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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0일부터 회고전 열리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세계

초현실주의의 정수를 본다

<신뢰>, 1964~65

서울시립미술관은 어느새 이른바 서양 미술사 거장들의 국내 출입구가 되었다. 샤갈, 마티스, 피카소에 이어, 3년여 각고의 준비 끝에 르네 마그리트의 전시를 성사시켰다. 12월20일부터 2007년 4월1일까지 열릴 <초현실주의의 거장 - 르네 마그리트전>은 무려 100일이 넘도록 서울 한복판에서 성대하게 치러질 국내 최초 회고전을 표방했건만, 르네 마그리트는 이 대형 이벤트 이전부터 일찌감치 간접적 경로를 거쳐 우리의 시각 경험 속에 상주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인적 드문 을씨년스런 벌판을 배경으로 상체를 꼿꼿이 세운 중절모 신사의 강직한 뒷모습은 외압에 굴하지 않는 언론사의 이미지를 굳힐 목적으로 <조선일보>가 ‘할 말은 하는 신문’이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한짝으로 사용했던 도상이었다. 여기서 할 말을 한다는, 그 중절모 신사의 친숙한 뒷모습은 마그리트의 전작들을 통해 발견되는 단골 아이콘이기도 하다. 한편 불과 몇달 전까지 신세계백화점 명동 본점이 보수공사 기간 중 가림막으로 사용한 외피 위로 마그리트의 <골콘다>가 크게 확대 인쇄되어 건물 전체를 포장하고 있었으니, 그곳을 지나던 보행자와 승객은 매우 일과적으로 특정 작품을 뇌리에 각인시킨 꼴이 되었다. 더욱이 <골콘다>는 마그리트 자신이 거주하기도 했던 브뤼셀 지역의 구식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복층 건물을 배경으로 마그리트가 생전에 즐겨 입었던 두툼한 오버코트와 중절모 차림의 신사가 동일한 패턴으로 무한 복제되어 허공 위로 헬륨가스 풍선마냥 부유하는 모습을 담는다. 이처럼 현실에서 결코 가능할 법하지 않은 낭만적 설정을 차창 너머로 구경한 승객은 일시적으로 해방감을 맛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밖에 이미 국내 인문·교양 분야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굳힌 미학자 진중권씨의 <미학 오디세이> 총 세권 중 둘째 책은 겉표지부터 목차 구성에 이르기까지 마그리트의 연대기적 실험작들을 디딤돌 삼아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렇듯 두 세기 전 태어난 어느 벨기에 화가(1898년생이다)의 인기는 세기를 초월한다. 그 때문에 그가 ‘초현실’주의자로 불리는 걸까?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마그리트의 흔적은 주변에서 다양한 용도로 인용되는 실정이니 말이다. 광고 효과를 노려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원화를 변용 및 전용시키거나, 그림이 갖고 있는 일러스트 한 느낌만 부각시켜 벽면 장식에 활용하거나, 양껏 퍼가도 마를 줄 모르는 인문적 상상력의 급수원 노릇을 하거나인 것이다.

정통 초현실주의자들과 차별화 된 논리적 사고

현재 그의 위상은 서양 미술사에서 엄연히 초현실주의라 일컬어지는 특정 사조의 대표 거물로 분류되는 실정이지만 그의 출발은 조촐했고 또한 현실적이었다. 제도 미술 교육을 받았으되,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초현실주의 선언문>이 채택 발표된 1924년보다 2년이나 더 지난 1926년까지도 그는 벽지 제조 공장에서 포스터와 광고물을 디자인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비상업적 조형작업을 남겼지만 당시 남긴 작업들은 어디까지나 인상주의, 미래주의, 입체주의에 경도된 것이었다. 상업 예술가로 출발한 그의 이력은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이런 예가 일단 결코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팝아트와 동격으로 대우받는 앤디 워홀은 본래 잡지 일러스트와 광고 디자인으로 해당 분야에서 이름을 얻지 않았던가?

<회귀>, 1940

국내 개최 예정인 마그리트 회고전 제목이 ‘초현실주의의 거장’으로 뽑혔다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가 구사하는 초현실적 구도와 판타지로 가득한 내용물은 선언문까지 채택한 정통 초현실주의자의 것과는 출발부터 상이한 것이었다. 초현실주의 운동이란 1차대전 참상의 책임을 산업혁명과 이성중심주의가 지배한 서구 근대주의에서 찾으려 든 다다(Dada)의 반체제적 움직임에서 영향을 받아 발생했다. 때문에 합리주의에 정반대되는 비이성을 전폭 지지했고, 1900년 출간되어 인간 주체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깊은 공감을 표했으며, 나아가 꿈같은 상태를 표현의 장으로 연장시키고자 자동기술법을 개발했다. 창작자의 내면에 갇혀 있는 욕망을 해방시키자는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드러내는 한 방편으로 지지한 자유연상법에서 가져온 것이다. 초현실주의 운동의 출발은 브르통, 아라공, 엘뤼아르 같은 당대 문인들이 중심이 된 문학 운동이었으나, 무의식과 꿈, 그리고 상징성은 조형언어를 다루는 미술인에게도 큰 매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역설적인 사실과 직면한다. 정작 초현실주의 운동의 이론적 지주로 추앙받던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걸로 전해진다. 초현실주의자들에 대해 그가 느낀 유일한 관심사는 그들의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의식에 대한 개념적 오해와 그들 주장의 허구성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이트 이론에 따르면 의식 상태에서 무의식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채택한 자동기술법에 대해서도 에고(ego)의 개입으로 체계화된 것으로 이해했다.

이에 반해 마그리트는 정통 초현실주의자들이 천착했던 비성주의나 꿈에 대한 몰입과는 선을 긋고 있었다. 작업에서 묘사된 대상들은 명료했고, 논리적 틀거리 안에서 이야기의 얼개가 완성되었다. 생전에 자신의 작업을 상징적으로 풀이하려는 외부의 시도에 대해 깊은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가 작품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꿈이라는 용어 역시 철저히 ‘스스로 통제 가능한 꿈’을 의미했고, “잠재우는 것이 아닌, 일깨워주는 것이 꿈”이라고 역설했을 정도로 논리적 사고를 중시했다. 정통 초현실주의의 이론적 세례에서 자유로웠던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그렇다면 무얼까? 흔히 그의 초현실적 화면 구성은 그가 1920년대 초 처음 접한 이탈리아 화가, 드 키리코로부터 비롯된다고 전해진다. 광각렌즈로 바라본 것처럼 굴곡있는 원근법적 구성과 신고전주의 대리석 두상과 원통 그리고 고무장갑처럼 별 상관없는 오브제들이 널찍한 광장 한복판에서 결합되곤 하는 드 키리코식 조형문법은 마그리트는 물론 후대 초현실주의 일반에게 지대한 영향을 줬다.

한편 내용의 측면에서 그는 추리단편소설 <검은 고양이>의 저자이기도 한, 미국 낭만주의 문필가 에드가 앨런 포의 영향을 받았다. 이미 국제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1965년, 즉 그가 타계하기 두해 전 그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회고전의 초대작가가 된다. 처음이자 마지막 뉴욕 여행길에서 그는 포가 머물던 장소들을 순례할 만큼 그에 대한 존경심이 각별했다. 마그리트는 포의 <Tales of Mystery and Imagination>에 깊이 감화되어 소설이 포섭하고 있는 판타지적 무대, 기이한 상황 설정, 비이성적 행동과 변태, 광기, 도박과 알코올 중독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 더욱이 죽음이 짙게 드리운 등장인물과 생사가 교차하는 서사구조야말로 그가 어릴 적 받은 어떤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다. 마그리트의 생모는 그의 유년 시절 숱하게 자살을 기도했고, 결국 그의 나이 14살 되던 1912년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는데, 며칠이 지나 강물에서 건져 올린 여인의 얼굴은 잠옷으로 덮어 씌워 있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어린 마그리트는 익사체의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에서 곧잘 불러오곤 했는데 어릴 적 체험을 투영한 대표작이 1928년 완성한 <연인들>이다. 백색 두건으로 얼굴을 몽땅 뒤집어 쓴 두 남녀가 서로 뺨을 맞대고 있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이후 더 큰 사이즈로 두건을 쓴 채 키스를 나누는 남녀로 변형되어 발전한다.

현대 언어철학에 필적할만한 통찰력

<심금>, 1960

정통 초현실주의와 마그리트를 가르는 또 다른 참고 자료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여러 연작이다. 1966년 <말과 사물>을 펴내면서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에 관한 화론을 첫장에 전진 배치한 바 있는 철학자 미셀 푸코는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관한 에세이 한편을 1968년 내놓는다. 이 글은 이후 수정 보완되어 1973년 재간되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하단에 그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 기이한 그림에 대해 프랑스의 문제적 철학자는 공감하는 바가 컸던 모양이다. 말과 사물의 관계 혹은 사물과 그것의 이름 사이의 연관성에 깊은 회의를 표해왔던 마그리트는 직관에 있어서 전문 언어학자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통찰력을 가졌다. <마그리트>를 지은 저자, 수지 개블릭은 마그리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설파하기 위해 한장 이상을 할애한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그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기술한 마그리트의 일견 비상식적 언어관은 단어와 사물 사이의 관계가 논리적 개연성이 아닌 하나의 관습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현대 언어철학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름이란 사물의 본질을 재현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 짓기라는 관례에서 탈피할 때 비로소 사물은 그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언어학을 위한 제도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마그리트로선 대단한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남다른 사고방식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군중으로부터 고립된 중절모 신사는 마그리트의 전매특허다. 그는 타인의 시선은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어느 미술사가는 마그리트의 작품을 통틀어 중절모 사내가 최소한 스물다섯점 이상의 작품에서 드러난다고 기록한 바 있다. 앞서 언급한 <골콘다> 속 인물들이 단지 중력에 저항하는 비현실적 인간군상을 장식용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등을 보인 중절모 신사 또한 특정 아이콘의 반복이기보다는 정형적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현실의 이면을 묵묵히 지켜보는 이의 태도를 재현한다. 현실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 비상식적 관점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마그리트는 초현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