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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군 투덜양] 어쭙잖은 ‘팜므파탈’ 웬말이오, <안소니 짐머>

투덜양, 소피 마르소의 망가진 모습에 속상해하다

※스포일러 ‘지대로’ 있습니다.

<007 언리미티드>를 보지 않았고, <브레이브 하트>도 보지 못했다. 사실 <피델리티> 정도를 제외하면 <라붐> 이후에 소피 마르소를 본 적이 없다. <구름 저편에>를 보기는 했지만 거기서 조연에 가까웠던 그녀의 모습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여 <안소니 짐머>는 연습장 표지와 책받침을 통해 나와 학창 시절을 보냈던 그녀를 십여년 만에 다시 만난다는 기대만으로 궁금해지는 영화였다. 일단, <007 언리미티드>에서 본드걸로 캐스팅된 이유가 됐다는 소문의 그녀의 다리는 여전히 늘씬하고 아름다웠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소피 마르소의 다리로 장사를 해보겠다는 작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다리로 캐스팅한 건 007 시리즈가 아니라 이 영화라고 외치는 것처럼 하이힐 위의 다리를 오래오래 보여준다.

그러고나서 소피 마르소의 길고 갸름한 얼굴로 올라가는데 그 얼굴을 보면서 나는 새삼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성형 실태와 보톡스의 위력을 절감할 수 있었다. 볼이 홀쭉해지고 턱의 각이 선명해진 그녀의 얼굴은 마흔줄에 진입한 나이를 구태여 숨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보톡스 효과로 ‘여전히 아기 같은 볼살이 남아 걱정이에요’라고 웅변하는 중년 여배우들의 모습에 익숙하던 터라 소피 마르소의 마르고 나이든 얼굴은 당황스러웠다. 내가 이랬으니 그녀를 숭배했던 남성들의 안타까운 마음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안타까운 건 그녀의 얼굴보다 영화였다. 물론 성인이 된 뒤 소피 마르소의 출연작들 상당수가 지지부진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한때 나의 우상이 이렇게 별볼일없는 영화에서 어쭙잖은 팜므파탈을 연기하는 걸 육안으로 확인하는 건 확실히 속상한 일이었다.

<안소니 짐머>에서 그녀는 검은돈을 세탁하는 범죄자인 안소니 짐머를 사랑하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짐머는 성형수술과 목소리까지 바꿔 경찰의 포위망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짐머의 연인이자 경찰 비밀요원인 키아라(소피 마르소)는 짐머를 보호하기 위해 엉뚱한 남자를 끌어들이는데 이 남자가 결국 안소니 짐머였다는 기야기다. 따지고 보면 엄청난 반전인데 최악의 반전이다. 반전이라는 게 밝혀지고 나면 그전에 느슨했거나 상관없어 보이던 단서들이 주르륵 띠를 만들면서 시작과 끝을 연결시키는데 이 영화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느리고 둔한 화면만이 할리우드영화와의 차별성을 만든다. 게다가 팜므파탈이라는 ‘설정’만 있을 뿐, 부지런한 심부름꾼처럼 뛰어다니는 키아라의 존재는 무엇인가. 관객이 다 알아차릴 때까지 혼자만 죽도록 사랑하는 연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팜므파탈이란 웬 언어도단이란 말인가.

근육질의 육체를 전시하는 것 말고 별다른 매력을 풍기지 못하는 소피 마르소를 보는 건 착잡했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피천득의 수필처럼 그녀와의 이번 만남은 아니 만나는 게 나았다는 후회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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