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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게이들의 달콤하고도 처절한 낭만, <후회하지 않아>

쓸쓸한 도시 한가운데 내던져진 이 시대 퀴어멜로. 그래도 ‘후회하지 않아’.

사랑이 현실을 가리거나 현실이 사랑을 가리는 영화들, 다시 말해 사랑이 현실을 못 본 체하거나 현실이 사랑을 냉소하는 영화들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다. 최근 한국의 이성애 멜로는 그래왔다. 현실이 부각되면 사랑이 밀려나고 사랑이 넘치면 현실은 꼬리를 감추는 식으로 말이다. 낭만적 사랑과 투박한 현실을 공존시키려는 시도가 있다 해도, 그 시도는 대개 대책없는 희망에 대한 설파나 나약한 실패와 파멸로 끝나곤 한다. 그런데 <후회하지 않아>는 보기 드물게 그걸 끈질기게 시도하고 밀고 가는 영화다. 이 멜로는 죽도록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죽도록 절박한 사랑이 있지만, 그 둘을 끝까지 가져가며 ‘후회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단지 70년대 호스티스영화의 변주로, 혹은 예쁜 남자들의 통속 로맨스로 한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보육원에서 자란 수민(이영훈)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한다. 재민(이한)은 수민이 다니는 공장 부사장의 아들이자 그 회사의 인사부장이다. 대리기사와 차 주인으로 우연히 마주친 첫 만남 이후, 재민은 수민에게 급속도로 빠져든다. 그러나 수민이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에 그들의 계급적 차이는 너무 크다. “당신은 부자여서 도망칠 곳이 많지만, 난 가난해서 갈 곳이 없어”라는 수민의 계급적 적대감은 사랑을 피하는 절박한 이유가 된다. 수민은 공장을 그만두고 호스트바에 취직하지만, 재민은 결혼할 여자가 있음에도 수민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제 이들의 애절한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계급과 제도의 벽을 거뜬히 뛰어넘지 못한다. 이것은 현실이다. 선택은 두 가지, 아무 일 없던 듯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거나 사랑을 안고 그 완고한 벽과 부딪쳐 피 흘릴 용기를 갖는 것이다.

이미 <동백아가씨>와 <슈가 힐> 등을 통해 동성애를 다루었던 이송희일 감독은 수민과 재민의 섹스신에 대해 “예쁘게 찍지 말자”는 원칙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의 섹스신은, 나아가 이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여러 육체적인 표현들은 감독의 의도와 달리 거칠지 않다. 그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둘 사이의 소통을 담아내는 몸짓들이 매우 섬세하고 따스하게 다가온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를테면, 이들이 포옹하거나 사랑을 속삭이거나 손을 살며시 잡고 있는 모습에서 떠오르는 건, 질척이는 몸의 부딪침이 아니라 팔랑거리는 나뭇잎 두장이 내밀하게 마주치는 느낌이다. 또한 수민과 재민의 관계뿐만 아니라, 호스트들의 관계나 보육원 출신의 남자들이 맺는 관계에서는 벼랑 끝에 선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보살핌의 윤리 같은 것이 배어난다. 하지만 이처럼 세밀한 감정적 교류가 판타지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영화가 끊임없이 이들의 사랑에 현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게이 호스트바의 어둡고 음침한 복도, 부둥켜안고 흐느적거리는 몸들, 속옷에 끼워지는 푸른 돈다발, 삭막한 도시의 뒷골목과 도시 꼭대기의 외롭고 가난한 옥탑방, 그리고 하얀 웨딩드레스. 영화는 듣고 싶지 않은 단어들과 보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이들의 사랑 곳곳에 배치해둔다. 그래서 수민과 재민의 (동성애적) 낭만적 사랑은 냉혹한 현실을 회피할 순간을 갖지 못한다.

이 영화의 가장 환상적인 부분은 역설적이게도 영화의 후반부, 둘의 관계가 가장 비극적으로 치닫는 지점이다. 감독이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의 색감을 빼기 시작했다고 밝혔듯, 영화의 감미로운 컬러는 점점 어두운 톤으로 가라앉는다. 영화는 가장 현실적인 순간을 가장 환상적으로, 가장 극단적이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가장 차분하게 바라보는 방식을 택한 듯하다. 눈은 내리고 수민과 재민은 구덩이에 널브러져 있다. 카메라가 시체처럼 쓰러진 이 둘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고요한 그 몇초 동안, 그들은 처음으로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들은 똑같이 도망칠 곳이 없다. 서로를 파괴하고 자신을 파괴한 뒤에야 또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은 사랑. 이 장면은 어린 호스트 가람이 어이없이 죽은 뒤, 수민이 그의 뼛가루를 달리는 차창 밖으로 뿌리는 장면만큼이나 정서적 울림을 만들어낸다. <후회하지 않아>가 막다른 골목에 당도한 삶과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이처럼 고립되고 소외된 공간의 속성을 통해서다. 그래서 이 영화는 퀴어멜로이자, 쓸쓸한 도시의 멜로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미덕은 인물들의 관계를 비극의 통속성 안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사랑의 패자들에 대한 연민을 강조하는 대신, 사랑에 달라붙어 있는 사랑 이외의 것들을 응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 사랑이 다른 사랑보다 순수하고 순결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악조건과 영원히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후회하지 않아>의 그 사랑은 어쩌면 이 시대 최고의 낭만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피 흘리는 비극 속에서 어느새 다시 꿈틀거리는 욕망의 유머를 보면 그런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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