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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에 대한 로망,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
이종도 2006-07-04

“항로를 어느 쪽으로 정할까요?”라고 갑판장이 묻자, 해상반란으로 물러났다가 블랙펄호 선장으로 복귀한 잭 스패로우(조니 뎁)가 대꾸한다. “되도록 심해로 멀리 나아가되 근해에서 멀리 떠나지 말라.”

3년 전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로 떠들썩하게 관객의 마음을 약탈했던 잭 스패로우 선장은 전편보다 더욱 모순적이고 모호한 캐릭터로 해적에 대한 로망을 달군다. 항로를 모르지만 그는 매우 선장다워 보인다. 그를 둘러싼 전설로만 친다면야 훈장이 모자랄 지경이지만 잭 스패로우가 약탈 짓을 하는 걸 영화상에서 본 이는 없다. 더구나 전편에서 윌 터너(올랜도 블룸)와 보여준 능란한 칼솜씨조차 2편에서는 아끼는 편이며 바람둥이 편력도 가늠할 계기가 더 적어졌다. 해적은 그렇다면 로맨틱한 모험가 잭 스패로우의 활동무대인 바다를 가리키는 것일 뿐 의미없는 이름이다.

해적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동인도 회사의 경영자 커틀러 베켓(톰 홀랜더)의 음모가 영화의 시작이다. 베켓은 엘리자베스와 윌 터너의 결혼식을 망치고 그들에게 사형수 잭 스패로우의 도피를 방조한 죄를 들어 사형을 언도한다. 뒤로는 윌 터너에게 잭 스패로우를 잡아서 넘기면 생명을 구해주겠다면서 말이다. 한편 잭은 바다를 지배하는 유령선 ‘플라잉 더치맨’호의 선장인 데비 존스(빌 나이)와 엮인 노예계약에서 벗어나고자 ‘망자의 함’ 열쇠를 찾고 있다. 1편에서 해적을 들뜨게 한 아즈텍의 메달이 망자의 함으로 바뀌었고, 바르보사 선장의 악당 노릇을 데비 존스가 넘겨받는 얼개는 대략 비슷하다. 적이자 동지인 잭과 윌의 운명이 다시 얽힌다는 것도 마찬가지.

스펙터클의 크기와 이야기 얼개는 더 커졌다. 전편에서 가장 극적인 광경은 달이 뜨면 해골로 변하는 블랙펄호의 선원들과 동인도 회사의 인터셉터호 선원들간의 해상 싸움이었다. 2편은 단순한 선상전투를 넘어서 거대한 식인 괴물 크라켄과 블랙펄호간의 싸움을 비롯, 식인종 섬에 갇힌 잭 일당의 탈출, 망자의 함을 둘러싼 물레방아 해안 전투 등으로 일상이 늘 모험일 수밖에 없는 해적의 영광과 수난의 역사를 담았다. 그런데 해적 수난사는 잭 스패로우의 모호한 운명 못지않게 비극적이며 드라마틱하다. 특히 악역인 데비 존스의 운명이 그러하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운명으로 괴로워하는 난파선의 선장을 보며 적의를 품기란 어렵다. 수염처럼 마구잡이로 뻗은 문어다리를 통해 한숨 같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독하게 파이프 오르간을 치는 그는 악인이라기보다는 나쁜 운명의 희생자처럼 보인다. 문어를 얼굴에 뒤집어쓴 듯한 무시무시한 생김새만으로 그를 미워하기는 어렵다. 시각적으로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시도는 (데비 존스의 악의를 기형적인 거대한 문어다리로 확장한 듯한) 괴물 크라켄과 블랙펄호 사이의 싸움으로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얼굴도 보이지 않고 문어다리만 휘두르는 크라켄은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다. 오히려 바다 위를 끝없이 떠돌아 다녀야 하는 난파선 플라잉 더치맨의 운명이 더 가혹하게 다가온다. 그것이 겉으로는 로맨틱해 보이는 해적의 어두운 이면이자 영광의 뒤안길인 것이다.

전편에서 소문으로만 떠돌던 터너의 아버지 부스트랩 빌(스텔란 스카스가드)과 윌이 데비 존스의 인질로 함께 묶이는 바람에 겪는 부자 상봉기도 이야기의 두께를 두텁게 한다. 의협심에 불타는 대장장이 터너는 타고난 해적으로서 자신의 삶을 다시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런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 보다 잭과 윌 그리고 블랙펄호 선원들이 식인종 섬에서 탈출하는 이야기의 시각적 매력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인간사의 이면을 여러 가닥으로 얽어맨 줄기는 허약하지만, 그 줄기들을 한 장면 한 장면 이어나가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흥분을 만들어낸다. 식인종 섬에서 블랙펄호 선원들이 절벽과 절벽 사이에 매달린 공중우리에 매달렸다가 풀려나는 장면, 잭이 화형에 처해질 뻔했다가 자신을 묶은 기둥째 도망치며 겪는 우여곡절은 2편이 주는 즐거움이다. 문제는 그 즐거움이 시각적인 쾌감에는 봉사하는 데 반해,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는 데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식인종 섬의 이야기를 뺀다면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은 여느 영화보다 조금은 지루하고 긴 상영시간을 이야기의 크기에 맞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줄기차게 영화의 힘을 끌고 가는 건 캐릭터와 배우가 혼동이 될 정도인 조니 뎁, 올랜도 블룸, 키라 나이틀리의 매력이다. 바다에 던져진 관 속의 시체에 숨었다가, 시체의 다리 뼈를 노 삼아 탈출을 하며 자신의 건재를 알리는 조니 뎁은 능청맞으면서도 유머러스한 연기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홀로 줄행랑을 치는 무책임을 보였다가도 어느새 돌아와 동료를 구하는 예측불가능한 선장의 운명은 자못 궁금한 구석이 있다. 아버지와의 조우 뒤 한층 성숙해진 올랜도 블룸, 남장 속에서 오히려 더 빛나는 키라 나이틀리의 매력도 성긴 시나리오의 틈을 메우는데 동원된다. 그렇다고 시나리오의 빈 틈이 메워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쁜 해적은 없고 해적질을 하는 나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로맨틱한 해적의 그림자를 찾느라 혈안이 된 동인도 회사가 실은 진정한 바다의 공공의 적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런데 영화는 서두에서 18세기 제국주의의 번성으로 해적이 사라져간다고 운을 떼면서도 동인도 회사의 패악에 세심한 육체성을 부여하는 데는 정작 게으르다. 멋진 해적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장사가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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