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영화읽기] 성형 예찬이 아니라 사회 비판

남성중심주의와 외모자본주의를 풍자하는 <미녀는 괴로워>의 미덕

<미녀는 괴로워>가 입소문을 타고 흥행 중이다. 이 영화의 흥행 요소는 뭘까? 첫째, ‘대사빨’이 살아있는 시나리오, 둘째, 특수분장과 망가짐도 불사한 김아중의 연기, 셋째, 공들인 콘서트 장면에 귀에 쏙 들어오는 노래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대사는 특히 입담이 좋은데, 가령 오디션 장면에서 “‘아마’가 아닌데?” 라 말하자, “‘아다’는 무슨~”이라고 받아치는 재치있는 말장난뿐 아니라, “가슴을 찢어놓고 휴지로 되겠어요?”라는 ‘진지모드’ 대사까지 감칠맛 나는 대사들로 빼곡하다. 또한 김아중의 연기는 출중하다. 뚱뚱한 한나의 순박한 표정과 둔한 움직임, 미녀가 된 뒤 외모에 걸맞지 않은 ‘겸손’(?)한 표정에서 차츰 도도해지는 표정, 성형사실이 밝혀진 뒤 ‘안티’들에게 빗자루를 휘두르는 한결 털털해진 모습까지 모두 자연스럽게 소화한다.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선율 <아베 마리아>는 물론 엔딩곡 <스탠바이 미>까지 코미디영화치고 감각적인 음악에, 김아중의 가창력까지 더해져 오감이 만족스러운 영화이다. <미녀는 괴로워>는 대단히 웃기는 코미디이지만, 그 웃음의 의미가 간단치만은 않다. 영화 내적 장치는 물론, 영화 외적(콘텍스트적) 풍자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외모지상주의와 성형열풍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장편영화이다. 단편으로는 임순례 감독의 <그녀의 무게>가 있지만 장편은 거의 없다. <신석기 블루스>는 외모의 사회적 가치를 풍자하려는 영화였지만, 외모의 사회적 가치가 가장 덜 문제시되는 ‘전문직 남자’를 대상으로 한데다, 자가당착적 논리와 로맨스 강박에 사로잡혀, 전달하려던 메시지마저 반대로 전하는 오류를 낳고 말았다. 올해 성형을 다룬 영화 2편이 앞서 나왔지만, <시간>은 성형을 통한 정체성의 혼돈을, <신데렐라>는 그릇된 모성애의 공포를 다룬 작품으로, 성형의 사회적 의미를 다룬 영화가 아니었다. <미녀는 괴로워>는 외모와 성형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외모산업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연예산업의 생리를 묘파함으로써 웃음과 공감은 물론 깊은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외모와 성형의 사회적 인식에 대한 문제제기

<미녀는 괴로워>는 외모와 성형에 관한 사회적 통념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예쁘지만 노래를 못하는 아미가 무대 위에서 립싱크할 때, 뚱뚱한 한나는 무대 뒤에서 열창한다. 외모가 가창력에 우선하는 음반산업에서 상품은 노래가 아닌 외모이다. 프로듀서는 그녀의 음악성을 높이 사지만, 그녀의 오해처럼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며, 대창가수로서의 상품성 이상의 가치를 두진 않는다. 친구의 말마따나 그녀의 외모는 ‘반품’이며, 점쟁이 말처럼 ‘관상은 운명’이기 때문이다. 성형에 성공한 뒤 그녀의 삶은 180도 바뀐다. 접촉사고를 내도 예쁘니까 모두 용서가 되고, 도도하지 않은 그녀를 이상하게 볼 정도로 아름다움은 특권이다. 오디션장에서는 환영받고, 짝사랑만 하던 남자와의 로맨스도 쉽게 다가온다. 이렇듯 외모는 노동시장과 결혼시장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천혜의 것이 아니라 성형의 산물이라면 어찌 되겠는가? 그녀가 남자에게 성형에 대한 생각을 떠본다. 남자는 성형이 보편화되었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내 여자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이중의 속내를 내보인다. 그녀는 성형한 것보다 예쁜 여자만 좋아하는 남자들이 비난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지만, “그렇게 당당하다면, 왜 다 비밀로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이 대화는 성형에 대한 우리 사회의 양가적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자연미인은 숭배의 대상이지만, 성형미인은 조소의 대상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영화 속에서도 그녀의 외모만으로는 성형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며, ‘자연미인’ 운운하는 대목이 핵심 유머로 작용한다) 이 질문은 눈살미의 부재나 기술의 진보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인공의 구분이 전혀 비본질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성형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몸은 이미 자연의 산물이 아니다. 극도로 인공적인 얼굴과 몸매를 이상으로 두고 펼쳐지는 연 5조3천억원 규모의 화장품 시장과 연 1조원 규모의 다이어트 시장의 산물이다. 성형은 다이어트와 피부미용의 연장선에 있는 연 4조원 규모의 산업이며, 그들 사이를 구분 짓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박피, 치아교정과 성형수술을, 또는 식욕억제제처방과 지방흡입술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형은 이미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문제이며, 따라서 성형이 옳으냐 그르냐, 성형사실이 당당한가 그렇지 못한가는 핵심을 한참 벗어난 질문이다. ‘성형미인’이 뜨악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회적 판타지’를 중심으로 패가 돌아가는 화투판에서, 우리가 숭배하는 ‘아름다움’이 그저 소비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사회적 판타지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폭로하는 자본주의적 메커니즘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름다움’은 고부가가치 상품이고, 이 상품을 생산하는 (패션, 미용, 성형, 연예)산업에 자본이 집중된다. 성형외과의 문턱은 수술비로 결정되며, 실연의 아픔을 안겨주는 남자들은 그녀들에게 고가의 미용 상품(다이어트 약, 사우나 기기)을 떠안긴다. 몸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하여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해야 하는 순환구조에 끼지 못하는 육체(비만한 몸뿐 아니라, 선탠을 하지 않은 몸까지)는 홀대받는다. 음반산업의 진짜 상품은 음악이 아니며, 음반산업의 주역은 가수나 작곡가가 아니라, 프로듀서, 매니저, 사장이다. 그들은 상품이 될 만한 가수를 기획하여 육체를 전시하고 이미지를 팔다가, 안 팔릴 성싶으면 신인으로 갈아치우거나 모바일 누드모델로 팔아넘긴다. 이는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다. 음반을 기획하고 찍는 데 투입된 자본을 회수하지 못할 것이 두렵고, 가수가 광고를 찍은 화장품이 팔리지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자본금을 회수하고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 이는 사람의 욕망이 아니라 자본의 욕망이다. 영화는 무시무시한 자본의 욕망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녀는 성형 사실이 밝혀질 위기에서 스스로 고백하고, 대중은 그녀에게 “괜찮아, 괜찮아”를 연호하며 용서한다. 만약 현실에서 아름다운 신인 가수가 알고 보니 엄청난 뚱녀였으며 전신성형을 통해 거듭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녀의 성형 사실은 좀 다르게 소비될 것 같다. 그녀는 다이어트와 미용, 성형산업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지고, 가수보다는 ‘몸을 관리하는 은밀한(?) 상품들’ (가령 다이어트 식품, 체형보정 속옷, 체내형 생리대 등)을 광고하는 CF와 홈쇼핑의 여왕으로 등극할 가능성이 크다.

비만인과 성형미인을 이해하는 시선

영화가 ‘뚱뚱한 여자가 성형해서 행복해졌다’는 줄거리를 갖는다고 ‘성형찬가’(<씨네21> 20자평 박평식)라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비만과 성형에 대한 이 영화의 시선을 놓친 것이다. 영화는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를 조롱하지 않으며, 성형을 예찬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선이 이 영화를 보는 관객- 특히 여성관객- 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다. <미저리> <친절한 금자씨> <몬스터 하우스> <팻걸>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분홍신>에서 비만녀들은 엽기적인 욕망과 집착의 덩어리로 재현된다. 그녀들은 서사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카메라는 그녀들의 몸을 혐오스럽게 잡는다. 그러나 <미녀는 괴로워>에서 한나는 기괴한 존재가 아니라, 은근히 정이 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점집이나 회식자리에서 뚱뚱한 그녀에게 쏟아지는 동정과 혐오의 시선이 역력하고, 카메라는 그 희극적 요소를 잡아내고 있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결코 차갑지 않다. 그녀가 친구와 함께 문신을 새기고 흡족해할 때, 영화는 <스탠바이 미>를 들려주며 그녀들의 육체를 저주받은 몸뚱이로 훑지 않는다. 그녀의 노래와 로맨스에 대한 욕망을 진지하게 그리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그녀를 이해되는 존재로 보듬는다. 이런 시선은 <301·302>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권태> <동상이몽>(5편 <벌거숭이>) <그녀의 무게>를 제외하곤 드문 것이다. 영화는 비만을 혐오하거나 동정하는 시선들, 노동시장에서의 차별과 성적 소외 등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그녀가 죽음을 무릅쓰고 성형을 결심하게 되는 경위를 관객에게 납득시킨다. 그녀가 성형외과 의사를 협박하는 장면에서도 영화는 성형의지가 허영심이 아닌 생의 의지임을 비장하고 조리있는 대사로 설득시킨다. 영화는 그녀를 대상화하지 않고, 그녀의 심정에 관객을 공감시켜나간다. 또 영화는 성형의 과정이 무엇보다 그녀에게 고통이었음을 환기시킨다. “이깟 상처 따윈 아프지도 않아요. 뼈도 깎고 살도 잘랐는걸요…”, “난 친구도 아버지도 나 자신도 버렸어요” 라는 대사는 그녀의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영화는 비만을 조롱하거나 성형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외모의 기준을 들이대며 기준에 못 미치는 여자에겐 사회적 기회를 박탈하고, 이를 얻기 위해 외모를 고친 여자는 ‘가짜’라고 비난하는 사회, 그리하여 천형에 가까운 외모 콤플렉스와 성형의 신체적 고통, 그리고 성형의 은밀한 죄의식까지 떠안기는 사회를 비판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외모 가꾸기는 사회적, 성차적 억압의 산물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 관리이자, 자기 존중감의 발로로 인식된다. 즉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능한 커리어우먼이 되기 위해, 또는 자신감을 갖기 위해 몸을 가꾼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능한 커리어우먼의 기준에 왜 남자들보다 엄격한 외모의 기준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왜 여성적 일자리는 외모를 능력으로 인식하는 서비스 업종이 대부분인지, 혹시 자아 존중감의 근거가 타자의 시선으로 강요된 이데올로기의 자발적 내면화는 아닌지 반문해보아야 한다. 끊임없이 자기 몸을 검열하며 다이어트에 몰두하고, 호시탐탐 몸을 찢고 보형물을 삽입할 궁리를 해야 하는 ‘미녀’는 괴롭다. 그녀들은 남성중심주의와 소비자본주의의 합작품인 외모산업의 ‘자발적’ 소비자이자 피 흘리는 희생제물이기 때문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