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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군, 부산영화제에 대한 추억과 바람

서울에서도 틀어주이소

올해도 어김없이 부산에서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제가 열리고 있다. 하나 원체 정보에 어두운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필자는 올해도 역시 부산에 내려가지 못한 채, 각급 각종 영화인들이 전부 빠져나간 서울을 외로이 지키며 이렇게 늦은 밤 원고를 끼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아….

사실을 고백하자면 필자가 갔던 마지막 부산영화제는 지난 1999년, 그러니까 4회 부산영화제다. 그 당시의 부산영화제는 이제 막 대규모 영화제로 자리를 잡으려고 하던 참이었고, 그런, 뭐랄까 아직 노련치는 않은 패기 같은 것이 영화제 전체에 떠다니고 있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필자는 그때 거의 철거 직전의 낡은 극장에서 흑백 다큐를 보던 일이 아직도 뚜렷이 기억난다. 스크린은 오래된 광목천 같은 누런색이었고, 극장 뒤쪽에서는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영화 사운드만큼이나 크게 들렸으며, 바닥에는 국제앰네스티 전단지와 영화제 프로그램이 적힌 리플릿, 그리고 쓰레기들이 라면다발마냥 뒤엉켜 있었다. 그래도 먹다 만 옥수수처럼 듬성듬성 관객이 앉아 있던 극장 안은 나름대로의 진지함이 제법 들어차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도중 몇번 졸기도 했던 것 같지만, 여튼 영화제 마지막 날 아침에 봤던 그 남포동의 낡은 극장의 정경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관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본질적으로 영화제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상영 프로그램을 보면 보고 싶은 영화들이 흘러넘치고, 행사 일정을 보면 가보고 싶은 행사들이 너무나 많다. 틈틈이 이곳저곳 부산의 명소로 알려진 곳들도 들러줘야 하고, 싸고 맛있는 식당도 들러야 한다. 그러나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예산도 빠듯하며, 체력은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주어진 조건하에서 해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소화해내려는 의지만큼은 꺾이지 않아, 결국 영화제는 일종의 전투 또는 모험으로 변한다. 그리고 영화제가 끝난 뒤, 영화 그 자체보다도, 영화를 보고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도 뛰어다녔던 그 전투 또는 모험의 추억이 더욱 선명하게 남는다. 그래서랄까, 필자는 사실 영화제의 발전이 한국 영화계의 발전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영화제가 주관하는 필름마켓의 규모와 영화인들의 네트워크의 규모도 점점 커지고 있지만, 결국 영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토양은 관객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이 영화제를 통해 겪는 것은 본질적으로 축제에 대한 기억이지, 영화에 대한 기억은 아니다.

아무튼 모쪼록 올해엔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됐던 영화들 중 더 많은 영화들을 서울의 극장에서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필자같이 축제에 참여할 전투력을 배양하지 못한 나태한 자들에게도, 몇몇 잘나가는 한국영화와 할리우드영화 외의 다른 나라의 다른 영화들을 보고 싶은 마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