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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일반이 주는 지겨움의 공포, <시간>
이종도 2006-08-22

마스크를 쓴 여자가 성형외과 문을 나선다. 세희(박지연)가 마스크 쓴 여자와 부딪치는 바람에 마스크 쓴 여자는 사진이 든 액자를 떨어뜨린다. 마스크를 쓴 여자는 세희가 성형수술을 한 뒤의 새희(성현아)다.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나뉘어 부딪칠힐 수 있을까. 또는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가 부딪칠 수 있을까. 이것은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이것은 ‘나’가 미래에 다른 ‘나’로 바뀌거나, 미래의 ‘나’가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시간의 불가역성을 예시한 것이 아닐까. 영화는 이 불가역성에 대한 도전과 실패 및 그 확인이며, 그 불가역성이 사랑을 어떻게 마모시키는지에 대한 탐색이다. 이 점에서 <시간>은 김기덕의 10년 가운데 가장 선명하고도 낯선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시간>에서 시간은 일정 구간 사이의 경과 시간이 아니라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마주칠 수 없는, 어떤 시간대와도 호환할 수 없는, 필름 돌리듯 되돌릴 수 없는 단일한 시간의 지층에 가깝다. 얼굴을 바꾸기 전까지의 시간. 얼굴을 수술해서 바꾼 뒤의 시간. 그 두개의 시간의 지층들. 그것은 원하는 대로 편집할 수 있는 것인가. 또는 그 두개의 시간대에서 나는 두 사람으로 나뉘어 살 수 있는가. 또는 얼굴을 바꿔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가, 다시 얼굴을 고쳐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돌아간다고 할 수 있을 때 그 돌아간 ‘나’는 예전의 진짜 ‘나’와 똑같은가. 이렇게 얘기하면 골치 아픈 정체성의 문제 같지만, 그러나 김기덕은 하나의 이미지로 그 추상성을 깨뜨린다. 또는 사랑의 지겨움에 대한 살내음나는 구체적인 질문으로 환원시킨다. 2년 동안 사귄 지우(하정우)에게 늘 똑같은 얼굴이라 미안하다며 세희가 얼굴을 이불로 덮고 칭칭 감는 이미지. 세번 반복되는 그 이미지는 정말 무서운데 왜냐하면 권태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사랑의 괴로운 운명 한가운데로, 또는 대체 불가능의 운명이 주는 끔찍함으로 우리를 몰아넣기 때문이다.

지우와 세희는 그러나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해 믿지 않는다. 세희는 얼굴을 바꿈으로써 지겨운 자신의 이미지를 벗어나 새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세희는 수술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고, 게다가 휴대폰도 끊고 이사까지 함으로써 완벽하게 새로운 여자로 지우에게 다가설 준비를 한다. 세희는 미래를 바꿀 수 있고, 그럼으로써 지우에게 버림받을 수 있는 자신의 지겨운 운명을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지우는 그러나 문득 사라진 세희를 잊지 못하고 술집과 여자를 전전하며, 사라진 애인 세희가 전한 메시지에 집착하고, 새로 나타난 애인 새희에게 세희를 잊지 못하겠다면서 이별을 통고한다. 세희가 전해온 메시지에 새희가 낙서를 하자 칼로 새희의 이름을 지우고 세희의 이름을 복원하는 장면. 지우의 직업은 게다가 편집기사다. 지우는 김기덕의 <빈 집>을 편집하고 있는데, 편집이란 시간의 의식적인 배열이다(지우는 모도에서 만난 마스크 쓴 여자를 사진으로 찍어온 뒤 포토숍 작업을 하는데 그것도 이미지의 의식적 배열이자 박제화이다). 편집엔 운명의 불가역성이 깃들지 못한다. 지우는 과거를 복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새희는 미래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지우도 과거는 복원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한다. 이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새희는 지우가 원하는 세희의 이미지를 줄 수 없다. 지우는 새희가 아닌 세희, 정확하게는 세희와 나누었던 과거를 원한다. 지우는 세희의 부재를 거쳐서야 비로소 세희를 사랑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진짜 세희가 원했던 게 아니다. 새희는 이제 자신의 과거인 세희를 질투하기 시작한다. 새희는 지우가 그리워하는 세희로 돌아가고자 하고, 지우는 과거를 복원하려는 희망을 포기한다.

김기덕 감독은 전작 <>에서 원형질의 신화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소녀의 미래를 빼앗아오려 했던 노인의 이야기다. 자기보다 더 큰 바깥 세상을 감춰두고 보여주지 않으면 소녀와 자신의 관계는 영원할 것이라고 노인은 생각한다. 노인은 소녀의 미래를 빼앗아(그것은 혼례를 앞당기는 것이다) 소녀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이기려 한다. 소녀를 앗아갈 미래를 미리 앞당겨 질투하기. 또는 미래에 대한 투기까지 더해 고통을 앞당겨 앓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탐구.

<시간>은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랑 일반이 주는 지겨움의 공포를 환기시킨다. 내가 애인에게 지겨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강박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세희도 지우의 미래를 훔쳐오고자 한다. 자신의 지겨운 얼굴을 고쳐 지우가 만날 전혀 다른 미래의 연인이 되기로 작정함으로써 말이다. 세희도, 지우도, 우리도 놓치는 것. 사랑은 ‘다른 어떤 여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장점이 아니라, 바로 다른 성질 그 자체’(레비나스)를 사랑하는 것이다. 또는 바로 그 ‘다름’을 향해 다가서고 발견하려는 것이 사랑이다. ‘반복 안에서 새로움을 찾는 것이 사랑’(김기덕)이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은 늘 유예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 깨달음은 사랑의 목적이 아니라 실패한 뒤에 얻는 결과이거나, ‘성공’했다면 의식하지도 않았을 사랑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지우와 세희는 그 결과 직전까지 몸부림치고 피흘리며 끝까지 우리를 대신해서 가보는 사랑의 전령사다. 전령사들이 어디까지 가보았는지, 영화 끝까지 무섭고 안타깝고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지난 10년간 이 궁금증의 내기에서 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김기덕 영화를 볼 때마다 입 안에서 서걱거리는 것들. 어떻게 세희는 지우와 술집 여자가 들어간 그 높은 호텔방으로(목욕가운이 두개 걸린 것으로 보아 장급여관은 아닌)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깰 수가 있을까.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전속력으로 질주해, 어떤 방인지 정확히 알고 쳐들어오는 호텔 지배인. 누가 유리창을 깼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손님에게 호통을 치는 지배인의 고압적이다 못해 우스꽝스러운 대처. 지금 당신은 김기덕 영화를 보고 있다고 말하는 이상한 소격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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