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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아저씨들의 변두리 로큰롤, <라디오 스타>
이종도 2006-09-26

즐거운 아저씨들의 변두리 로큰롤, 익살도 있고 눈물도 있네.

작가 스티븐 킹은 이야기는 플롯을 짜나가는 일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발굴하는 일이라고 했고, 미켈란젤로는 조각이 없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돌 안에 갇혀 있는 형상을 해방시키는 작업이라고 했다. <라디오 스타>는 그런 의미에서 억지로 짜맞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독, 작가, 배우 안에 갇혀 있는 이야기를 발굴한 것이다. 변두리성을 무대 한복판으로 밀어 올려온 이준익 감독은 물론, 라디오 작가 출신인 최석환 작가, 그들 자신의 한때의 영락의 삶을 연기하는 듯한 박중훈, 안성기의 이야기이다.

골자가 되는 이야기 줄기는 1988년 가수왕 출신으로 이제는 미사리에서 지나간 영광의 추억과 자기 연민을 핥고 있는 최곤(박중훈)이 아직도 그 곁을 떠나지 않는 매니저 박민수(안성기)와 함께 지방 방송국 DJ로 간다는 것이다. 주인공들 못지않게 조역들도 변두리적인 인물들이다.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 PD를 맡은 강석영(최정윤)은 아이돌 스타를 씹은 뒷담화가 방송사고로 연결돼 원주에서 영월로 쫓겨왔고, 영월지국장(정규수)은 원주와의 통폐합만을 기다리는 사내다. 강원도하고도 영월이라는 변두리도 그렇지만 텔레비전과 인터넷에 오래전 살해당한(영화에서 흐르는 <비디오 킬드 더 라디오 스타>) 라디오라는 매체 자체도 변방으로 밀려난 것이다.

그러나 낡은 건 소재지 이야기가 아니다. <라디오 스타>는 DMB 시대에도 라디오를 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다매체 시대에 사라져가는 옛 매체의 향수에 대해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가깝다면 <라디오 스타>의 이야기 방식은 마당극의 구조일 것이다. 다방 종업원, 철물점 주인, 백수, 꽃집 총각, 농협 직원 등 변두리 이웃들이 주파수 안으로 들어오며 관객도 덩달아 함께 따라들어가 놀게 되는 열린 원형 무대의 구조. <황산벌>의 인간장기판이나 욕설 대결, <왕의 남자>에서 궁궐 안의 마당극처럼 영월 사람들과 주인공들은 마당을 펼치고 노는데 그 마당이 주파수라는 게 다를 뿐이다. 그조차도 주파수 안에 가둬두기보다 방송 100회 기념 공연, 인터넷으로 방송 다시 듣기, 청취자 홈페이지 등으로 무대를 확대한다. 그럼으로 영화는 라디오 방송의 일회성과 주파수가 퍼지는 범위의 국지성(영화 속 영월방송은 당연히 전국 방송이 아니다), 그리고 예쁜 엽서 전시회류의 향수를 벗어난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이야기인가. <황산벌>의 일부, <왕의 남자>의 대부분에서 볼 수 있던 여자없는 뒤틀어놓은 연애담이다. 물론 이 연애란 순수한 우정에 훨씬 더 가까운 점액질없는 형태다. <황산벌>에서 김유신과 계백, <왕의 남자>에서 장생과 공길의 방식과는 또 다른 두 남자의 이야기다. <황산벌>이 계백의 목을 치게 하는 장면, <왕의 남자>가 공길과 눈먼 장생이 줄 위에서 노는 장면에 이르는 비극적인 연애담이라고 본다면 <라디오 스타>는 18년간 이상한 의존관계에 있던 두 남자가 자신들의 관계를 갱신하게 된 사연을 말하는 이야기다.

영화는 18년 전 유성처럼 단 한번 번쩍거리고 사라진 최곤의 가수왕 수상장면을 보여주고 바로 현재로 도약한다. 그 뒤로 영화는 과거를 참조하지 않고 18년간 꾸준히 시간에 의해 침식당한 최곤의 밑바닥을 보여준다.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고 일방적인데 최곤은 학대하는 역을 맡고 박민수는 그 학대를 응석의 언어로 번역한다. 심지어 박민수는 최곤이 때린 미사리 카페 사장에게 자기를 때려달라고까지 말한다. 최곤과 박민수의 관계를 지탱시키는 사랑의 논리는 겉으로 봤을 때는 피학과 자학의 오묘한 공존이다. 그 공존이 흥미로운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최곤이 ‘나는 박민수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의존성을 학대의 형식으로 연기하고, 민수가 ‘최곤은 내가 품에서 담배를 꺼내지 않으면 담배도 못 피울 인간’임을 알면서도 그걸 복종의 형식으로 연기하는 데 있다. 다른 하나는 그런 역할극을 서로 쉽게 깨뜨리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여관방에서 낙망에 빠진 박민수가 ‘같이 빠져죽자’고 하자 최곤은 이렇게 얄밉게 대꾸한다. ‘죽으려면 혼자 죽어. 같이 빠져 죽으면 둘이 사귄 줄 알아.’ 이 역설 안에 충분히 애정과 기대가 담겨 있지만 그 역설이 어떻게 실제 사랑의 증명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가 궁금증을 낳는다. 아무튼 이들은 영월 동강 절벽 가까이까지 밀려났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폐경기 증후군에 빠진 듯한 두 사내를 어루만지고 활력을 충전시키는 마당이 필요하다. 영월은 폐경기에 이른 두 사내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무대 노릇을 한다. 전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영월로 내려온 최곤은 작가가 써준 알맹이없는 수식어 멘트를 내버리고 자기 식대로 방송하면서 사고를 저지른다. 또는 자신의 잊혀진 끼를 발굴한다. 겨우 담배 심부름이나 하고 최곤이 때린 피해자 위로나 하던 박민수는 라디오 방송 벽보를 붙이고 홍보를 하면서 오랜만에 매니저 노릇을 한다. 외상값 독촉하는 다방 종업원, 취직 자리나 알아달라는 엉뚱한 백수, 심심파적거리인 화투 규칙을 확인하는 할머니, 집 나간 아빠 찾는 아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꽃집 총각 등 전화 연결된 영월 청취자들이 최곤의 무뎌진 감성을 흔든다. 순댓국집에 네명이 우르르 몰려들어가서 ‘순댓국 하나 소주 넷’을 시키는 괴짜 밴드 이스트리버(노브레인)가 자신의 우상 최곤을 접선하면서 마당엔 풍악까지 갖춰진다.

이제 영화는 관객의 소매를 끌거나, 관객은 스스로 소매를 잡고 마당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청취자들의 각양각색 사연에 최곤이 그 못지않은 엉뚱한 처방을 내리며, 카메라가 영월 청취자들의 다양한 표정을 잡아낼 때 이스트리버의 <넌 내게 반했어>가 이 낡아 보이는 마당극을 하나로 묶는다. 박중훈과 안성기의 차곡차곡 쌓여가는 연기가 마지막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르는 걸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그들의 연기는 빛나던 90년대의 전성기 가운데 몇 대목을 상기시킨다. 그들을 마음껏 놀게 할 이야기들이 요즘 퍽 드물었음을 깨닫게 만든다. 연극판에서 큰 배우인 정규수는 비어 보일 수 있는 이야기의 품을 익살과 연민어린 표정으로 메운다. 변두리에서 저물어가는 아저씨에게도 귀여움과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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