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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인 스타일, 패기만만한 시도, <삼거리극장>

좀더 다듬어졌으면 좋았을 감각적인 스타일, 패기만만한 시도

‘뮤지컬’은 우리나라 영화사에서는 한번도 주류 장르로 존재한 적이 없을뿐더러 거의 만들어진 적도 없었다. 그래서 영화팬들에게 뮤지컬이라는 단어는 40∼50년대의 휘황찬란한 스펙터클을 자랑했던 할리우드영화들만을 상기시킬 뿐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국의 영화사 속 장르로만 여겨진다. 그런데 올해는 노래방 스타일로 뮤지컬 형식을 차용한 <다세포 소녀>와 뮤지컬을 전면에 표방한 <구미호 가족>에 이어 <삼거리극장>까지 세편이나 만들어졌다. 두편의 선배들을 접한, 소수의 관객의 반응에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낯선 장르를 맞닥뜨린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건너온 뮤지컬들이 비싼 관람료에도 불구하고 열띤 관심 속에 소비되는 현상이 한국영화 속의 뮤지컬에 대한 관심과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순진한 기대일까.

<삼거리극장>은 8억원이라는 적은 예산을 들였다는 것부터 호화 뮤지컬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 촬영지였던 부산의 삼일극장은 문을 닫기 전 자신의 낡고 초라한 모습을 영화 속에 남김으로써 처연하지만 매우 영화적인 마지막을 장식했다. 삼일극장의 운명은 이 작품과 닮은 구석이 있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현대에 부합하는 키치적인 외피를 걸치고 있지만 60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한국영화의 잊혀진 지점과 만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에 밀려 문을 닫는 삼일극장은 그 자체로 자본의 논리 속에 소비되는 데 급급해 역사의 보존에는 관심없는 한국영화의 실상을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삼거리극장>은 그러한 공간을 무대로 삼고 40년대 한국영화를 중요한 소재로 삼아 새로운 영화적 실험을 감행한다.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영화의 주인공인 소단을 따라 환상과 현실, 영화와 극장, 혼령과 인간이 마구 뒤엉켜 벌이는 뻑적지근한 춤과 노래판으로 채워진 여정을 따라가도록 만든다. 영화는 소단(김꽃비)의 할머니가 영화를 보러 ‘삼거리극장’에 가봐야겠다며 집을 나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단은 할머니를 찾아 헤매다가 ‘삼거리극장’의 매표원 구인광고를 보고 매표원이 되어 극장에서 할머니를 기다리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기다리던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고, 극장주 우기남(천호진)은 매일 자살을 기도하며, 밤의 극장엔 네명의 혼령들이 활개를 치며 돌아다닌다. 할머니, 혼령 넷, 사장에게는 사실 공통의 아픈 기억이 있으니,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이라는 저주받은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소단은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가 문을 닫게 된 극장을 부활시키기 위해, 다시 꺼내 보는 것은 물론이고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던 그 영화를 살려내기로 마음먹는다. 영화의 부활은 극장에 멈추어 고여 있던 시간을 흐르게 만들고 감춰졌던 진실이 빛을 보도록 만든다.

<삼거리극장>은 미덕과 패착을 고루 갖춘 영화다. 우선 이 영화는 메이저영화에서라면 전혀 할 수 없었을 법한 실험들을 과감하게 감행한다. 천호진이라는 배우를 제외하면 주요 인물을 맡은 배우들은 영화판에서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선한 얼굴들이다. 물론 그들은 연극에서 다져진 탄탄한 실력으로 개성적인 연기, 멋진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영화는 때때로 연극을 감각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화면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상쇄할 만한 실험적 화면들도 마련되어 있다. 이뿐 아니라 9곡의 오리지널 스코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노래 속에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어휘들을 적절하게 가사로 채택해 생짜 감정들을 살려내는 데 한몫을 톡톡히 한다. 게다가 영화 속의 영화를 전달하는 변사의 등장은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이 영화의 태도를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이 모든 요소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영화는 한국영화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혹은 않았던 무엇을 보여준다.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한다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지만, 그러한 시도가 올바른 종착역에 도달하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우선 <삼거리극장>은 인물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잡는 데 있어 문제에 봉착한다. <개그콘서트>의 ‘뮤지컬’이라는 코너가 풍자하고 있는 것처럼 뮤지컬은 건조한 일상적 감정을 담은 서사에 한껏 고양된 정서를 담은 음악이 갑자기 침투하면서 이질성을 느끼게 하는 장르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서 관객이 갖게 되는 불편함은 그런 방식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소단이라는 캐릭터가 신과 신 사이를 건널 때 혹은 한신 안에서조차 미묘하게 이질적이라는 데 있다. 그다지도 퉁명스럽고 비협조적이던 소단이 혼령들을 좋아하게 되고, 정서적으로 교통한다고 느끼게 되는 과정이 다소 급작스럽다. 방금 전 숏에서 분명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던 그녀가 다음 숏에서 혼령들과 입을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대략 난감할 따름이다.

또한 혼령들은 왜 삼거리극장에 갇혀 있는지,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곳에 있고 싶어하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소단이 돌출적으로 제시하는 대안들은 필연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서사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소단이 혼령이나 사장을 대하는 태도도 불가해하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는 과정도 매우 돌발적이다. 그러한 돌발성은 시각적인 효과에 매우 공을 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각적 효과들을 통해 관객에게 주제에 접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사나 노래를 통해 직접적으로 주입하려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영화가 ‘과장과 비약을 일삼으며 춤추고 노래하는 밤의 유랑 극단’을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물의 심리와 서사의 진행까지 과장과 비약을 일삼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을까.

그리고 ‘악극’은 주인공들을 묶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지만 형식에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외관상으로는 <록키 호러 픽쳐 쇼>나 팀 버튼의 세례를 흠뻑 받은 것처럼 보인다. 분명 <삼거리극장>은 <록키 호러 픽쳐 쇼>처럼 관객을 열광시킬 매력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쿨하고 젠체하지 않는 노래들 사이사이 튀어나오는 현학적인 대사들은 리듬을 타던 발장단을 민망하게 만든다. 황군, 신민, 기생과 같은 문제적이고 역사적인 아이콘들이 의미없이 소비되지 않고 좀더 역동적으로 활용됐으면 이 영화의 진폭은 더 커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역사 해석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상상력이 더 난무했으면 하는 것이다. 이런 아쉬움은 <삼거리극장>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소머리 인간 미노수 대소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역사와 신화가 혼합된 캐릭터 ‘미노수’의 폭발력은 다소 미약해서 금지된 걸작을 본 뒤에도 우기남 감독의 지독한 자기연민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우기남의 대사들이 실은 이 작품을 위해 마련된 자기변명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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