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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토피아 디스토피아] 나쁜 명사(名詞)

영화 <늑대와 춤을>에 나오는 인디언의 이름은 독특하다. 추장은 ‘머리 속의 바람’, 제사장은 ‘새 걷어차기’, 백인 남자와 결혼하는 여성은 ‘주먹 쥐고 일어서’이다. 이름에는 새로 태어난 생명의 미래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머리 속의 바람’은 평원의 고단한 삶을 이끌어가는 부족장에게 요구되는 지혜, ‘새 걷어차기’는 날아가는 새도 이단옆차기로 떨어뜨리는 제사장의 신통력, ‘주먹 쥐고 일어서’는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에게 소속돼야 부족에 잔류할 수 있는 인디언 여자에게 요구되는 질긴 생명력을 염원하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자연친화적이고 시적인 작명법인데, 영화를 볼 당시는 왜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나왔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런 게 아니었을까?

인디언의 이름은 사람의 동작이나 자연의 한순간적 상태를 묘사한다. 이건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가정한다. 삶도 순간성의 사건이다. 이들의 이름은 기꺼이 자연의 한순간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한다. 이런 작명법은 무엇이 되고자 기원하는 자동사형이다. 우리의 작명 관습은 무엇을 갖고자 하는 타동사형에 기초해 있다. 염원의 대상은 명사의 형태로 제시된다. ‘정숙(貞淑)이’는 단정하고 맑은 여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인데, ‘정숙’(貞淑)이란 추상명사를 목적어로 두고 이 상태를 염원한다. 그런데 정숙(貞淑)은 자연에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관념적 가치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숙을 욕망할 순 있지만 정숙이라는 존재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이런 작명관습은 가치라는 관념을 추상명사 형태로 축적한 문명화된 사회의 일반적 행태다. 아예 추상명사가 부족한 원시부족한테 자동사형의 작명이 일반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러니 인디언 이름에 대해 터져나오는 반사적인 웃음은 사실은 명사형을 욕망하는 현대인이 동사형으로 행동하는 고대인에게 보내는 야유일 터이다.

발달된 사회일수록 명사가 풍부하다. 삶의 모든 경험과 정신적 생산물들이 결국은 명사라는 창고에 축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고에 이런저런 물건을 쌓아놓다보면 그중에 불량품도 있게 마련이다. 정신의 창고를 좀먹는 나쁜 명사 중에 사람의 정체성과 관련된 말만 꼽아봐도 ‘전과자’, ‘이혼녀’, ‘지방대 출신’, ‘코시안’(한국인과 아시아인의 혼혈), ‘편모’ 등 숱하다. 이런 유형의 명사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현재의 속성으로 고정시켜 하나의 범주를 만든다. 범주화의 동기도 처음부터 위계화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이혼녀’라는 명사가 별도로 범주화되는 것은 노처녀나 유부녀와 구별하고자 하는 위계화의 욕망 때문이다. ‘지방대’, ‘코시안’, ‘편모’ 등도 비주류로 총칭해 배제하고자 한 욕망에서 발생한 범주들이다. 소통의 효율을 위해 이런 말들이 불가피한 경우가 드물게 있지만, 사실은 그런 경우도 위계화의 욕망이 없다면 얼마든지 다른 표현으로 대체 가능하다.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한 나쁜 명사는 그 안에 포함되기를 다들 꺼린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소유권을 주장하는 명사도 있다. 돈 좀 있고 자리 높고 발언권있는 ‘사회지배층’을 언론은 종종 ‘사회지도층’이란 작위로 부른다. 노사분규현장에 경찰이 투입되면 언론은 ‘공권력 투입’이란 제목을 애용한다. 공권력은 행사되는 추상적 힘이지 투입되는 물리적 힘이 아니다. ‘경찰력 투입’을 ‘공권력 투입’, ‘사회지배층’을 ‘사회지도층’으로 표현하는 것은 단순한 정치·경제적 사실을 미학적 가치로 날치기 통과시키는 경우이다. 좋은 명사의 나쁜 사용, 사실을 당위로 돌려놓는 자연주의의 오류이다. 위계화의 욕망이란 좋은 명사에 무임승차하고 나쁜 명사를 남에게 돌려놓고자 하는 지배의 기술일 뿐이다.

종종 파괴적인 것은 창의적이다. 불온한 욕망으로 가득 찬 나쁜 명사들을 파괴하는 것, 범주화와 위계화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 그건 명사로 규정하지 않고 인디언처럼 복합동사로 오래 움직임을 지켜보거나 움직임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창의성의 명명을 인디언 식으로 하면, ‘나쁜 명사 깨고 복합동사와 춤을’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창의성은 수시로 포장지를 갈아치우는 기술이 아니라 포장지를 찢어발기는 파괴적인 계보학적 상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