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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님비
2001-02-16

도정일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한국인에게 지진이란 언제나 다른 나라의 재난, 우리 땅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그러므로 신경쓸 필요없는 어떤 막연한 불운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한반도는 용케도 지진 면역지대 같아 보인다. 자연의 신은 한반도에 ‘기름’ 한방울 주지 않은 대신 지진도 주지 않는다. 스스로 경험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인간의 이해능력은 극히 빈약하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어서, 다른 나라 지진 피해 소식은 우리에게 그저 몇개의 차가운 추상적 숫자로 그친다. 신문방송의 보도를 접하고도 우리의 반응은 “응, 그랬어?” 정도다. 이런 반응의 밑바닥에는 “우린 아냐, 우린 괜찮아”라는 안도감이 깔려 있다. 영원히 안전하고 절대로 꺼질 일 없어보이는 단단한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 행복한 사람들의 귀에는 주식시세 내려앉았다는 뉴스는 큰 뉴스일 수 있어도 어디서 땅 꺼졌다는 소식은 소식도 아니다.

지난 1월26일 인도 서부 해안 구자라트주(州) 일대를 한순간 납작하게 만든 지진은 2년 전의 터키 지진 때처럼 지진의 정치학 비슷한 것을 보게 한다. 지진은 평등의 위대한 강요자이다. 인도에서 들려오는 외신(外信)들을 보면 진앙지에 가까운 피해지역의 경우 부잣집도 내려앉고 가난뱅이 집도 내려앉아 부자와 가난뱅이들이 동시에 길바닥으로 나앉는 신세가 되고 더운 죽 한 그릇, 담요 한장을 얻기 위해 다투어야 한다. 만인은 법 앞에서만 평등한 것이 아니라 지진 앞에서도 평등하다. 하늘(지붕)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때 빈부는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같은 운명의 평등한 피해자가 된다. 인도 같은 카스트(신분)사회에서도 지진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다. 다만, 부자들의 경우에는 피해로부터의 탈출 속도가 좀더 빠르다는 차이가 있다. 지진의 평등정치학 다음에는 불평등의 정치학이 이어진다.

지진의 심리학, 또는 지진의 철학 같은 것도 있다. 인간의 일상은 몇개의 의심할 바 없는 기본적 믿음 위에 지탱된다. 내가 먹는 밥, 마시는 물에 적어도 독이 들어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그런 것의 하나이다. 이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땅의 단단함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 덕분에 우리는 매번 지팡이로 땅을 두드려보며 걷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 확신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것이 지진이다. 어떤 외지 논평자의 말처럼, 이번 인도 지진 피해자들은 “땅의 견고함에 대한 믿음을 한동안, 어쩌면 영원히, 상실할지” 모른다. “왜 이런 변이 우리에게 닥친 겁니까?”라고 피해자들은 절규한다. “땅의 어머니 신에게 매일 기도한다”는 여자도 있다. 땅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인간의 일상을 뒤흔드는 무서운 불안심리를 조성한다. 지중해지역의 고대 지진사를 소상하게 알고 있었던 플라톤은 어쩌면 ‘믿을 수 없는 땅’에 대한 불안 때문에 “영원히 견고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지상에 없다. 그것은 다만 하늘에만 있다”는 주장 위에 그의 철학체계를 세우려 한 것인지 모른다.

지진의 정치학, 심리학, 철학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것은 어떤 지혜, 어떤 겸손, 어떤 자각이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라는 이름의 땅은 지금처럼 인간에게 개똥 취급 당하고 사정없이 쓰레기통이 되면서도 영원히 인간을 무사하게 받쳐줄까? 천만의 말씀이다. ‘타이타닉’호 승무원들이 빙산과의 충돌 위험성을 경고하는 전신 메시지들을 무시한 것은 “이 배는 절대로 가라앉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고, 그런 시시한 메시지보다는 처리해야 할 더 중요한 전신들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침몰한다. 지구는 지금 그 타이타닉과 흡사하다. 수없이 많은 경고 신호들이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 승객은 다른 메시지들에 정신이 팔려 침몰 위험신호에는 코방귀도 뀌지 않는다. “우린 괜찮아”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지구 침몰은 완벽한 평등 파멸의 순간일 것으므로 인간에게는 갈아탈 배도, 나앉을 길바닥도, 복구할 오두막도 없다.

이른바 ‘님비’(Nimby) 현상이란 이를테면 쓰레기 소각장 같은 것은 “우리 동네에는 안 돼”(not in my backyard)라고 말하는 현대인의 자기 예외주의를 지칭한다. 그 ‘님비’의 의미를 달리 풀면 “우리 동네엔 지진 같은 거 없어. 우린 아닐 거야. 우리는 안전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지구의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 지진 이상의 지진, 믿을 수 없는 땅, 평등 공멸의 순간을 인간은 지금 제 손으로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 파멸 항로의 승객이고 공범자이면서 “나는 아냐”라고 말하는 예외주의-이 턱없는 예외주의가 ‘내 마음의 님비’이다.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jidoh@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