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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손님> <그 해 여름> 배우 김중기

“악역을 연기할 때 해방감을 느낀다”

“운동권 청춘의 후일담”인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로 김중기는 처음 얼굴을 알렸다. 그러고 나서 독립영화의 주연을 지나 충무로의 조연계 진입을 시도하는 것 같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는 겉돌았다. 배우로서의 매력으로 평가되기보다는 학생운동의 기수로 활동했던 경력이 더 많이 알려지는 이상한 장애가 뒤따랐다. 그러나 2002년 <선택>에서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 역을 해낸 뒤로 그의 연기가 짐을 좀 덜었다는 느낌이다. 김중기가 올해 들어 맡은 역은 악한 자이거나 나사 풀린 자다. 그게 꽤 잘 어울린다. 갑자기 그가 스타급 배우가 된 것은 아니지만, 배우의 기초적인 살림이 의미가 아니라 본능이라고 가정할 때 요즘 들어 생생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강적>에서 이미 악역을 한번 했고, 11월 말 같은 날 개봉한 두편의 영화에도 굳이 선하다고 말하기는 힘든 조연으로 출연한다. <그 해 여름>에서는 취조실의 형사로 잠깐 나와 극의 정서가 뒤바뀌는 기점에서 기폭제 역할을 한다.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는 주요 조연 중 하나로 나와 한심하지만 동정을 주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주변의 속물적 인간형을 연기한다. 서울대학교 조국통일특별위원장 출신 김중기가 아닌 배우 김중기, 김중기의 인간극장이 아닌 배우극장, 이번만큼은 거기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나눴다.

-첫 출연작인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를 기준으로 보면, 올해가 연기생활 10년째 되는 셈이다. 알고 있었나. =생각 못하고 있었다. 벌써 그렇게 됐네. 그 영화는 내가 연극원 1기로 들어가서 3학년 때 했던 건데.

-어떤 감회가 드나. =10년 지났다는 거야 지금 말해줘서 안 거고, 감회보다 아쉬움이라면 배우 잠시 접고 프로듀서하고 영화잡지 온라인 편집장 몇년 했던 거다. 배우로서 중요한 시기를 그렇게 보낸 게 좀 아쉬운 생각이 든다. <북경반점>이 99년 봄 정도에 개봉했는데, 그러고 나서 다른 영화를 하기로 약속하고 기다리다가 잘 안 돼서 생활고 때문에 회사를 다니게 됐던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어떤 식으로 기억되나. =다시 한번 찍어보고 싶은 영화다. 그러면 영화적으로 더 잘 나올 것 같다. 어쨌든 그 영화를 하면서 나의 전사가 알려졌고, 그래서 처음에는 쉽지가 않았다. 그거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내 운명 같은 건데, 지금이야 뭐 그런 것에 신경 안 쓰고 편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요새 어떤 작품에 출연했는지 궁금하여 인터넷을 뒤졌는데 <아주 특별한 손님>의 명은이 삼촌 역에 대한 소개는 없어도 학생운동 이력은 올라와 있더라. 그게 참 오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전보다 자유로워진 것 같다. 스스로도 그렇고. 어제도 술 먹는데 그런 이야기가 잠깐 나와서 민망하긴 했다. 술이 좀 많아지고 옛날이야기를 하다보면 가끔 그 얘기가 나오긴 한다.

-<선택> 개봉 즈음 인터뷰 때 이런 말을 했다. 비전향 장기수들을 한번 만나보는 게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홍기선 감독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이유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때 너무 그 캐릭터에 빠져들어서 좋은 연기를 못했던 것 같다는 것이었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배우로서도 공부하는 입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너무 부담스러워 내내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화장실 가서 혼자 울고 그랬다. 연기에 대한 부담이야 물론이지만, 그것보다 영화 내용이나 캐릭터 부담 때문에. 내 이력과 상관없는 거라면 연기에 대한 부담만 있었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역할이 그렇다보니 내 인생에 대한 평가도 담길 것 같고 해서 부담이 컸던 것 같다. <선택> 때는 그래서 그런 걸 좀 잊어버리고 자유롭게 캐릭터로만 들어가보자 한 거다. 그런데 그것도 막상 해보니 초반에는 쉽지가 않더라. (웃음)

-그럼 어떻게 극복했나. =배우란 게 여러 타입이 있는 것 같다. 처음부터 자기 캐릭터를 갖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좀 늦는 편이다. 그게 좀 오래간다. 그러다가 상황이 닥치면 서서히 괜찮아진다. 게다가 그때는 다행히 감독님이 순서대로 찍어서 도움이 됐다.

-올해는 꽤 여러 작품에 출연한 해가 아닌가 싶다. 그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손님>의 배역이 단연 돋보인다. =이윤기 감독과는 세 번째 작업하고 있다. 잘 안 보였겠지만(웃음) <여자, 정혜> 때는 우체국장으로도 출연했다. <러브토크> 하기 전에는 이윤기 감독이 연출했던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장현성하고 배종옥 선배가 주연이었는데 현성이의 형 역할이었다. 죽음을 며칠 안 남겨뒀지만 쾌활하게 살아가는 역이었다.

-<러브토크> 때는 전남편 역으로 나와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여하튼 그런 비중있는 악역을 맡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제대로 악역을 맡은 건 처음인데, 이전에 <정글쥬스> 할 때 악역이라기보다는 약간 핀이 나갔다고 그래야 하나, 마약쟁이인 마약상으로 나온 적은 있다. 사실 일상에서 그리 착하게 사는 건 아닌데, 적어도 겉으로는 악해 보이지 않게 사니까 오히려 그런 악역으로 더 잘 어울려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대개 악역을 잘하는 사람이 일상에서는 전혀 아닌 사람이 많다고 하지 않나. 내가 뭐 선하게 산다는 건 아니지만…. 흔히 이야기하기에 내성적인 사람들이 악역을 즐겁게 한다고 한다. 나도 그런 케이스인 것 같다. 일상에서 못 풀고 사니까. 말하자면 긍정적인 의미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세대에는 해소되지 못한 욕망 같은 것이 있는데 그런 게 악역 할 때 자유롭게 분출되는 것 같다. 일종의 정신치료 기능이랄까. 나 같은 사람한테는 악역을 연기할 때 어떤 해방감이 있는 것 같다.

-<아주 특별한 손님>의 작업은 즐거웠나. =(웃음) 사실 노는 걸 좋아해서 이번에도 좀 놀 수 있을까 했던 건데…. <러브토크> 때는 술 진짜 많이 먹었다. 촬영 끝나고 몇 시간 되지 않는 동안 짬을 내서 먹고 그랬다. 숙소가 거의 한집에 다 있었다. 거기가 LA 한인타운이지만 멕시코계가 많이 사는 동네였다. 갱단도 많고. 만날 술 먹고 노래방기계 갖다놓고 새벽까지 노래 부르니까 동네 주민들이 불평하고 경찰도 오고 그랬다. 그런데 영화 찍는 사람들이 좀 험해 보이지 않나. 그래서인지 나중에는 다 포기하더라. (웃음) 그래서 이번에도 노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했는데, 너무 짧은 기간이라 그럴 시간이 전혀 없었다. 한번은 내가 일이 있어 빠진 날이었는데, 동네 연못에 산천어 키우는 집이 있어서 스탭들이 지나는 말로 그거 잡아먹으면 맛있겠다고 했더니 주인이 잡을 실력 되면 잡아서 한번 먹어보라고 그랬단다. 그런데 정말 귀신같이 다 잡아서 구워먹었다고 하더라. (웃음) 그날 없었던 게 아쉽다.

-영화 속 명은이 삼촌 역할은 사실 그리 호감가는 인물이 아니다. 신의도 가지 않고, 하지만 또 그리 미운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속물형을 연기하는 건 어땠나. =감독님이 언젠가는 내게 진짜 악역을 한번 맡기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마 그런 연장선인지 모르겠다. 약간 편집되면서 앞뒤 설명이 빠지긴 했는데, 자기가 사기꾼이기도 하지만 사기를 당하기도 하는 덜떨어진 인물이다. 본색이 아주 밑바닥까지 간 친구는 아니다. 주변에서 그런 사람 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악하지 않은 사기꾼들. 어제 (오)광록 형이 은근슬쩍 연기에 대해 말을 해주시더라. 사기꾼 역에 카리스마가 있을 필요까지는 없지만, 배우로서의 멋이 좀 덜 들어가 있다고.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더라.

-동의가 되는 평가인가. =그게 참 어려운 문제 같다. 물론 배우는 어떤 역을 해도, 말 그대로 길거리 거지를 하더라도 그 배우만이 가진 멋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스스로 좀 아쉬운 건 있다.

-캐릭터만 놓고 본다면 어떤 점이 흥미로웠나. =그게 어제 광록이 형이 이야기한 것하고 약간 부딪히는 부분인데 <러브토크>나 <강적>과 달리 이번에는 장르적인 전형성을 가진 캐릭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광록이 형이 지적해준 배우의 멋은 좀 빠졌지만 주위에 있을 만한 인물로는 그럭저럭 표현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좋았다. 장르적인 전형성을 갖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

-대사의 분량으로만 치면 거의 주연급이다. (웃음) =그렇게 치면 (한)효주는 주인공이 아닐 거다. (웃음) 아마 (김)영민이하고 내가 대사가 제일 많을 거다.

-동네 사람들하고 모여 앉은 신, 특히 마을 형님하고 벌이는 만담 수준의 말싸움이 제일 볼만했다. =거기에는 애드리브가 많았다. 주방에서 인삼 이야기하는 대사도 그렇고, 여자한테 옛날에 너랑 사귀었네 마네 하는 부분도 그렇고. 그 신에서 뒤통수를 세게 맞는데 강도가 하도 세서 깜짝 놀랐다. 아닌 게 아니라 감독님이 어디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뒤통수는 꼭 한번 맞게 하겠다고 했는데, 막상 맞고 나니 너무 세서 깜짝 놀랐다. (웃음) 인삼 어쩌고 하는 신은 몇 가지 버전으로 찍었다. 그중 하나는 술에 너무 취해서 완전히 잘렸다. 원래 대본에는 얘가 형을 위해서 산삼을 하나 샀는데 사기를 당한 거라는 내용이 있다. 사기치면서 사기당하는 인간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만 말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더라. 그래서 인삼에 관해 인터넷을 좀 뒤져보고 나서 이런저런 대사를 만들었다. 4분 정도 찍었는데 완성본에 나온 신은 1분30초 정도 되는 것 같다.

-이건 좀 넓은 의미에서의 질문인데, 요즘 충무로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조연 내지는 자기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조연들은 어떤 전략들을 갖고 있다. 본인도 염두에 두는 것이 있나. =어느 정도 알려진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또 시나리오를 굉장히 많이 받아야 전략도 서는 거고. 아직 그런 경우는 아닌 것 같다. 다만, 내가 만약 악역을 한다면 기존 충무로 배우들하고 다른 악역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악역도 사실은 내면이 있어야 하고 갈등 같은 게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 부분에서는 내가 장점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한다.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 말을 하니 생각나는데 <그 해 여름>에도 악역으로 짧게 우정출연한다. 거기에 나온다고 하여 일부러 영화를 보러 갔는데, 사실 처음에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냐며 중얼거리면서 영화를 봤다. 하지만 짧게 나와서 강하게 각인시키고 퇴장한다. 그 작품은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 =그 영화는 지지난해부터 준비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는 후배가 당시에 이 영화 프로듀서를 했었다. 사실은 캐스팅 연결해주는 것 때문에 처음 알게 됐던 건데… 내가 (장)동건이하고 연극원 동기다. 프로듀서가 전화해서 “형, 동건이한테 이 시나리오 좀 전해줘” 하기에 “그래, 시나리오 한번 보내봐라” 그랬는데 받아보니 좋더라. 그래서 동건이한테 전화했는데, 전화가 안 되더라. 아니, 그전에는 됐는데 말이다. (웃음) 물론, 최근에는 다시 연락이 돼서 만나기도 했다. 어쨌든 그때 시나리오를 못 전해줬는데, 나한테 “형은 해보고 싶은 역 없어요” 하고 묻더라. 지금 유해진씨가 맡았던 프로듀서가 마음에 든다고 했더니 나이차 때문에 안 된다고 하더라. 그러고 나서 형사 이야기를 꺼내기에, 짧지만 강하게 눈에 띄는 역할이라 좋다고 했다. 영화가 잠깐 중도 하차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잊어버리고 지냈는데, 조근식 감독이 촬영 직전 일주일인가 이주일 전쯤에 그 역할을 찾다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사실 조연이지만 그 장면에서 뭔가를 주지 않으면 앞뒤로 주인공들의 바뀐 정서가 전달이 안 되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이다.

-솔직히 그 역이 잘 어울릴지는 몰랐다.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건 절대 악이라고. 그게 주효했던 것 같다.

-되도록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영화를 보며 어디쯤에 나올까 궁금해하다 문득 플래시백 장면을 통해 주인공 수애의 아버지인 좌파 지식인, 말하자면 영화 속 대사로 치면 “빨갱이”로 나올 거라고 혼자 짐작했다. 그러다가 악독 형사로 나온 걸 보고 선입견이란 게 정말 무서운 거구나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내가 나오는 장면은 원래 1회차만 하기로 했던 건데, 내리 사흘을 찍었다. 그러는 동안 이병헌씨는 한 200대 정도 맞았을 거다. 이병헌씨하고는 그전에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도 아닌데다가 조근식 감독은 일부러 연기를 위해서 병헌씨하고 인사도 하지 말고 바로 슛 들어가자고 하더라. 부담이 많았다. 이 장면이 잘 안 나와서 리얼리티가 떨어지면 병헌씨가 그렇게 주저앉는 게 설명이 안 되니까. 때리는 장면만 하루 종일이었다. 그 장면도 애드리브가 많았다. 시나리오에 있던 대사에 애드리브를 많이 넣었다.

-다음 출연작도 궁금하다. =<캬라멜>이라는 영화에서 아버지 역할이다. 요즘 유행하는 일본 멜로와 유사한 영화인데, 고등학생 아들을 둔, 일상에서는 무능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걸로는 고고한 화가 아버지다. 함부로 작품을 팔지도 않는다.

-배역이 벌써 고등학생 아버지쪽으로 넘어가는 건 좀…. =나도 벌써 이런 걸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보통의 아버지가 아닌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세속에서 떨어져나온 듯한 젊어 보이는 아버지라 괜찮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해 90년대 출연작들을 보면서는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는 역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고 보기는 힘들어도 훨씬 안정되어 보이는 건 사실이다. =<선택> 찍으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됐던 것 같다. 말하자면 자연인 김중기에 대한 정리. 예전에는 연기를 해도 잘해야 하고, 영화를 해도 욕 안 먹을 영화만 해야 하고 등등의 부담이 아무래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선택>을 찍고 나서 보니까 필요없는 자의식이랄까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감독이나 동료 배우들을 대할 때도 굉장히 편해진 것 같다. 마음이 열리니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 좋아지고, 연기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물론, 스타는 되고 싶다. 하지만 그건 뭐 내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욕심이 있다면 팔십까지 연기로 먹고살았으면 하는 것하고, 지금보다 연기를 더 잘하고 싶다는 거다. 배우는 자기 일상이나 경험치를 넘어선 것들을 표현해야 할 때가 많지만, 결국 연기의 폭이나 깊이는 배우 자신한테서 나오는 것이지 없는 게 나오는 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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