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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녀의 전투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김현정 2006-11-29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이 되고자 하는, 어린 소녀의 전투

1940년대 스페인, 내전은 끝났지만 아직도 일부 지역엔 게릴라가 남아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 정부에 맞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어린 소녀 오필리아(이바나 바케로)는 만삭인 엄마와 함께 그런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새아버지 비달 대위(세르기 로페즈)의 캠프에 도착한다. 엄격하고 냉혹한 비달에게 시달리던 오필리아는 어느 밤 요정의 인도를 받아 신비한 미로의 중심에 이르러 기괴한 모습의 생명체 판(더그 존스)을 만난다. 판은 오필리아가 지상에서 시들어버린 지하 세계 공주의 환생이고, 세개의 마법 열쇠를 손에 넣는다면, 왕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날부터 오필리아는 밤이 되면 마법 열쇠를 얻기 위해 함정을 통과하는 모험을 거듭한다.

어릴 적부터 미로에 매혹되었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는 <악마의 등뼈> 이후 다시 돌아간 스페인 내전에서 깊은 땅밑에 숨겨진 미로를 발견했다. 거대한 두꺼비와 눈동자없는 ‘창백한 남자’가 오필리아를 시험하는 그 미로는 위협적이면서도 코믹한 괴물들이 뛰어나오던 <라비린스>의 미로와는 다른 곳이다. 그곳에서 현실은 유예되지 않고, 거짓은 용서받지 못하고, 용기는 그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아서 래컴의 일러스트에서 영감을 받은, 어둡고도 모호한 세계. 그러나 오직 진실로 통과해야 하는 그 세계는 파시즘에 맞서는 젊은이가 고문받다가 동지의 이름을 말하지 않도록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바깥세상보다는 나은 곳일지 모른다. 델 토로는 “진정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는 죽은 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라고 말했던 괴담 <악마의 등뼈>의 역설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는 것이다.

<판의 미로…>의 놀라운 점은 판타지와 현실이 한치의 어긋남없이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파시즘을 추종하는 비달의 무리는 괴물 두꺼비와 비슷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진흙투성이 앨리스가 되어 지상으로 올라온 오필리아는, 가혹한 규율을 재촉하는 시계 소리에 쫓기곤 한다. <크로노스> <악마의 등뼈>에서 그랬듯 델 토로에게 아이들은 살아남고자 순수를 지켜야만 하는 존재이나, 그 싸움의 끝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델 토로는 다만 위로하고 감싸안는다. 가정부 메르세데스의 자장가 선율로, 지상보다 눈부신 빛이 쏟아지는 지하 궁전으로, 델 토로는 빼앗긴 아이들의 세계를 가만히 안아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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