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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은 조용히, 소리소문없이”
2001-02-16

영화인협회 이사장 3번째 당선된 유동훈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고 부르짖은 건 독일만이 아니다. 세계영화사에서 신진 영화인들은 늘 구세대를 극복하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신구세대의 피할 수 없는 갈등이라는 측면에선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90년대 들어 신인감독들의 대거 등장과 자본환경의 변화는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영화인들에게 느닷없는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프랑스나 독일과 달리 충무로에서 신구세대의 마찰은 미학적 차이에 기인한 게 아니었다. 젊은 영화인들은 새로운 환경에 맞는 정책결정과 집행을 원했지만 사사건건 원로 영화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스크린쿼터감시단, 등급외 전용관, 영화진흥위원회 구성 등이 그런 문제들이었다. 그결과 영화인을 포괄하는 단체는 영화인협회(이하 영협)와 영화인회의로 갈렸고 영화진흥위원회가 주최하는 포럼에서 폭언이 오가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영협은 보수성향을 대변하는 단체로서 젊은 영화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곤 했다. 특히 지난 96년 <애니깽>에 대종상을 몰아준 사건은 영협의 이름에 결정적인 먹칠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최근 유동훈(61)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이 새로운 영협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24년째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을 하고 있으며 영협 이사장에 3번째 당선된 그는 어떤 사람인가? ‘선거의 귀재’라는 평판은 혹 기회주의자를 뜻하는 게 아닐까? 과연 그는 벌어질 대로 벌어진 세대간 갈등을 봉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취임하자마자 올해 대종상영화제를 영화인회의와 공동주최한다고 밝혔다. 앙숙으로 여기던 단체를 포용하는 것으로 신구세대 화합의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개혁성향의 보수주의자’라 자처하는 그와의 인터뷰는 ‘건강한 영협이 기대된다’는 희망을 보여준 자리다.

=우선 영협 이사장이 된 거 축하한다.

-뭐 축하받을 일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이런 일 해서 좋을 게 없다. 영협 이사장을 맡은 게 이번이 3번째인데 왜 3번씩이나 이 자리에 앉아야 되느냐, 당위성에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영화인들이 날 뽑은 이유는 아무래도 그간 급격한 세대교체 속에 불거진 갈등을 무난히 해소할 사람이 필요해서인 것 같다. 내가 지난해 영화축제도 영화인회의와 함께 주최했고, 화합하는 느낌을 준 것 같다. 광열쇠를 가진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열쇠 안 주려고 하면 분란이 생기게 마련이다. 어느 시기에는 광열쇠를 내줘야 집안이 평화로워지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젊은 영화인들도 적극 포용하려고 한다.

=그간 영협은 지극히 보수적인 단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무엇보다 영화계 내부 신구갈등을 어떻게 해소할지 궁금하다.

-어렵게 생각 안 하는 게 세대간 갈등은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있게 마련이다. 어떤 조직이든 젊은층이 선배들을 밟고 올라서게 되는데 문제는 그 과정이 얼마나 부드럽게 되느냐에 있다. 버틸 사람도 조직으로 버티는 게 아니라 능력으로 버티고, 치고 올라오는 젊은이들도 조직적으로 저항할 게 아니라 실력으로 인정받고 그러면 된다. 젊은 영화인들이 영화인회의 같은 조직을 만들어서 영화계 원로들의 공분을 산 것은 양쪽 다 잘못이 있다. 원로들도 그걸 우릴 몰아내려고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으면 아무 문제없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고 젊은 영화인들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면이 있다. 양비론이 되겠지만 역사발전이란 게 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게 아닌가.

=이번에 대종상영화제를 영화인회의와 공동주최하기로 했는데 영협 내부에서 이런 결정에 반대하는 입장이 많지 않았나.

-물론 내부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설득이 됐다. 어차피 대종상영화제 수상자는 영화인회의에 속한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는 줄 테니 너희들은 받아라, 식으로 되면 꼴이 우습지 않겠냐고 했다. 지난해 영화축제를 공동주최할 때도 영협 내부 반대가 심해서 나 그만두겠다고 그런 적이 있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쳐도 될까말까한데 죽여라 살려라 해서야 되겠는가. 원래 개혁이란 건 조용히 해야 한다. 강력한 슬로건 내걸고 그러면 금방 저항에 부딪힌다. 자연스럽게 소리소문없이 일하는게 좋지, 요란하게 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씨네21> 충무로작가열전에서 시나리오 작가 심산씨는 ‘선거의 귀재’라고 표현했던데 20년 이상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을 계속하고 3번이나 영협 이사장이 된 비결은 어떤 건가.

-지금 24년째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날 독재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독재자라면 이렇게 오래 못한다. 작가협회 회장은 지금까지 한번도 경선이 없었다. 37살 때 처음 회장이 됐는데 회장된 지 3달 만에 쿠데타 음모가 한번 있었다. 그때 그런 움직임을 보고 이건 뭔가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유가 뭔지 생각해봤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명언인 게 날 몰아내려는 사람들 입장에 서서 그들 얘기에 귀기울이니까 문제가 해결됐다. 내가 대단히 명예욕이 강하거나 다른 욕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경제적으로도 가난하고.

=영화인이 영협과 영화인회의로 양분돼 반목하게 된 데는 스크린쿼터감시단이나 등급외 전용관 같은 문제에서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간 영협이 현장 영화인들의 바람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감시단 문제는 감시단에서 전 김지미 이사장에게 물러나라고 하는 바람에 불거진 일이다. 내가 영협 이사장할 때는 영협이 감시단을 지원하도록 만들었다. 감시단이나 등급외 전용관이나 나는 필요하다고 본다. 영협 안에서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못하는 일, 다른 사람이 해주면 좋지 않냐고 말하곤 한다. 영진위 위원 인선 문제도 그렇다. 영협이 모든 걸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물론 지금은 워낙 젊은 영화인 일색이라 상당부분 조화가 깨져 있는 게 오히려 문제다. 최근 영진위 위원 자리에 빈곳이 몇개 생겼는데 가능하면 원로 중에 추천해볼 생각이다.

=기존 영협과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스스로 보수주의자라 생각하나, 개혁인사라고 생각하나.

-개혁이란 게 보수주의자가 개혁성향을 갖고 있으면 성공확률이 높다. 개혁 일색이면 저항이 세력화돼서 어렵다. 보수주의자들은 나보고 간첩 같다, 양다리 걸친다고 하기도 하지만 난 그런 내 자신을 좋게 생각한다.

=영협에서 추진할 새로운 사업들은 어떤 것인가.

-첫째는 표준계약관행 도입이다. 시나리오작가협회에서 먼저 시범을 보이면 다른 협회들도 따라올 거라고 보는데 협회가 노조적 성격을 갖도록 하자는 얘기다. 저작권 문제를 협회에 일임하면 협회가 제작자와 교섭하고 계약하는 걸 대행해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필름오피스 사업이다. 이미 부산에선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로케이션 매니지먼트나 컨설팅 같은 일이다. 필름오피스는 사실 부산보다 영화사가 집중돼 있는 서울이 시급하다. 촬영 때 도로를 막아주고 경찰을 동원하고 각종 허가를 받아내고 하는 일을 대행하는 거다. 이미 서울시, 영진위, 관광공사 등과 추진위원회를 만들어서 1차 회의를 했다. 다음은 영화회관 또는 영화센터 건립인데 지금 있는 영상벤처빌딩은 단순한 사무실 기능밖에 못 한다. 첨단시설을 갖춘 센터가 필요하다는 데 영진위나 영협이나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네 번째는 복지재단을 영화재단으로 만들어서 영화계 종사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는 일이다. 영화인은 어디 가서 재직증명서도 쉽게 못 받고 의료보험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재단이 생기면 저리융자나 학자금융자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표준계약관행이라는 걸 쉽게 설명하면 어떤 건가. 표준계약서를 만든다는 건가.

-작가협회의 예를 들면 저작권집중관리제도다. 예를 들어 음악은 음악저작권협회에서 저작권 관련업무를 전부 대행하는데 작가협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원래 저작권법에 따르면 작가는 매체가 변할 때마다 저작권을 청구하도록 돼 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비디오로, 비디오에서 TV로 옮겨갈 때마다 저작권료를 더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어떤 제작자도 그렇게 계약하지 않는다. 개인은 약하니까 작가들이 그냥 넘어가는데 협회가 일을 맡게 되면 불공정한 이런 계약관행이 없어질 것이다. 당장엔 제작자들이 손해보는 일이 되겠지만 작가가 제대로 대접받으면 결과적으로 영화에 도움이 된다. 제작가협회, 영화인회의와 함께 현재 표준계약서를 만들기 위한 협의를 하고 있다. 작가협회에서 이게 정착되면 배우협회나 촬영감독협회 같은 다른 단체도 자연스럽게 표준계약서를 만들 것이다. A급 배우들 개런티 올리는 데 필요한 게 아니라 예를 들면 배우들을 위해 화장실 딸린 차가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조항을 넣는 식이다.

=대종상영화제는 어떻게 치를 생각인가. 올해 처음 영화인회의와 공동주최하게 됐는데.

-4월이나 5월로 예상하고 있다. 본상 시상식에 앞서 영화축제를 열어서 ‘대종상의 달’이 되도록 하겠다. 아예 예심을 없애고 영화축제기간 동안 관객설문조사를 해서 본선진출작을 가리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예심기능을 대중에게 맡기면서 폭넓은 관심도 유도하고 불필요한 절차도 줄이는 게 좋지 않나 싶다. 보수적, 권위적 성격의 영화제에서 모두가 참여하는 영화제로 바꿔 갈 생각이다.

=개인사에 대해 좀 물어보자. 어떻게 시나리오 작가를 하게 됐나.

-집안이 가난했는데 공부를 잘하는 편도 아니어서 별뜻없이 서라벌예대 영화과에 들어갔다. 60년대였으니까 감독하려면 연출부로 한 10년 생활해야 하는 시기였다. 집안 형편으로 보면 연출부로 10년씩 돈 못 버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쓰자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도 혼자 시나리오 공부를 했지만 작가로 입봉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다. 어쨌든 충무로로 가야 된다는 생각에 어머니와 동생들 앞으로 편지 한장 달랑 써놓고 집을 나왔다. ‘3년만 기다려달라. 출세해서 돌아오겠다’는 내용이었는데 정말 3년 조금 못 돼서 작가가 됐다. 첫 작품이 정진우 감독의 <춘희>였는데 당시 관객동원을 28만명쯤 한 히트작이었다.

=무작정 충무로에 갔는데 어떻게 3년도 안 돼서 데뷔하게 됐나.

-충무로에 가면 예전엔 영화인들이 자주 가는 청맥다방이라는 데가 있었다. 거기서 우연히 나한봉 작가를 만나서 같이 일을 시작했다. 파트너 겸 조수로 일하면서 정진우 감독 영화 시나리오를 많이 썼다. 한번은 나한봉 작가가 아파서 내가 대신 썼는데 그게 정진우 감독 눈에 띄어서 <춘희>를 맡게 됐다.

=88년 직배반대운동을 할 때 9개월간 감옥살이도 했는데.

-당시 직배저지운동을 하다 구속되니까 검사가 해도 안 될 일을 왜 하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이렇게 해서 직배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직배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지만 훗날 사람들이 우리 선배들은 백기투항했다고 말하지 않게 하려면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냐고. 난 그때 투쟁이 의미없다고 보지 않는다. 미국영화에 대한 저항감이 어느 정도 각인됐고 그게 한국영화 살리기에 일조했다고 본다.

=지금 영화계나 작가들에게 절실한 게 뭐라고 생각하나.

-영화계 전체에 희망하는 것은 변별성과 보편성이 함께 가는 것이다. 보편성 없는 영화는 잘될 수 없다. 보편성이라는 건 공감대인데 지나치게 변별성만 앞세워선 힘들다. 타란티노 영화도 보면 보편성에 기반한다. 일본도 보면 새로운 영화가 많이 나오지만 결국 보편적인 영화가 주도하고 원로들이 계속 영화를 만든다. 우리는 쉰살만 돼도 은퇴해서 다양성도 없어지고 보편성도 자꾸 잃어버린다. 작가들한테는 희망이 중요하다는 얘길 많이 한다. 나한테 재능이 있을까 없을까 고민하는 친구들을 많이 접하는데 내가 그렇게 작가생활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인간에겐 어느 정도 재능은 있다고 본다. 그걸 개발하자면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운동선수들도 겁나면 못한다. 선거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배우도 연기가 두려우면 못하게 마련이다. 영화해서 잘살 수 있다, 이름을 남길 수 있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으면 버티기 어렵다. 선배들이 할 일은 후배들이 희망을 가질 만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 아닌가 싶다.

글 남동철 기자namdong@hani.co.kr·사진 정진환 기자jungj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