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행복한 성공의 드라마, <호로비츠를 위하여>
박혜명 2006-05-23

*스포일러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정보를 포함한 글입니다.

유명 피아니스트의 꿈을 버리지 못한 노처녀 지수(엄정화)는 조그만 동네에 피아노 학원을 차렸다. 낡은 상가 2층 귀퉁이에 ‘비엔나 피아노학원’이란 간판을 단 노란 문의 학원이다. 그 동네에는 소문난 말썽쟁이 경민(신의재)이 있다. 고물상을 하는 할머니 손에 버려지듯 자란 고아 경민은 툭하면 지수의 학원을 찾아와 사고를 치고 간다. 경민이 미워 안달이던 지수는 경민이에게 숨겨진 천재적인 피아노 연주실력을 발견한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다면 그 스승이라도 되어 명예와 부를 누려볼까 싶어진 지수. 그날부터 경민을 열심히 가르친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다. 스승은 허점투성이, 제자는 상처투성이다. 두 사람은 그리 순탄치 못한 방식으로 만나 불편하게 우정을 쌓아가고 마음을 열었을 때쯤 헤어졌다가 아름답게 재회한다. 스승과 제자를 이어주는 목표? 분위기 좋은 영화 포스터를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루어진다. <호로비츠…>는 영국의 빌리 엘리어트와 한국의 김봉두 선생이 만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멜로드라마를 닮은 이야기 구조에 두편의 유사작품을 예로 들면 <호로비츠…>의 얼개는 다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쯤 되면 영화에 대해 성의없이 짐작하면서 마치 다 보고 난 듯 생각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호로비츠…>는 식상한 드라마 구조를 지녔음에도 강하게 감정선을 자극한다. 이 감정의 힘은 범재에 불과한 선생의 열등감과 천재인 학생이 지닌 상처가 충돌하는 디테일에서 나온다. 지수는 경민의 능력을 키워주려고 애를 쓰는데 경민은 제 방식대로 음악을 즐긴다. 다른 한편으로 지수는 경민을 통해 자기가 못다 이룬 꿈을 이뤄보려고 하고 경민은 서툰 방식으로 선생님에게 사랑을 표현하려고 한다. 두 사람의 대화 방식은 서로 너무 달라서 쉽게 접점을 찾지 못한다.

지수와 경민의 충돌은 코미디의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멜로드라마의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어떤 방식을 취하든 둘의 갈등은 꿈의 성취보다도 화해라는 목표를 향해 일관되게 흐른다. 지수와 경민의 관계는 엄밀히 따지면 사제간을 넘어서 모자관계에 가깝다. 노처녀인 지수는 경민이 느끼는 모성애의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다. 경민은 그녀에게 아들같다. 지수와 경민이 비로소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쯤 경민의 미래를 위해 지수가 내려야하는 결정은 단순히 학생의 앞길을 고민하는 스승의 것이 아니라 아들과의 이별을 염두에 둔 어머니의 고민과도 같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을 울릴 수 있는 이 대목에서 엄정화의 연기는 빛을 발하는데, 이는 국내 피아노 콩쿠르 대회 입상자인 신의재(경민 역)에게 실제 모성애에 가까운 감정 몰입을 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배우의 연기로 힘을 받은 캐릭터와 일관된 감정의 흐름을 가졌다고 해도 식상한 드라마 구조에서는 잡다한 에피소드의 나열이나 불필요한 대사의 남발을 피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호로비츠…>는 이 함정도 현명하게 피해간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이 음악의 활용이다. 지수와 경민 사이에서 계속 어긋나던 의사소통은 두 사람이 함께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훨씬 쉬워진다. 경민이 피아노를 치고 지수가 들어줄 때, 지수가 보살펴주는 모습을 경민이 지켜볼 때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럴 때마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비롯해 유명한 피아노 클래식 소품들이 흐른다. 음악이 전해줄 수 있는 감정의 내용은 추상적이기 때문에 많은 결을 만들어낸다. 대사나 화면으로 처리됐다면 이 영화의 감정선은 훨씬 평면적이었을 것이고 식상한 드라마는 민망한 수준으로 내려앉았을지도 모른다.

<호로비츠…>는 어쨌든 행복한 성공의 드라마다. 지수가 애초 구상했던 대로는 아니지만 경민은 성공했고 그 성공의 은혜를 당당히 지수에게 돌렸다. 꿈은 이루어지고 상처는 치유되고 스승과 제자는 완전한 교감을 이룬다. 슬픈 것들로부터 삶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호로비츠…>의 굳은 믿음이다. 이 믿음은 실은 엄청난 판타지다. 피자가게를 운영하며 지수를 짝사랑하는 순박한 노총각 광호(박용우)나 지수의 피아노 학원생 꼬마들의 자잘한 모습들도 현실적인 디테일이라기보다 판타지의 허기를 메워주는 장식들일 뿐이다(박용우의 매끄러운 연기는 그의 역할이 조연이라는 것도 잊게 할 만큼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런 디테일을 다듬는 감독의 시선은 일상에 따뜻한 애정을 둔 사람의 것 같다. 그런 시선을 가졌을 때에만 발견할 수 있는 작고 따뜻한 순간들을 건져내기 때문이다. 이같은 작은 순간들 그리고 백 마디 말보다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 덕분에 <호로비츠…>의 무리한 믿음은 심정적 동의와 상관없이 감동의 눈물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가정의 달인 5월의 끝무렵에 개봉하는 <호로비츠…>는 오랜만에 온 가족이 가서 관람해도 좋을 영화다. 사제간에 집중하느라 <호로비츠…>는 대충 외면하고 말았지만 삶의 회복에 대한 믿음을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은 아무래도 가정일 테니 말이다. 치유까지는 안 되더라도 최소한 몇 시간은 벅찬 감정을 서로 나누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음악영화이기에 덧붙이자면, 어른이 된 경민 역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피아니스트 김정원이다. 최근 국내 발매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앨범 홍보에 맞춰 영화 속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과 3악장의 연주를 일부분 보여준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은 지난해 김대승 감독의 <혈의 누>에서 메인 테마로 변주 활용된 그 오리지널 곡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