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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리워라 80년대, <웨딩 싱어>
2001-02-16

처음엔 그랬다. 딴은 누구 못지않은 영화광인데다 나름대로 분석적 기준도 갖추었노라고 혼잣말하며,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은 딜레탕트의 유혹이 은근히 손짓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내 또다른 구석에서는 으레 그 비겁한 버릇이 고개를 들었다. “영화로 먹고사는 사람들 앞에서 꼴값이지.” 하긴, 그건 인지상정인 거다. 누군가가 내 앞에서 나인 인치 네일스에 대해 침을 튀기며 떠들어대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줄곧 독자의 입장이었던 내가 이 지면에 채워질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의 전전긍긍이다. 좋아하는 영화는 정말 셀 수 없을 정도지만 주제에 보고 들은 건 있어서 아무 거나 집어들면 ‘가오’가 서지 않는다는 속물적 계산. 정작 ‘묵직한’ 작품을 고른다 하더라도 ‘쪽팔림’ 없이 소화해야 한다는 현실적 어려움 따위가 머릿속에서 복잡한 플롯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바닥’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선 어김없이 왁자하게 쏟아내곤 했던 ‘구라’들이 왜 이럴 땐 당최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쯧쯧.

결과론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구원’은 거기 있었다. 잘난 체하는 버릇이야말로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지병(持病)이라고 무수히 자성해 왔건만, 결국 ‘제 버릇 남 못준다’며 한탄하는 사이 지나간 학창 시절이 떠올랐던 것이다. 음악 좀 들었답시고 ‘빈 수레가 요란한’ 티를 내고 다녔던 철없던 시절 말이다. 그런데 정말 희한하게도, 그 와중에서 눈앞의 걱정은 뒷전인 채 그 시절 기억들에 사로잡혀 정신나간 듯 히죽거린 것은 왜일까? 그 이유가 바로 이 영화 <웨딩 싱어>이다.

추억을 소구하는 기제들은 물론, 개인마다 천차만별일 터다. 그리고 나의 경우 그것은 (거의 언제나) 음악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지난 20년간 쉼없이 지속해온 취미생활인데다 몇년 전부터는 아예 직업이란 이름으로 함께하고 있는 데에야, 음악에 얽힌 얘기를 빼놓고는 인생 자체가 도무지 성립되지 않을 정도란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웨딩 싱어>란 영화를 유난히 특별하고 따뜻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연유다. 소박한 사랑얘기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내러티브도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영화의 전편에 걸쳐 흘러/튀어/깔려나오는 ‘팝송’들의 향연이야말로 내 성장기 기억 속에 살아숨쉬고 있는 생생한 흔적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음악에 눈을 떠가던 10대 초반 소년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종횡무진하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뮤직비디오 버전과도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나의 10대 시절은 80년대와 함께 시작해서 80년대와 함께 끝을 맺었다. 그것은 곧, 80년대가 불안했던 내 사춘기의 감수성과 온전히 궤를 같이한 시공간이었음을 의미한다. 소피 마르소와 피비 케이츠와 브룩 실즈의 사진을 코팅해 다니고, 어설프게 쌍절봉을 휘두르며 이소룡을 (예의 그 특유의 표정까지) 흉내내던, 나이키 운동화을 사기 위해 용돈을 모으고, 를 보기 위해 ‘수련장’ 살 돈을 삥땅치던 꼬마들 틈에서 혼자만 다 커버린 듯 느꼈던 시절. 돌아보면 유치한 건 마찬가지였던 것을,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와 듀란듀란만이 내 열정의 유일한 소통구라고 굳게 믿으며 롤러스케이트장에서 당대의 히트곡들을 수렴하고는 차비까지 털어 ‘빽판’을 사들고 한 시간 넘게 집까지 걸어다니곤 했던 게 스스로 기특했던 거다.

1985년 한때를 배경으로 설정한 영화 <웨딩 싱어>에는 80년대 전반을 수놓았던 ‘주옥 같은’ 팝송들이 시종일관한다. 배경음악으로 혹은, 캐릭터들의 입과 주방 라디오와 거실TV 따위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들은 킹키 보이스를 필두로 프랭키 고우스 투 할리우드와 캐자구구, 마돈나와 네나를 거쳐, 뉴 오더와 데이비드 보위와 빌리 아이돌(그는 직접 출연도 했다!) 등등 여기에 다 적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뮤지션들의 히트 넘버들을 아우르고 있고, 그것은 곧 80년대 히트 차트의 재연인 동시에 내 개인적 음악편력사의 1장 1절에 다름 아니다. 음악 외적인 자잘한 재미들도 아련한 향수를 자극한다(<로미오와 줄리엣>에 빚을 지고 있음이 분명한 이름의) 두 주인공 로비(애덤 샌들러)와 줄리아(드루 배리모어)의 주변 인물들은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와 보이 조지를 패러디한데다, 심지어 항공사의 발권담당 직원은 플럭 오브 시걸스의 멤버를 닮았다.

뿐만 아니다.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댈러스> <마이애미 바이스> 등 당시 최고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들은 물론이고, 꼬마가 쓰고 나온 프레디(<나이트메어>) 가면, 나이트클럽의 브레이크 댄스 경연, 700달러나 하던 초창기 CD플레이어, 밴 헤일런의 2집 앨범 티셔츠 따위의 소품들은 모두 80년대를 추억하게 만드는 유쾌한 연결고리들로 작동하고 있다. 마돈나의 을 위시한 당대 히트곡들의 노래말을 대사로 확인하는 재미는 또 어떤가.

물론 <웨딩 싱어>의 동화 같은 사랑얘기에서 그 어떤 심각한 문제의식이나 근원적 성찰 같은 것을 발견하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소중한 옛 기억들을 재회시켜준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30대 아저씨가 된 내게 말로 설명 못할 만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아, 이 얼마나 위대한 자질구레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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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은석/ KBS2TV <뮤직타워>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