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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바라보다 불현듯 깨닫다, <팔월의 일요일들>
오정연 2006-09-26

무심하게 바라보다 불현듯 깨닫는다. 인연이란 모름지기 그런 것이다.

소실점을 내보이며 곧게 뻗은 길과 그 길을 둘러싼 한적한 교외의 풍경이 뒤집어진다. 점차 선율을 더하며 알 수 없는 긴박감을 형성하던 느릿한 음악이 문득 잦아들 때까지 계속되는 3분30초의 회전. 그 나른한 운동의 정체는 타이틀 컷 이후 보여지는 영화의 세 번째 컷, 전복되는 자동차에 있다.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긴박한 상황, 차 안의 시선과 밖의 시선은 그렇게 다르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똑같은 상황에 대한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말하기 위해 마련된 <팔월의 일요일들>의 오프닝은 최면처럼 몽환적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고조된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능가할 만큼, 혹은 망각할 만큼 매혹적이라는 것이 이 오프닝의 문제라면 문제다.

영화 시작과 함께 벌어진 교통사고로 호상(임형국)은 가벼운 찰과상을 입고, 그의 아내는 혼수상태로 빠져들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아내가 아꼈던 오래된 책 <팔월의 일요일들>을 병실에 들고 오지만 아내는 미동도 없다. 책 속에서 남자의 이름을 발견한 호상의 마음만이 동요할 뿐이다. “1994년 6월15일. 지리산 쇠검터에서 이형주.” 그는 형주라는 이름의 주인을 찾아 아내의 모교부터 지리산까지 향한다. 한편 호상의 아내를 담당하는 의사 시내(양은용)는 우연히 접한 책 <팔월의 일요일들>이 그저 궁금해서 수소문을 시작한다. 유부남 동료의사를 섹스파트너 삼고 있는 시내는 병원과 편의점, 혼자 사는 집을 오가며 단조로운 일상을 꾸려가는 중이다. 절판된 책 <팔월의 일요일들>을 찾기 위해 시내가 수소문하는 헌책방 주인 소국(오정세)은 영화 속 인물들이 이루고 있는 삼각형의 마지막 꼭짓점에 해당한다. 헌책과 씨름하는 일터, 엄마와 소소한 말싸움을 일삼는 집 사이를 왕복 운동하는 그는 간혹 고깃집이나 공원, 노래방으로 향하기도 한다.

눈치챘겠지만 <팔월의 일요일들>은 <빛나는 거짓> <내 청춘에게 고함> <양아치어조> 등 최근 몇년간 관객과 만났던 ‘독립장편영화’의 어떤 흐름을 잇고 있다. 그 흐름에 따르면 복수의 주인공이 각자의 이야기를 끌고 가면서 희미한 관계를 맺고, 영화 속 그들의 일상은 충분히 특별할 수 있지만 반복적이며, 연기와 촬영을 비롯한 영화 화법은 일반적인 감정이입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꽉 찬 이야기보다는 무색무취의 공기를, 극적인 감정의 폭발보다는 이를 전후한 알 듯 모를 듯한 감정변화의 결을 묘사하는 것 또한 일관된 특징이다. 각각의 영화가 지닌 고유한 개성과 그들이 구축한 고유한 세계를 고려할 때 이런 식의 정리는 심각한 수준의 폭력이 될 수 있지만, 이들 영화가 모두 상업영화의 익숙한 양식(樣式)이나 영화적 과장과 최대한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관객의 적극적인 개입을 위한 일말의 불친절함을 감수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그 자체로 가치판단 혹은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관건은 애써 고수한 그 방식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애초의 의도를 관철했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팔월의 일요일들>은 절반의 성과를 거뒀다. 사후적이고 인위적으로 고찰 가능한 관계 혹은 인연이 실은 얼마나 희미하고, 또 질긴 것인지를 말함에 있어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한 여인을 둘러싼 남편과 정부의 서로 다른 기억을 이야기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팔월의 일요일들>과 동명의 영화가 맺고 있는 관계부터 세 주인공의 인연까지, 비약없이 자연스럽다.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두 남녀의 시선 교환을 바라보는 영화의 마지막 역시 딱 그만큼만 의미심장하다. 무리하게 비극적이거나 쓸데없이 관조적이거나 허황되게 비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지점이다. 인물을 정중앙에 놓는 미니멀한 클로즈업, 인물과 인물, 대상과 카메라의 거리를 정확하게 계산한 패닝으로 정리될 수 있는 촬영스타일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의 규모 및 주제와 효과적으로 조우한 스타일이 사려깊고도 아름답다.

그러나 불필요한 오해 혹은 지루함과 풍부한 독해는 분명 다른 말이다. 보면 볼수록 흥미로운 소국과 그 엄마의 끈적하고도 쿨한 관계는 반복 속의 미묘한 차이가 빚어낸 결과물이지만, 두고 볼수록 악의적이기만 한 시내의 정부(情夫)는 건조한 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희생당한 캐릭터다. 호상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름 ‘형주’는 소국이 언뜻 내뱉는 대사 “형주 형 책 가지고 있지?”를 통해 등장하지만, 슬쩍 지나치는 대사를 놓친 관객은 그 이름의 성별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표지에 핏자국까지 선연한 그 소설책을 호상의 아내 역시 그저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일 뿐이라는 내막은 더더욱 전달될 수 없다. 소설 <팔월의 일요일들>이 완벽한 맥거핀이 되지 않는다면 영화가 전달하려는 희미한 진심 역시 묘연해질 뿐이다. 현상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방식을 제시했던 첫 장면의 남다른 눈썰미를, 영화는 끝까지 가져가지 못한 셈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을 닮기 위한 노력은 한결 치밀해질 필요가 있다. 영화는 계속 진화 중이고, 이는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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