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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의 야심찬 시도 <다케시즈>

기타노 다케시의 야심찬 시도. 절반의 실패와 성공.

<다케시즈>의 영어제목은 <Takeshis’>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제목이다. 한편으론, ‘다케시들의’, 라고 말해놓고 나머지는 열어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다음에 놓일 것은 공백 내지는 괄호다. 그냥 무수한 가능성들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12번째 장편영화의 제목을 상상적 빈칸을 남겨두는 것으로 지었다. ‘다케시의’라고 지었다면 덜 이상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 되기’에 관한 영화로 추측되었을 것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말코비치가 자기의 뇌 속으로 들어가 수많은 나르시시즘적 욕망의 얼굴들과 마주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다케시 역시 그 무표정한 얼굴 뒤에 어떤 불완전한 욕망들이 있는지 스스로 궁금하여 탐색하는 영화일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성된 <다케시즈>는 자기애는 고사하고 다케시 특유의 야심찬 내용과 형식의 자멸성으로 가득 차 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다케시즈>의 가제는 오랫동안 <프랙탈>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프랙탈(Fractal)은 만델브로트가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형들의 측량법을 제시하기 위해 75년에 쓴 논문에서 사용한 기하학적 개념어이자 조어다. 프랙탈이라는 용어를 문화적으로 이해하자면 복잡성의 세계 구조를 생생하게 인정하되 동시에 설명 가능하도록 노력한다는 의미가 있다. 혹은 그 복잡성을 이루는 패턴으로서의 유사 반복적 단순성의 연쇄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방점이다. 말하자면, 무디고 딱딱한 합리적 근대의 패러다임을 극복할 수 있는 개념으로 각광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로 친다면 현존하는 감독 중 프랙탈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의 대가는 단연 홍상수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다. 다케시의 이번 영화는 그들과 알게 모르게 사유의 경쟁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다케시는 단수가 아닌 끊임없이 무한대로 이어지는 사이-공간에서의 복수로 스스로를 생각하며, 혹은 정수가 아닌 소수적 인간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의 전체 구조는 당연히 일목요연하지 않다. 그뿐 아니라 ‘연상과 유사’를 통해 뻗어나가는 일종의 미로 구조로 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전쟁터 같고 일본군 복장으로 죽은 척 누워 있는 다케시가 보인다. 그걸 보면서 오시마 나기사의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에서 그가 처음 배우로서 출연했던 걸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군 병사 하나와 눈이 맞아 사살되기 직전 <다케시즈>라는 영화의 타이틀이 뜬다. 이번에는 다시 총격전을 벌이는 어떤 장소로 이동한다. 다케시는 쌍권총을 쥐고 쏘아대는 야쿠자다. 그리고 그건 다시 도박장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출연작이었음이 밝혀진다. 그걸 보면서 갱들은 멋있다는 둥 말들을 해댄다. 다케시는 지금 갱들과 마작을 하고 있다. 마작을 마치고 세트장으로 향한 다케시는 자신과 같은 ‘기타노’라는 성을 가진 피에로 분장의 무명배우 지망생을 만난다. 다케시가 여기서 1인2역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소나티네>의 클라이맥스를 변조한 듯한 장면의 촬영이 세트장에서 끝나갈 때쯤, 기타노 다케시의 이야기는 그와 닮은 사내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잠에서 깨어나는 사내.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의미가 깊다. 이후로 영화는 편의점 직원이자 배우 지망생인 남자의 잠의 미로 혹은 꿈의 미로를 반복하면서 진행된다. 이를테면, <3-4X10월>의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전체 구조를 가져와 잘게 나누어 ‘그 안의 안으로’라는 방식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다. 남자의 꿈이 절정에 달하는 곳은 <하나비>의 바닷가를 가져온 대목이다. 거기에는 사무라이들도 나타난다(<자토이치>). 그 남자의 꿈의 연속이 끝날 즈음 그는 자기에게 모욕적으로 사인을 해준 기타노 다케시의 태도를 갑자기 기억해내며 칼을 들고 그를 죽이기 위해 찾아간다. 그때 이야기는 다시 초반의 기타노 다케시로 넘어간다. 영화 속 기타노 다케시가 그 남자를 상상한 것인지, 그 남자의 꿈 안에 기타노 다케시가 있었던 것인지 모호해진다.

비트 다케시와 기타노 다케시, 유명 코미디언과 유명 감독, 두개의 정체성을 따라 이 영화가 그 둘 사이에 놓인 갈등에 관한 묘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것보다는 어떤 형식의 극한을 추구해보고 싶었던 야심이 더 강하다. 때문에, <다케시즈>는 자기 반영성이 깃든 영화 만들기의 계보와도 큰 상관이 없어 보인다.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와 그를 닮은 무명의 배우 지망생이라는 인물 구조를 세워놓고 세계도 그 두개로 나눈다. 나머지 인물들도 그렇게 대개 1인2역을 하는 식으로 두 세계에 각자 다른 인물들로 산다. 그러나 다시 그 두개의 구조는 기타노 다케시 자신을 통해 겹쳐지는 것이다.

어쩌면 <다케시즈>는 <하나비>에서 여러 명이 뒤엉켜 죽어가던 그 총격전의 편집 방식을 확장한 것이다. 몽환적인 편집과 리듬은 중반부까지 확연하게 돋보인다. 후반부가 난삽해지지만 않았다면 중반부까지의 장면은 다케시의 영화 중 가장 철학적인 리듬 중 하나가 되었을 수도 있다. 다케시는 확실히 편집이 중요한 영화를 만드는데, 이 영화에서 이중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인물과 상황들을 연계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연상과 유사라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건 다케시가 단순히 편집을 에디팅이 아니라 몽타주로 이해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표식 중 하나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미와 정서의 생성이라는 측면에서 <다케시즈>의 그 몽타주는 너무 유희적이다.

다케시 영화 중 중요한 것은 몸의 정지와 운동을 이어주는 기이한 속력 그리고 시선의 타이밍이다. 그것이 주춤거리는 것 같지만 폭발하면서 이어져나가는 영화의 전체 편집 리듬과 섞일 때 하나의 느린 소우주적 생성을 한 인간의 몸에서 보는 듯한 영화적 경험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건 단순히 무대 위에서 배운 만담가의 팬터마임적 기술이라고 설명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비>가 말할 것도 없이 그 정점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다케시는 하락 양상의 길을 걷는다. 근작들은 모두 기대 이하다. <하나비>에 이를 때까지 그토록 노력했던 영화감독으로서의 인정투쟁의 길을 뒤로하고, 그가 근자에 바라는 것은 자기를 홀로 진전시키는 것 혹은 그의 말처럼 “종잡을 수 없도록” 홀로 변화하는 것인 것 같다. 이번은 특히 형식의 야심이 내용의 존재 이유를 덮어버린 경우다. 그러나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가진 어떤 가능성을 끝내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리듬은 그냥 만들어질 만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어떤 희망의 단서를 걸고 싶다. 만약, 아는 사이라면 그 리듬을 다듬어 지금껏 완성되지 않은 다른 영화를 꼭 한 번 만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물론, 그 결단 역시 ‘다케시들의’ 무엇 중 하나에 포함되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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