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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책의 숨쉬는 역사, 출판 디자이너 정병규
김혜리 사진 이혜정 2006-07-10

책이 무엇인지 책에게 물어볼까 싶어 사전을 열었다. “①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나타낸 글이나 그림을 종이에 인쇄하거나 적거나 하여 여러 장을 한 묶음으로 해서 꿰맨 물건의 총칭. ②종이를 여러 장 겹쳐서 꿰맨 물건”. 어영부영 넘기려는데 책(冊)자가 눈에 불쑥 뛰어든다. 한 덩어리로 묶은 종이 더미를 옆에서 본 형상이, 말보다 명쾌하다. 책은 몸이 있어서 비로소 책이다.

사람들은 지적 호기심이 책을 욕심내게 만든다고 믿곤 한다. 그러나 기억의 갈피를 들춰보면 책에 대한 사랑은 물욕에 가까웠다. 부모님께 선물받은 문고 상자를 뜯던 날의 가쁜 숨, 활자가 종이에 눌러 새긴 자국의 살가운 촉감, 두꺼운 책을 펼치면 밀려오는 먼 북쪽 나라의 숲 냄새, 얼굴을 파묻고 훌쩍이면 짠 습기를 먹고 같이 울던 책장. 모두가 육체가 기록한 추억이다.

출판 디자이너 정병규(60)는 책에게 몸을 지어주는 사람이다. 경북 중·고등학교 교지와 고려대학교 신문을 편집하며 분주한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1970년대 초·중반 <소설문예> 편집장을 거쳐 신구문화사, 민음사, 홍성사에서 기획, 편집자로서 ‘미다스의 손’이라 불러 어색하지 않을 걸출한 이력을 쌓았다. 1977년 당대 책 표지 디자인의 통념을 무너뜨린 한수산의 <부초>(민음사)부터 책 디자이너를 공식 직함으로 삼았지만 이미 편집자 시절부터 내용과 긴밀히 호응하는 책의 모양새를 다듬는 일은 그의 엄연한 업무였다. 1979년 유네스코가 일본에서 주최한 편집인 연수 과정에서 출판 디자인의 우주를 엿본 정병규는 36살에 프랑스 유학을 결행하고 귀국해, 기획과 제작까지 꿰뚫어보는 전문 디자이너로서 수천권의 책에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 최초의 북 디자이너’라는 해설이 그의 이름에 부제처럼 따라붙었다. 1996년 전시회로 책 디자인 20년의 성과를 갈무리한 정병규는, 60살을 맞은 올해 5월 영월 책 박물관에서 ‘책의 바다로 간다-정병규 북 디자인전’을 가졌다.

부주의한 독자인 내가 정병규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의 표지 안쪽에서였다. 그리고 1990년대 초 영화를 기웃대던 대학생이면 한번쯤 뒤적였을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현암사)와 랠프 스티븐슨과 장 데브릭스의 <예술로서의 영화>(열화당)의 책날개에서 그 이름과 재회했다. 도서 십진분류법에 집착하지 않는 애서가라면 누구나 정병규가 디자인한 책을 모아 책장 한칸을 새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병규의 디자인은 담백하고 지적이다. 지금 당신이 입장할 세계는 이런 곳이라고 속삭인다. 타이포그래피(서체)의 표현력에 대한 그의 믿음은 견고하다. 제목의 활자들이 각기 독립해 시의 울림을 전하는 <창비시선>의 표지나, 사진이 표지 아랫목에 들어앉고 ‘굿’ 단 한 글자가 그 위에 오연히 버티고 선 스무권의 <굿> 시리즈(열화당)는 대표적 예다. 열화당의 이기웅 대표는 <굿>의 표지를 가리켜 “글자가 이 책의 깃발”이라고 표현했다.

정병규 디자이너를 만날 날을 기다리며 서점에 들른 나는 자신이 얼마나 둔감한 독자였는지 새삼 통감했다. 색과 생김새, 가로 세로의 폭과 부피가 모두 책의 메시지였다. 거기 귀를 열면 인문이니 기술이니 서가의 안내판을 보지 않아도 잘못된 서가에 접어들었음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온갖 책이 빽빽이 우거진 디자이너 정병규의 작업실을 방문한 것은 오후 세시였다. “오전만 아니면 된다”고 약속에 조건을 달았던 주인이 도착하자 그제야 아침을 맞은 책의 숲이 수런수런 깨어났다. 정병규 디자이너는 대화 중에 자주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 감으면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다른 세상의 풍경을 하나하나 묘사하듯이 회고와 해석과 상상을 풀어놓았다. 언젠가 그는 “인간을 혼자 있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을 책의 미덕으로 꼽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몹시 내성적으로 들리는 그 말이 결국 책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핵에 곧장 가 닿고 싶다는 애태움의 표현이었음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밤이 이슥해서야 인터뷰를 마친 나는 정병규 디자이너가 펼쳐 보인 생각의 긴 두루마리를 간추리기 위해 내가 얼마나 대담해져야 하는지, 또한 그의 이야기를 어떤 서체로 옮기는 것이 합당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중·고교 시절 교지 편집부터 시작해 <고대신문> 편집국장을 지내셨습니다. 당시 함께 신문을 만들었던 출판사 열린책들의 홍지웅 대표님 말씀으로는 <고대신문>에서도 단편소설을 통째로 실어버리는 식의 파격을 행하셨다고 하던데요. =나이 든 학생이었기 때문에(그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처음 들어갔다가 다시 고려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남들과 다른 존재라는 의식이 강했어요. 그리고 불문과는 학년에 남자가 겨우 5명이었는데 그 소외감은 지금도 생생히 살아 있어요. (웃음) 내게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요약하라면 한마디로 ‘딴 짓하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학생 시절에는 공부와 학점이 메인인데 신문이나 교지 편집에 공을 들였고 사회에 나와 잡지사에 취직했을 때도 편집자로서 교정은 안 보고 디자인에 손을 댔어요. ‘부전공’이 없으면 ‘주전공’도 맥을 못 췄어요.

-애초 창작을 목표로 삼아 작가를 지망했다가 불문과로 재입학하면서 문학이론으로 방향을 틀고, 다시 편집으로 거기서 마침내 30대 중반에 출판 디자인 분야까지 이르는 길을 걷게 된 원인도 그것일까요? =안정될 만하면 엉뚱한 짓을 하니 가족들이 피해를 보았죠. 1996년의 북 디자인 전시회는 그런 갈등의 정점이었어요. 또 “인생을 이렇게 디자인으로 마감하기엔 뭔가 부족하잖아?”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거든요. 요즘도 마지막으로 딴 짓할 게 뭘까 생각하다가도 “아이고, 이거 또 해야 돼? 너무 피곤하지 않아?” 해요. (웃음) 그러나 역시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는 신념만큼 “내가 꼭 이것만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중요합니다. 사람이 하는 ‘딴 짓’의 정점은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일일 거예요. 인간이 태어나면 생명을 연장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 원칙인데, 그것을 안 하는 거니까요. 크게 보면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인류 문화의 틀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딴 짓하기’가 합리화되고 인정받는 현상이에요. 문자에 눌렸던 이미지, 정신에 열등하다고 여겨졌던 육체, 남자에게 억압받던 여성이 주권 회복을 하는 것이죠.

-이미 출판계에 자리를 굳히고 홍성사를 창립해 인문서적을 크게 성공시키는 전성기를 누리시고도 30대 중반에 파리 에스티엔느로 출판디자인 유학을 결행하셨습니다. =다섯 출판사 대표들이 돈을 모아서 내 유학비용을 댔어요. 그만큼 당시 출판계는 ‘문화운동’을 하고 있다는 의식이 강했어요. 그런데 유학 준비를 거의 마쳐가던 무렵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죠. 내가 유학하는 동안 한국에 남아 있을 처자식의 생활비를 까맣게 잊고 계산에 안 넣었던 거야. (좌중 폭소)

-흔히 글쓰기 단계에서 중요한 일은 모두 일어나고 편집은 단정한 포장일 뿐인 것처럼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어떤 글에서 추천하신 마쓰오카 세이코의 <지식의 편집>이란 책을 보니 편집은 모든 유기체가 수행하는 일이며 인간의 놀이, 대화, 연상, 모험 등이 모두 편집이라 정의되어 있어서 감탄했습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도 같았고요. =(웃음)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가는 거죠. 나도 성경을 읽었지만 목사님이 “이런 겁니다” 하면 새삼 깨닫잖아요? 마쓰오카 세이코는 1970년대에 이미 학술지도 대중지도 아닌 이과와 문과를 합치고 가로지르는 <유>(游)라는 충격적인 잡지를 만든 사람이에요.

-한 개체 안에 있는 것만으로는 언제나 부족하다, 모든 것은 관계 짓기의 문제라는 뜻 같기도 합니다. =여기 라이터와 담배가 있지만, 둘이 만나야 담배를 피울 수 있죠. 정당도 선거 때 다른 당과 만나야 정치가 되죠. 따지고 보면 구조주의가 먼저 가진 문제의식이지만, ‘딴 짓하기’를 확실히 주체화하고 공식화하는 것은 일본사회의 장점인 것 같습니다.

-출판 디자인에서 ‘정병규 유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아하고 서체의 표현력을 살리는 선생님 작품 특유의 시각적 스타일을 이르는 말이라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에 깐 종합적 플래너로서 디자인하는 태도에 붙여진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까요? =그런 건 실체는 없어요. 내가 왕성한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몹시 외로웠어요. 1990년 초반까지만 해도 기존 디자인계에서 내가 하는 일을 디자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광고 중심의 기업봉사형 디자인을 그래픽디자인의 본령으로 알았으니까. 하지만 광고의 특징은 물건을 만들지 않고 유통에만 신경을 쓰며 디자이너가 익명이라는 점이에요. 책, 잡지를 만들고 편집하는 것은 필자, 사진가, 디자이너가 함께 만들고 이름을 밝혀 책임을 지는 문화 생산형 디자인이죠. 그래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제일 먼저 쓴 글의 제목이 “북 디자인은 모든 그래픽디자인의 원점이다”였어요. 그러다가 제 생각을 이해하고 뜻을 같이하며 디자인으로 실천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가기 시작했어요. 1992년에 계 비슷한 것을 만들었어요. 술을 먹자니 명분이 필요하니 세미나도 하고 뒤늦게 유학을 떠나기도 했죠. 결국 그 모임이 지금 젊은 세대까지 끌어안고 36명이 가입한 SPC(Seoul Publication Designers Club)라는 단체로 진화한 것이죠. 매번 술자리에서 좋은 계획도 많이 세우는데, 민주화운동과 동시에 결의해놓고 오늘날 노무현 정권이 되도록 실행 안 한 게 많아요. 그게 또 우리(디자이너)들이잖아요? (좌중 폭소)

내가 존재하려면 책의 약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게 괴롭죠

-혹시 카뮈를 닮았다는 소리 듣지 않으십니까? =여위어서 그렇죠.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지만 그 이전부터, 그러니까 고등학교 다닐 무렵 문학은 현실에 대해 “이건 아닌데”라는 의식을 가질 때마다 어김없이 멀리서 번득이는 섬광 같은 것이었어요. 우리 시대는 김우창 선생 말마따나 궁핍한 시대여서 뜻을 품었다 하는 젊은이들은 거의 문학을 지망했죠. 다른 예술보다 돈도 덜 들지만, 자기를 표현하고 세상을 보는 틀을 문자로 형성하고 그 틀을 개선하는 힘마저 문자에서 찾았던 세대니까요.

-어제는 몇시에 주무셨나요? 조간신문을 읽고 자리에 들 만큼 야행성이라, 민음사에 입사할 당시 박맹호 사장님에게 내건 유일한 조건이 자유로운 출근 시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어제는 새벽 서너시쯤이었나? 하루의 반밖에 사회생활을 못하니까 대인 관계도 좁아지고 수입과 생산도 절반이 되어 손해가 많아요.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말도 안 되는, 게다가 시장성과 현장성이 강한 디자인 분야에서는 더욱 말이 안 되는 삶의 방식이죠. 알면서도 내가 관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놓치기 싫은 끈이 있다보니 뭔가 읽고 찾으며 밤을 새우게 돼요.

-선생님이 보시는 밤 시간의 고유한 매력이 있겠네요. =밤에 사람이 혼자 있으면 오만해질 수가 있어요. 일상에서 계속 마모된 호기심을 끄집어낼 수 있죠. 호기심이 끝나면 인생이 끝나는 거라고 늘 생각해요. 남녀간의 호기심이 끝나면 청춘이 끝났다고들 하잖아요? 내가 요즘 생각하는 밤 시간이 따로 있어요. 열심히 일을 해치우고 1년의 한두달을 완전히 일에서 떠나는 은유적 밤 시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한 사회가 잘 돌아가려면 오늘이 전부가 아닌 꿈을 꿀 수 있는 시간과 용기를 가져야 할 것 같아요. 밤샘 버릇은 나의 대책없이 오만한 여유 부리기죠.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문득) 담배적인 세계가 있는 것 같아요. 글의 세계와 비슷한 세계….

-선친께서 직업군인이어서 할머니 댁에서 성장하다가 책과 가까워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다수 어린이들에게 책은 각별한 친구지만 어른이 되면서 멀어지곤 합니다. 책과 떨어져 지낸 시기가 한번이라도 있었습니까? =불행히도, 없었습니다. 책을 증오해 보려고 내 자신을 애써 꾄 적도 많아요. 책만 봐야 하고 책만 만들어야 하다니 답답하잖아요? 가장 괴로운 건 책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이놈의 약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야 내가 존재 이유가 있으니까. 대안을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지적하는 약점을 사람들이 안 믿어주니까. 그러나 반대로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서 책의 진정한 고마움을 모르기도 했던 것 같아요. 대장간에 식칼이 없듯이. 20대 문학청년 시절 이후 그렇게 지내다가 모든 것을 다 뿌리치고, 그저 책과 독자로서 다시 만나기 시작한 것이 1994년이에요. 예전에는 잘 못 만들었다 싶은 책은 읽기도 만지기도 싫었는데 달라졌죠. 민주적으로 바뀌었다고 할까. (웃음)

-그렇게 사랑하는 책인데 훔친 적은 없으십니까? =나도 모르게 빌린 책을 잊고 돌려주지 않았다가, 뒤늦게 깜짝 놀라 주인이 오히려 낯설어하지 않을까 싶어 못 준 책은 있어요. 반면 훔침을 당한 일은 굉장히 많아서 장서의 1/3은 그렇게 없어졌어요. 몇년이 흐른 뒤 어떤 페이지가 필요해 뒤적이다보면 파본인가 싶을 만큼 요령껏 책장을 오려간 일도 있어요. 책 자체만 생각하면 초탈해야죠. 책이 없어지면 어떻고 어디 가 있으면 어떻겠냐고.

-애서가들은 서가가 넘쳐서 책을 어쩔 수 없이 처분해야 하는 위기상황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이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주죠. 도서관에는 기증 안 합니다. 나는 도서관을 싫어해요. 문헌정보학과도 별로 안 좋아하죠. (웃음) 물론 도서관의 존재 이유는 긍정하지만, 도서관이란 책의 존재감이나 물질성은 보지 않고 내용에 실려 있는 기호만 보관하는 곳이거든요. 새 책이 오면 겉표지를 벗겨 신간 안내판에 압핀으로 꽂아놓지 않습니까? 합법적으로 책을 학대하는 곳이니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도서관은 적이죠.

-소문난 야구광이십니다. 스포츠 중에서도 야구에 특히 끌리는 이유를 기질과 연관해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도 한때 야구를 무척 좋아했는데 돌아보면 틈틈이 갈등하고 생각할 여백이 있는 점이 좋았던 것 같아요. =바로 그거예요. 축구나 다른 경기를 보려면 그 경기와 내가 빨리 합치하고 동체가 돼야 해요. 스포츠뿐 아니라 연극도, 영화도, 콘서트도 사람을 끌어당겨 정신을 잃게 만들죠. 그런데 야구는 그걸 거부해요. 가까이 가려면 “넌 거기 계속 떨어져 있어. 지금 넌 생각을 할 때야”라고 밀쳐내요. 그래서 내가 나의 주인으로 머물 수 있죠. 세계는 야구를 하는 나라와 하지 않는 나라로 나뉘어요. 축구는 월드컵이 가능하지만 야구의 월드컵은, 지난번 WBC를 치르긴 했지만 힘들 거라고 봐요.

디자이너는 이제 새로운 저자로 떠오르고 있어요

-출판 디자이너, 책 디자이너, 북 디자이너 중에 어떤 호칭이 좋다고 보세요? =출판 디자이너, 즉 퍼블리케이션 디자이너가 맞죠. 교과서적으로 말하면 출판 디자인 범주 아래 책, 잡지, 신문, 작은 인쇄물(small printed matters)이 하위 장르로 있고 요즘 다섯 번째로 웹 디자인이 추가되는 거예요. 나는 한 디자이너가 책, 잡지, 신문을 모두 만들 수 있고 또 우리 사회가 그런 주문을 하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선생님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문자를 접하는 책의 물성(物性)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거꾸로 뉴미디어 시대가 도래해 책 이외 수단으로 텍스트를 볼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책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와 동료들도 지금 종이 잡지는 왜 필요하고,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창간 초에는 하지 않았던 자문을 자주 합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벌써 대답이 많이 가시화된 단계라는 의미겠죠. 대립하는 항으로 정지된 것과 움직이는 것, 흑백과 컬러, 아날로그와 디지털, 종이 위의 정보와 모니터적 정보를 말할 수 있겠죠.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관계는, 영화가 등장했을 때 사진이 받은 충격에 비할 수 있을 겁니다. 처음엔 사경에 몰렸다가 얼마 뒤 움직이는 영상이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사진이 깨달았듯이 디지털의 결점을 발견해 전략화, 가치화하는 새로운 아날로그가 탄생한 거죠. 생사를 가르고 신을 만들어내던 책이 독점 분야를 디지털에 내주고 반성을 한 거죠. 사전 같은 정보는 이제 디지털에 줘야 하고 책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해야 해요. 새로운 아날로그란 쉽게 말해 손의 부활이에요. 계속 정보와 손의 거리가 멀어지는 방향으로 발전한 문명사의 변화입니다. 다른 매체는 에너지만 연결시키면 절로 정보가 나오지만 책은 인간의 손으로 열지 않으면 안 돼요. 결코 신속하고 편리하지 않죠. 얼마나 오만한 매체인지 몰라요. 잠시라도 인간이 주의를 돌리면 삐쳐서 제자리로 돌아가버리죠. 중간을 빼먹어도 줄거리가 이해되는 TV 연속극과 달라요. 새로운 책은, 책이 촉각의 매체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달은 책이에요. 여태 나는 시각매체입네 주장해온 책이 절에 가서 반성하고 내려온 셈이죠.

-유성영화가 등장했을 때 비로소 영화에서 침묵이 인식됐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하네요. =그렇죠. 21세기 디자인의 큰 변화는 두 가지예요. 첫째, 세계 유수 디자이너의 움직임에서 보듯, 디자인의 주요 흐름은 놀랍게도 책- 신문과 잡지를 포함한- 의 세계로 모이고 있어요. 둘째는 타이포그래피 시대의 개막이에요. 인문학에서는 활자가 이미지를 억압했다는 논리를 갖고 있지만, 디자인 세계 안에서는 반대로 이미지가 활자를 폭력적으로 억압해왔거든요. 역사상 지금처럼 활자가 기고만장한 시절이 없었죠. 지금까지 활자는 우편배달부처럼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주임무였는데 디지털 혁명에 의해 스스로 내용에서 빠진 것을 표현하는 주체적 기능을 갖기 시작한 것이죠. 디자이너는 이제 새로운 저자로 떠오르고 있어요.

-한글은 디자인적으로 그리 평판이 좋은 문자는 아닌 걸로 압니다. 한글이 가진 디자인적 가능성에 대해서 좌절하신 적은 없습니까? =물론 한글의 제약된 표현 가능성에 힘들기도 했죠. 그러나 한국 디자인이 서체를 만들어온 세월은 서양에 비해 아주 짧은 30년에 불과해요. 상대적으로 빠르게 발전했죠. 그리고 혁명이란 구체제를 청산하고 출발점을 동일하게 만들어버리는 게 특징 아닙니까? 디지털 혁명은 활자에 대한 우리의 생각, 가치를 서양과 비슷한 선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하는 바탕입니다.

-선생님이 만드신 책으로부터 명조체와 고딕체라는 대단히 전통적인 서체의 아름다움을 깊이 생각하고 자주 쓰시는 디자이너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글 활자의 종류와 미가 서양에 비해 부족하다는 한탄만 해선 소용이 없으니까요. 누가 대신해줄 것도 아니고. 그래서 기존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아끼고 잘 쓰도록 노력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의무예요. 디자인은 흔히 말하는 예술이 아니어서 비용, 시간, 원고의 주어진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거든요. 거꾸로 말해 모자란 녀석이라도 아끼고 사랑하자는 뜻에서 (명조체, 고딕체에) 어찌보면 과도하게 철저했고 후배들에게 비판을 듣기도 했지요.

상업적 욕망으로 책을 만든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죠

-출판 디자이너가 전시회를 가질 기회는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점의 신간 코너가 책 디자이너에겐 전시 공간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서점에 가면 어떻게 움직이십니까? =서점이 전시장이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지만 막상 서점에 가면 내가 만든 책이 있을 법한 코너는 피해요.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싶은 책은 몽땅 사들여 없애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 서점 가기가 무섭죠. 요즘 후배들 디자인은 아주 훌륭해서, 5∼10명은 국제적으로도 일급이라고 평가해요.

-작고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한국어를 모르면서도 라디오 영화 광고에 쓸 한국 성우들의 음성까지 직접 듣고 선택하더군요. 저자 중에도 그런 분이 있겠죠? 저자와의 긴장관계는 편집 디자이너에게 고충이라기보다 작업의 일부일 텐데, 어떤 식의 줄다리기를 벌일 때 가장 즐거우신가요? =그야 내가 이겼을 때죠. (웃음) 사진가 강운구 선생과 취재 단계부터 함께 작업한 <경주남산>(열화당 펴냄)이 기억에 남아요. 서로 고집을 피우다 두어달 사이가 틀어졌죠. 알고 보니 남산을 어디로 들어가 뭘 보고 어디로 나가야 가장 잘 보는 것인가에 관한 견해부터 여러 이견이 있었어요. 내 생각에 사진집에서 중요한 건 반드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주인공은 없어도 이미지들끼리 맺는 관계가 이야기를 이뤄야 하죠. 그런데 강운구 선생은 일단 납득한 뒤에는 꼭 필요한 사진을 슬쩍 추가로 찍어다주기까지 했어요.

-올해 북 디자인전을 연 영월의 책 박물관을 오랫동안 돕고 계십니다. 또, 베네딕도 미디어에서 임세바스찬 신부님이 내신 타르코프스키, 베리만 등 예술영화 비디오의 재킷도 실비로 디자인해주셨다고 기사를 읽었습니다. =아, 신부님 보고 싶네. 그분이 설립한 분도출판사를 통해 신부님을 처음 알게 됐는데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이 한국에 수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신부님이랑 둘이서 어찌나 흥분했던지! 엄청 많이 팔릴 줄 알았는데, 웬걸? (웃음) 실비라도 받은 건 그분이 무료로 일을 청탁하길 싫어하셔서였어요. 책 박물관은 개관 이듬해부터 7년 동안인가 카탈로그, 초대장 등을 만들었어요.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하는 부분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 한국 문화 현실이기도 합니다.

-선생님 작품 중에 이윤기 선생님이 쓰고 정재규 화백이 그린 에세이집 <어른의 학교>나 <글 그림 박고석> 같은 책들은 종이의 촉감이 따뜻하고 삽화에 내준 공간이 넉넉해서 느낌이 특별했습니다. =그런 디자인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돈을 안 받았기 때문이에요. 출판사도 미안하니까 내가 자유롭게 재료를 쓸 수 있게 해준 거죠. 1996년 낸 작품집에 실은 책 중 1/3은 무료로 작업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좋은 원고와 인연을 맺을 수 없고, 안 팔릴 책인 것을 뻔히 아는 내가 돈까지 내라고 못한 것이죠.

-수많은 책을 디자인하셨습니다. 디자이너의 브랜드를 인지하지 못하는 독자들은 몰라도 본인만이 아는 모험의 순간이랄까 대담한 파격의 예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박완서 선생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의 표지는 큰 글씨와 원색을 선호하던 당시로서는 단색에 작은 글씨로 잔잔하게 간 파격이었어요. 나는 소설의 내용을 알고 박완서 선생과 그분이 그 소설을 쓴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디자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업팀에서 사전조사 결과가 나쁘다고 문제를 제기했어요. 책에 대한 사전조사는 책을 망치는 일이에요. 조사란 조사자의 생각대로 답이 나오게 돼 있거든. 큰 제목, 작은 제목 놓고 뭐가 더 눈에 잘 띄냐고 물을 필요가 없잖아요? 이런 경우 진심으로 연애편지를 썼는데 상대가 읽지도 않을 경우와 비슷한 고통을 느껴요. 결국 사장이 책임지고 나서서 내 안대로 표지를 만들었고 베스트셀러가 됐죠.

-저처럼 평범한 독자들은, 이동할 때나 여행갈 때 손에 친근하게 감기는 페이퍼백과 문고판이 더 많았으면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양장본이 너무 비싸기도 하고 두껍고 날선 종이에 다치는 일도 잦고요. =책은 양장본이 기본입니다. 미국의 경우 양장본이 어느 정도 팔리면 페이퍼바운드 반양장본이 나오죠. 한국은 단행본이 자리잡던 70년대 양장본 문화가 생겼어요. 그러다가- 반론하는 후배들도 있겠지만- 갑작스럽게 출판시장이 커진 거예요. 1980년대 초만 해도 5만부가 나가면 베스트셀러라고 모여서 술을 마셨는데 이제 100만부 단위잖아요? 내가 7, 8년 전만 해도 한국의 책값이 너무 낮다고 주장한 장본인인데 지금 한국 책값은 세계에서도 비싼 쪽이에요. 그래서 디지털 미디어와 경쟁하는 지금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책을 너무 쉽게, 상업적 욕망에 기울어 만든다는 점이에요. 지금 인문학 단행본이 2만원대로 올라서서 일본과 맞먹는데 종이를 비롯해 일본은 제작에 우리의 서너배를 투자해요. 양장본 비율이 높아서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안 만드는 게 문제인 거죠. 우리 책은 가장 대중적 매체인 신문도 꺼리는 뒷장이 비치는 종이를 쓰기도 하고, 실로 꿰매는 것이 원칙인 양장본을 90% 이상 그냥 풀로 제본해서 펼치거나 시간이 흘렀을 때 갈라지는 지경이에요. 자동차에 바퀴를 세개만 다는 형국이죠. 편집자들이 이런 기본을 지키고 때로는 싸워야 합니다.

전문가보다는 내 이름으로 어떤 다양함을 떠올려지길 바라요

-혹시 영화를 볼 때 자막의 위치, 서체, 크기가 거슬리지는 않으십니까? =처음에는 매우 거슬렸는데 이제는 포기했어요. 아무래도 오른쪽 세로쓰기보다 아래쪽 가로쓰기 자막이 바람직하죠. 나는 영화란 음악회와 달리 확 충동이 일 때 보러 가는 재미가 크다고 봐서 예매를 안 해요. 언젠가 그렇게 암표를 사서 직원들과 <플래툰>을 봤는데 들어가 보니 앞줄이라 누구는 왼쪽 영상만 보고 나는 오른쪽 자막만 보다 온 적이 있어요.

-<한겨레> <조선일보> <문화일보> 등 일간지들이 종이를 바꾼다거나 지면을 혁신할 때 선생님의 자문을 자주 구한 것으로 압니다. 어떤 문제를 보셨습니까? =기자들 만나면 현재 신문이 매체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터인데 왜 그리 아직 오만하냐고 묻곤 해요. 뉴스를 가장 먼저 접한다고 정보가 제일 많고 해석력이 제일 뛰어난 건 아니잖아요? 예컨대 <씨네21> 기자가 먼저 영화 본다고 영화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되죠? 우리 신문은 뉴스를 독점하던 시대의 의식을 그대로 갖고 아직 남의 말을 안 듣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정말 대단하다고 해도 모두에게 대단할 수는 없으니 모르는 부분을 인정해야 하는데 말로는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토론도 해놓고 결국은 엉뚱한 결정을 내려요. 서양의학에 몸을 못 맡기던 옛 양반 규수처럼 병들었는데도 의사를 못 믿고 약방에서 약이나 사다 먹는 식이죠.

-“내 오십대의 시작은 마치 과음하고 냉방에 잠이 들어 겨우 술이 깬 비몽사몽의 아침 같았다”고 어느 에세이에서 쓰셨습니다. 그간의 삶이 술자리와 같았다는 뜻일까요? =술 먹고 취해서 잘 때는 모르는데 새벽에 눈 떠 술이 깨면 춥잖아요? (웃음) 마흔은 언제 넘었는지 바삐 넘어갔는데 쉰은 달랐어요. 그해 설을 도쿄에서 맞았는데 방을 같이 쓴 강운구 사진가가 “오십된 기분이 어때?”라고 묻는 말이 비수처럼 꽂혔어요.

-책을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에 거꾸로 내가 이런 사람이 됐구나 싶은 부분이 있습니까? =책을 만들되 누군가의 손을 통해 만드는 출판사 사장, 편집자, 기자는 많은 사람을 만나는 반면, 책을 직접 ‘만드는’ 나는 생활 영역이 계속 좁아지는 느낌이 있어요. 둘째로, 책에 대한 애증을 반복하다 보니 진짜 책 맛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언론이나 교수들이 피상적으로 책이 중요하다, 읽어야 한다, 책의 시대가 가고 정보의 시대가 온다 무책임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통탄스러워요. 책의 중요성은, 심지어 피상적으로 강조해서도 안 돼요. 한국에서 무엇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책을 맹목적으로 읽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시키는 행위예요. 차라리 중학교 갈 때까지 책읽기를 강요하지 않는 법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애들이 어른 몰래 책을 보고 “책을 맘껏 볼 열다섯 살을 기다리며 사노라”고 일기장에 쓰는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본인을 한권의 책에 비한다면 어떤 책에 가까울까요? =단행본이 아니라 책이면서 잡지인 무크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한 주제로 시작하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상대를 억지로 잡아두는 책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문가로 알려지기보다 내 이름이 어떤 종류의 다양함을 떠올리게 하길 바라요.

-그 책의 새로운 장을 쓸 계획이 있으십니까? 말씀 중에 언뜻 집필과 포스터 전시회에 대한 뜻을 비치셨는데요. =남들이 디자이너라고 생각하는 내가 책을 쓰는 것도 딴 짓이고, 북 디자이너로 불리는 내가 포스터 디자인하는 것도 딴 짓이겠죠? 그런 것이 없다면 난 아마 은퇴한 것일 테죠. 50대에 내가 행한 가장 중요한 일이 한겨레 문화센터 강의였어요. 가르치고 새벽까지 학생들과 술 마시며 토론하는 일을 재개하는 것도 장차 꿈이에요. 사람들은 술자리를 삶의 쉬어가는 자리 또는 어쩔 수 없이 닥치는 행사로 여기는데, 술자리는 술자리 나름대로 독립된 기능과 따로 할 일이 있더라고요. 그것이 빠지니 도무지 나사가 안 맞아요. (애주가인 그는 건강이 나빠져 술을 잠시 끊었다.) 또 하나, 디자이너가 조로(早老)하는 우리 사회의 경향에 거스르고 싶어요. 디자인은 감성의 일로 치부하며 합리성과 거리를 두는 이상한 나라가 됐는데, 디자인이야말로 삶과 체험에서 나와야 하거든. 오십 되던 해 전시회를 한 것도 쉰이라는 나이와 디자인을 아무 관련없다고 생각하는 사회에 도전하고픈 마음에서였어요. 배우, 스탭과 더불어 나이 들어가는 감독이 있어야 하듯, 책의 세상에서는 저자와 같이 나이 들어가는 디자이너가 있어야 해요. 나도 열심히 하면 그런 저자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힘도 들지만 이젠 내가 버틸 때까지 버틴다는 걸 사람들이 다 알았으니, 좀 덜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