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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양,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며 직장 생활을 되돌아보다

프라다 벗었다고, 들뢰즈 안 들어가~

생각해보면 나의 직장 초년 생활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드리아와 어느 정도 비슷했던 것 같다. 내 첫 직장은 잡지를 만드는 곳이었다. 첫 출근을 하면서 ‘고종석 같은’ 운운하며 멋진 글쟁이가 되겠다는 어설픈 야심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떠들어댔다. 비서직이 아니라 기자로 출발했으니 앤드리아보다는 조금 더 쾌적한 출발이었다.

그러나 세상사가 내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어서 1년 반 뒤 나는 ‘뜻하지 않던’ 여성지에서 일을 하게 됐다. 언제 펑크낼지 모르는 모델과 스타일리스트 섭외에 전전긍긍하고, 내가 진행해서 찍어온 화보 사진의 필름을 들여다보며 미란다 프리슬리처럼 입을 오므리는 데스크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그게 그거’처럼 보이는 열여섯쌍의 귀걸이 사진 프린트에 써야 하는 열여섯개의 사진설명에 ‘모던 앤 심플’밖에는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했다. 항상 내 머릿속에는 ‘왜 번듯한 4년제 대학을 나온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지?’라는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참고로 그때 나와 함께 입사해 지금도 그곳에서 데스크로, 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기들 모두가 ‘번듯한 4년제’ 출신이었다. 무덥던 어느 날 내 몸통만한 쿠션 열댓개에 파묻혀 땡볕 아래를 걷다가 회사 입구로 들어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는 순간 결심했다. “그래, 그만두는 거야.”

여기까지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되겠고, 아래부터는 김혜리 기자가 표현한 <악마는 들뢰즈를 읽는다> 되겠다.

여기만 나가면 온 세상이 다 나를 받아줄 거라 생각했던 나에게 각계의 러브콜 대신 IMF 찬바람이 불어닥쳤고 1년 가까이 고전한 끝에 다시 언론사에 입사하게 됐다. 훌륭한 글쟁이라는 나의 야심을 펼칠 수 있는 멍석이 깔린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그리고는 물론, 반전이다. 아이디어 회의 때면 말끝을 흐리는 빈약한 내용 앞에서 부서원 전체가 미란다처럼 입을 오므리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취재원에게 “기자가 이런 것도 몰라요?”라는 호전적인 질문을 오늘은 듣지 말아야 할 텐데 전전긍긍하고, 내 기사를 본 뒤 긴 한숨을 내쉬는 데스크의 얼굴 표정을 살피느라 전전긍긍했다. 그러면서 무려 9년을 채우는 동안 글쟁이라는 단어는 내 마음속에서 언젠가 명예퇴직을 했고 ‘순결한’ 내가 이 험한 세상에서 10년 넘게 살아남는 기염을 토했다는 것에 다만 감격해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프라다의 세계를 떠났고, 나와 가장 친한 친구는 아직 그 세계에 남았다. 그녀에게는 프라다 신발 한짝 없고(짝퉁은 있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들뢰즈는 첫장도 접히지 않은 <들뢰즈와 영화철학>이라는 책 한권 책상 앞에 꽂혀 있는 것으로 크나큰 위안을 주고 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 거 같다는…. (우물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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