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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독자에게] <기적>이 남긴 흔적

“장기이식 같은 거 안 되는 거냐? 정말 안 되는 거야?” 친구인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죽음을 늦춰달라고 애원하는 사내가 있다. 돈도 없고 백도 없었지만 악착같이 일해서 승승장구, 사회에서 직장에서 인정받던 남자. 이제 막 사장으로 승진해 정상에 오른 쾌감을 맛보려는 순간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이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항변한다. 평소 담배도 안 피우고 건강관리도 철저히 했는데 이렇게 죽는 건 억울하다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되삼킨다.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 <기적>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시한부인생이야 TV에서 숱하게 봤던 이야기지만 <기적>은 억지스러운 사랑의 신화를 만드는 드라마가 아니다. <기적>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는 놀랄 만큼 우리 이웃의 얼굴을 닮았다. 선악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얼굴들. 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진실된 삶을 살려 했지만 어디에선가 어긋난다. 아버지와 딸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떻게 오해하고 미워하며 살게 됐을까.

“알고선 그렇게 안 했을 거야. 몰랐던 게지.” 폐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우연히 만난 첫사랑으로부터 과거 자신을 떠났던 이유를 듣게 된다. 모르고 저지른 잘못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난 다음, 아버지는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과거와 마주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천국에 가려면 나를 위해 100명이 울어줘야 한다는데 살면서 그런 100명이 있었던가? 아님, 남을 위해 100번은 울었어야 한다는데 남을 위해 그렇게 운 적이 있던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의 가슴에 못을 박은 남자는 그제야 상대방의 못박힌 상처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통증을 참느라 아내의 목과 어깨에 덕지덕지 붙은 파스를 보고, 자식 자랑하며 시장통에서 악다구니 부리는 어머니를 목격하며, 번듯한 직장을 가지라는 말에 반항하며 제멋대로 굴던 딸이 쓴 책을 읽는다. 그들이 자기 때문에 울고 있었다는 걸 알면서 아버지의 눈시울도 뜨거워진다. 기적은 암을 치료하는 순간이 아니라 가족과 화해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오랜만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드라마를 봤다. 등장인물을 대하는 기품있고 성숙한 태도는 노희경 작가의 것이며 장용, 박원숙 등 장인의 경지에 오른 배우들의 것이다. <기적>에선 단 몇 장면에 나오는 사람이라도 절절한 사연을 간직한 듯 보인다. 특정한 한두 사람에 주목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인생을 반추하는 시간에 주목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매거진t> 기획위원 강명석씨의 표현을 빌리면 “그래서 <기적>의 주인공은 영철이 아니라 영철의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그들의 삶의 ‘태도’다. 우리는 영철과 달리 죽음에 직면한 순간 타인과 화해할 수도, 혹은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든 <기적>에서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당혹감과 슬픔, 그리고 준비와 체념의 과정을 벗어날 수는 없다.” 한번쯤 겪어야 할 삶의 비애를 <기적>의 인물들은 조·단역을 막론하고 예외없이 통과해간다.

<기적>의 소박한 결론은 살면서 100명이 나를 위해 울도록 행하거나 남을 위해 내가 100번을 우는 삶을 살아라, 가 아닐까 싶다. 새해가 다가오는 이즈음에 곰곰이 생각해볼 만한 화두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 인물을 위해선 숱하게 눈물을 흘렸지만 현실의 인물을 위해선 눈물을 아꼈던 나는 그렇게 반성하며 2007년을 맞을 것 같다. 산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시지만 우는 어른에겐 선물을 주실 게다. 독자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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