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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하고 뻔뻔해서 도발적인
2001-02-16

알모도바르식 상상력의 진수 보여준 <키카>

<키카> Kika 1993년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출연 베로니카 포르케, 빅토리아 아브릴

MBC 2월10일(토) 밤 9시

이제 막 감옥에서 탈옥한 전직 포르노 스타는 한 예쁜 여성의 나긋한 향기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꼭 발정난 들개처럼 그 여자를 덮치고는 이참에 아예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겠다고 기를 쓴다. 무방비 상태로 습격을 당한 여자는 처음엔 무언가 좀 묵직한 물건이 몸을 누르고 있는 게 거북하다는 표정으로 쉴새없이 조잘거리더니 이젠 정말 귀찮아졌는지 언성을 높이며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 사정하면 그만 나가!” 뒤늦게 경찰이 이 범행 현장에 도착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몸은 여전히 서로 밀착되어 있는 상태다. 결국 경찰의 완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욕정을 제지당한 강간범. 발코니로 달려간 그는 남아 있는 욕망을 자력(自力)으로라도 기어코 해결하고 난 다음에서야 건물 아래로 달아난다.

이처럼 ‘쓸데없이 길게 묘사된’(!) 강간 장면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키카>에서 어떤 이유로든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미국 개봉 당시 <키카>가 MPAA로부터 NC-17 등급을 받은 것도 바로 이 장면 때문이었고, 많은 평자들의 집중 포화를 당해내야 했던 것도 이 부분이었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보기에, 웃음을 끌어내기 위해 굳이 강간 같은 비인간적인 상황을 이용한다는 기괴한 발상 자체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뿐이었다. 물론 <키카>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 불쾌한 장면에서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뻔뻔스러울 정도로 도발적인, 알모도바르식 상상력의 정수를 보았다. <비밀의 꽃>(1985) 이전 알모도바르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그랬듯, <키카> 역시 그 생경한 상상력을 보는 시각에 따라서 역겨움을 줄 수도 있고, 아니면 색다른 쾌감을 줄 수도 있는 그런 영화인 것이다.

그 반응이 어떤 것이든, 어쨌든 앞서 거론한 강간 장면이 <키카>라는 영화에서 삭제할 수 없는, 중요한 것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그건 그 장면이 미디어에 의한 무자비한 ‘강간’을 들춰낸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영화의 거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키카>는 크게 보아 강간 장면 이전과 그 당시, 그리고 그 이후로 구성되어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사진작가인 라몬, 그의 죽은 어머니와 살았던 미국인 소설가 니콜라스, 외면상으로는 라몬과 동거하지만 비밀리에 니콜라스와도 관계를 맺고 있는 미용사 키카, 그리고 라몬의 옛 애인이자 선정적인 사건만을 추적하는 TV리포터 안드레아, 영화는 이들 네 남녀 사이의 마구 꼬인 욕망의 관계를 축으로 시작된다. 지극히 알모도바르적인 앙상블 멜로드라마로 길을 튼 영화는 강간 장면을 거치면서 다른 길로 접어든다. 이제 손톱처럼 자꾸 자라나는 살인의 충동과 현대인들을 공개적으로 ‘강간’하는 미디어에 대한 이야기 등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일반적인 평가 기준으로 본다면, 강간 장면이 중심축이 된 이 3막 구성이 도무지 유기적인 결합이란 걸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성의 균형 감각이 거의 파괴되다시피 한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도대체 요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알모도바르의 손을 거치면서 이 과잉의 난장판은 계속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매력적인 허구 세계로 전화한다. 이건 거의 ‘괴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것이다.

홍성남/ 영화평론가antihong@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