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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에 영화가 살고 있었네
2001-08-22

캄보디아 문화부 국장 솜 소쿤씨와 비민뜹극장 대표 나영걸

킬링필드에 영화가 싹트고 있었네. 몹시 덥던 지난 8월8일 오후 5시, 더운 나라에서 온 손님을 세종호텔에서 만났다. 캄보디아 문화부 국장 솜 소쿤씨(51). 깡마른 몸에 커다란 금테안경을 걸치고 음성은 나직한 그는 관료라기보다 수도승 같았다. 문화부 장관 직속으로, 영화에 관한 실무를 총괄하는 그의 방한 목적은 두 가지. 하나는 유네스코 개최 ‘2001 한-아세안문화계인사(영화인) 교류사업’에 참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영화와 관련된 모든 것을 배우는 것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메가박스 등 씨네플렉스를 둘러보고 종합촬영소도 견학했다. 영화법, 심의방법 등을 알기 위해 문화부, 영화진흥위원회, 공연윤리위원회 사람들도 만났다.

솜 소쿤 국장이 영화의 모든 것을 배워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캄보디아를 통틀어 하나밖에 없는 극장 ‘비민뜹’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극장이 생겨났으니 법도 만들어야 하고 심의도 해야 했다. 솜 소쿤씨를 이처럼 바쁘게 한 장본인은 비민뜹극장 대표 나영걸씨. 지난 98년, 휴가차 캄보디아에 갔던 그는 그곳에 극장이 하나도 없다는 말에 무릎을 쳤다. 우리나라 70, 80년대 분위기와 비슷하니 극장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한국사람인 내가 가서 문화를 바꿔보자 결심했다고. 99년 캄보디아 정부와 계약을 맺었고, 1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지난 2월24일 극장을 개관했다. 비민뜹은 820석 규모로, 우리의 종로2가쯤 되는 번화가인 모니봉 대로에 자리잡고 있다. 관람료는 1달러(약 4천리알). 스크린이 너무 ‘크다’고 불평도 하고 사운드가 너무 시끄러우니 줄여달라는 요청도 있지만, 비민뜹극장은 젊은 세대들에게 ‘극장’과 ‘영화’라는 새로운 문화의 장이 되고 있다. 나영걸 대표가 캄보디아에서 겪었던 가장 큰 시행착오는 문화적 우월감. “내가 한국에서 영화 하다 왔는데,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여기도 나름의 문화와 정서가 있고 수준이 있는데, 그걸 무시했던 것이 뼈아픈 교훈으로 남았다. 첫 35mm 상영작이 <레옹>이었다. 하지만 참패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나라 사람들은 총소리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캄보디아 영화계에도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 1960년에서 1975년까지는 영화가 문화의 중심이었다. 영화제작사는 60여개, 15년 동안 300여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당시 프놈펜시에만 33개의 극장이 있었다고. 그러나, 75년에서 79년 사이에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감독이나 배우들도 학살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79년 폴 포트 정권이 막을 내린 뒤, 9개의 관영극장이 문을 열고 체코, 베트남 등 공산권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카세트 테이프(비디오 테이프를 캄보디아에서는 카세트 테이프라 부른다고 한다)가 등장한 것은 85년 무렵. 그뒤로 사람들은 홍콩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불법 소극장이 성황을 이루었고, 공산권 영화를 틀던 극장은 파리를 날리게 됐다. 거기다 90년대 이후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 TV의 시대가 열렸다. 극장들은 하나둘 가라오케나 술집, 댄스바가 되어버리고, 유일하게 비민뜹극장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 5년 동안 폐쇄되어 있었다고. 나영걸 대표가 극장을 운영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캄보디아 정부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솜 소쿤 국장은 <툼레이더>에 앙코르와트 로케이션 허가를 내준 데 이어 최근에는 맷 딜런의 감독작 <보리수 나무 밑에서>(Beneath the Banyan Trees)도 캄보디아 로케이션을 허가했다. 킬링필드에 평화가 왔음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제스처다. 현재 프랑스 등과 합작영화도 몇편 만들어지고 있다. 아직 순수 캄보디아 자본만을 투입한 영화는 없다. 자체적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나 기자재, 인력도 없다. 그러나 폴 포트는 가고, 영화는 남았다.

글 위정훈 기자 oscarl@hani.co.kr·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