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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장이, 정신건강이 허락하는 한 만든다”
2001-08-29

<세이예스> 제작자 황기성 (1)

● 황기성 사장은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60년대 신필림 시절 영화에 투신해 40년 가까이 활동해온 한국영화의 산증인이지만, ‘회고’보다 ‘구상’에 가치를 두는, 현재진행형 영화인이다. 황기성이라는 제작자가 흥미로운 또다른 이유를 <영자의 전성시대> <어둠의 자식들> <고래사냥> <성공시대> <안개기둥>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닥터 봉> <고스트 맘마> <> 등으로 채워진 필모그래피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때마다 적절한 이슈를 골라내고, 당대 관객에게 어필하는 영화를 기획·제작하는, 흥행사로서의 녹슬지 않는 감각이다. 젊은 관객과 호흡하려는 노력은 또한 젊은 영화인(장선우, 박철수, 강우석, 김성홍, 이광훈, 한지승)의 발굴과 재발견의 결실로도 이어져왔다. 황기성 사장이 최근 새로이 관심을 기울인 장르는 스릴러. <신장개업>에서 함께 작업한 김성홍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춘 <세이예스>는 정체불명의 살인마에게 쫓기는 젊은 부부의 처절한 여행담을 충격적인 영상에 담아내고 있다. <세이예스>가 막 극장에 내걸린 시점이라, 영화에 대한 자체 평가나 흥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는 좀 일렀던 듯. “장사중이기 때문에 뭐라 말하기 힘들다”는 황기성 사장의 입장에 따라 <세이예스>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가 오가지 않았다. 사실 ‘영화청년’ 황기성의 새로운 포부, 근간의 한국영화계에 대한 근심과 전망을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 개봉날 극장 앞이 아니라 북한산에서 전화를 받아서 놀랐다.

= 영화 만드는 일이 좋은 건, 어제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인데, 다 지난 일 신경써서 뭐 하겠나. 개봉하면 영화는 이미 제작자 손을 떠나는 거다. 제작자가 관객이 오고 안 오는 것, 반응 여하에 집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상업영화 만들면서 흥행을 바라는 건 당연한 거지만 크게 보고 크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산꼭대기에 올라간 거다. 크게 조감하려고.

* 영화가 막 개봉된 민감한 시점이라 인터뷰를 거부한 거였나.

= 그런 이유도 있지만, 본래 인터뷰를 싫어한다. 황기성사단(이하 황사단)의 사주가 이렇게 늙은 사람이라는 것이 글과 사진으로 공개되면, 우리 영화도 늙어보일 것 아닌가. 그건 제작사로서 큰 손해다. 내가 올해로 예순셋이다. 사실 많은 나이는 아니다. 그런데 자꾸 나이를 부각시키는 건 ‘당신은 늙었으니 빨리 물러나라’는 뜻 같기도 하고. 어느 예술분야에서든, 60대면 막 철들고 눈뜨기 시작하는 때인데 말이다. 또다른 이유는 내가 매체에서 조명될 만큼 대단하게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 1년 반 만에 새 작품을 내놓았는데, 전에 황사단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액션과 호러가 가미된 유혈낭자한 스릴러다. 어떻게 기획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 나이먹은 제작자의 시각으로 볼 때, 한국영화 제작자들이 같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해외시장에 팔리는 한국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수시장에서는 정부와 젊은 영화인들의 노력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이 이뤄졌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산업적 뿌리가 있나. 스크린쿼터에만 의존하기엔 너무 위태롭다. 자기 발로 서고 나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바깥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국제시장을 나가보면, 거래가 잘되는 품목이 액션, 스릴러, 에로다. 언어나 문화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장르니까. 그런데 한국의 주력상품은 멜로 아니면 코미디다. 한국 언어와 문화를 모르는 해외시장에선 상업성을 갖지 못하는 장르다. 액션은 할리우드를 따라가기 힘든 반면, 스릴러는 한국감독들이 접근할 가능성과 성공할 전망이 높다. 계산력과 표현능력이 뛰어난 감독들이 많다고 본다. 스릴러야말로 가장 영화적인 장르라고 생각한다. 10대, 20대 관객이 좋아하는 색깔의 감독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지만, 스릴러는 영화적 경험이 풍부한 40, 50대 감독이 가장 잘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중에서도, 그간 스릴러영화에 집착해온 김성홍 감독에게 주목하고, 그와 함께 작업해온 여혜영이란 작가를 주목하며 애정을 갖다보니, 함께하게 된 거다. 비인기 장르를 지속해온 그들을 독려하고 싶었다. <신장개업>은 스릴러에 코미디를 가미한 영화였고, <세이예스>는 스릴러에 멜로를 가미했다. 하나의 장르로 영화를 구분짓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기자나 평론가들이 장르의 잣대로 영화를 평가하지 않나. 하지만 모든 영화는 생물처럼 변한다. 카테고리나 이론에 갇힌 게 아니다. 이를테면 히치콕의 <싸이코>를 스릴러의 원전으로 놓고, 우열을 재단하는 건 위험한 생각이다. 어쨌든 앞으로도 이 장르가 다른 제작사에 의해서도 많이 개발되길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해외 마케팅하는 이들의 가방이 무거워질 것이다. 팔 물건이 늘어날 테니까.

* 기획단계부터 해외시장 진출을 염두에 둔 것이었나. 어떤 약속이나 성과가 있었는지.

= 지금 자막 작업중이다. 구체적으로 진행한 내용은 없고. 로맨틱코미디가 황사단의 주조인 것도 아니고, 좋은 액션과 스릴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부터 했다. 어떤 시장에서 관심을 가져줄지 아직은 모르겠다. 아시아권은 대개 한국 내 흥행작에 관심이 높다지만, 유럽권은 어떤 물건이냐에 관심을 둔다고 한다. 영화의 상품성 자체는 엄정한 거다.

* 이번에는 직접 아이템을 낸 뒤 감독을 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감독의 원안과 시나리오를 채택한 경우다. 제작자로서 <세이예스>의 어떤 점을 가장 흥미롭게 생각했나.

= 작가와 감독이 하고 싶은 아이템을 ‘나도’ 하고 싶을 때, 그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누군지도 모르는 어떤 사람이 쫓아온다는 상황이 정말 공포스럽다고 봤다. 종전에는 범인의 히스토리를 풀어주는 게 상식적인 트루기였는데, 관객의 상상에 맡기고 풀어주지 않았다는 점도 매력있었고. 지금 시대의 ‘악’은 정신병적 요인을 많이 갖고 있어서 배경이 논리정연하거나 설득력이 있을 수 없다.

* 그간 황사단의 영화에는 폭력과 섹스가 거의 없었다. 지난 인터뷰에서 그런 착한 영화들을 지향한다고 했는데.

= 무엇에든 얽매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폭력적인 걸 일부러 찾아가는 건 물론 문제가 있지만, <세이예스>가 그런 영화는 아니지 않나. 영화에서 폭력성을 소화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기피하거나 소화 못하는 것은 이 시대에 걸맞지 않다. 폭력화되고 있는 시대를 문화 속에서 어떻게 소화할 것이냐가 숙제지, 기피하는 건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 <세이예스> 제작자 황기성 (1)

▶ <세이예스> 제작자 황기성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