, 화성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지방 사람들까지 비오는 날 붉은 옷의 터부를 지키고 살았기 때문이다. 풍문과 기사에 휩쓸린 이들은 아주 먼 곳 어딘가의 공포를 집 안으로 가져왔고, 화성은 곰팡이처럼 번식을 시작했다. 공포와 공포를 해결하려는 이들, 그 공포를 확장하는 이들. <날 보러와요>는 그들을 통해 무대에 등장하는 사무실 그 이상의 거대한 그림자를 보여준다.

초연 1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날 보러와요>는 최용민과 권해효, 김뢰하, 정동숙 등의 이름으로도 관심을 끄는 공연이다. <살인의 추억>에 여자 팬티를 입은 변태성욕자로 출연했던 류태호가 네명의 용의자 모두를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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