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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 <사랑니> 정지우 감독의 신작 <모던 보이>(가제)
김혜리 사진 이혜정 2007-01-09

애국적 연애질

어서 오쇼! 여기는 모던의 기운이 도래한 1930년대 경성. 저잣거리 구석에 숨어 있는 엘리베이터를 발견했다면 당신은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지하에 당도한 승강기 문이 열리면 ‘문화구락부’의 은밀한 전경이 펼쳐진다. 자욱한 궐련과 대마 연기 사이로 맥고모자를 쓴 남자가 피아노를 두드리고, 치파오를 입은 여급들이 종종걸음친다. 흥청대는 군중 가운데 쪽 빠진 줄무늬 양복에 은빛 프린스 시계를 번득이는 출중한 미남이 눈에 띌지니, 바로 <모던 보이>(가제)의 주인공 이해명이다. 이 청년은 방금 사랑의 벼락을 맞았으니, 말걸지 말라. 상대는 카리스마로 무대 위를 휘젓고 있는 가수 조난실. 마를렌 디트리히도 울고 갈 그녀가 이끄는 곳이라면 지옥불 속이라도 따르리라는 결심을, 청년의 풀린 눈은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해피엔드> <사랑니>의 정지우 감독이 각색하고 연출한 시대극 <모던 보이>(제작 KnJ엔터테인먼트)는 아무 생각없는 경성 최고의 바람둥이를 고뇌하고 방황하게 만들고 얼떨결에 항일운동에까지 휘말리게 만드는 ‘죽일 놈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부유한 친일파 부친을 둔 20대 중반의 이해명은 도쿄대 유학을 마치고 총독부에서 일하고 있다. “10년간 네가 들어가는 조직은 쫄딱 망한다는 점괘가 나왔다”는 아버지의 말에 근거해 그는 나름대로 조선의 독립에 일조하고 있다고 가끔 생각한다. 이해명의 풍요한 청춘을 함께 구가하는 단짝은, 도쿄대 동창인 고등검사 신스케. 그의 도움으로 조난실과 이해명은 만남을 성사하고 꿀 같은 연애를 시작한다. “난, 꽤 낭만적인 남자야. 이미 들켜버린 것 같지만… 낭만의 화신이지” 운운하는 남자의 대사에 여자가 흘리는 한숨이 심상치 않긴 해도. 그러던 어느 날 난실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사립탐정 백상허를 고용해 미친 듯이 경성을 뒤지던 해명은 로라, 나타샤, 막동이 등으로 난실을 부르는 버림받은 남자 여럿을 만난다. 그러나 어찌 포기하랴. 사랑하는 그녀가 꿈꾸는 남자는 기어코 자신이어야 한다는 해명의 열망은 붉기만 한 것을.

<모던 보이>의 원작은 제5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받은 이지형의 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다. 영화의 배경인 1930년대는 우리의 상상 속에서 복개(覆蓋)된 시대다. 항일 대 친일 외의 관점으로 돌아보는 것이 불경하게 여겨지고 혹여 식민지 근대화론을 거드는 셈이 될까 불안한 시대다. 일제 식민지 역사의 숙연한 커튼에 가려진 1930년대 세태를 그리고 싶었던 정지우 감독은 잃어버린 애인 찾기와 잃어버린 조국 찾기를 범속한 남자의 모험담으로 그려낸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의 시각에 공명했다. 박태원의 <천변풍경>(1936)에 담긴 것과 같은 근대적 욕망과 일상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1930년대는 이미 식민지가 된 조선에 태어난 남녀가 서른이 될까 말까한 시기다. 독립과 민족을 운운하는 일을 난데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그렇다면 1930년대가 그토록 매혹적인 까닭은? 두개의 책상을 놓고 사료와 역사학의 성과를 공부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 상상력을 풀어놓느라 여념이 없다는 정지우 감독은 이렇게 답한다.“1930년대는, 조선이라는 지역은 자본주의의 토대를 갖추고 근대화됐으나 주체인 조선인 다수는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 양극화의 절정이었다. 승승장구하던 일본은 몰락의 첫걸음을 디딜 찰나였다. 망하기 직전 풍요의 마지막 모금을 들이켜는 흥청망청함, 세기말적 불안과 쾌락주의가 팽배한 감정과잉의 시대로서 윤심덕을 비롯해 정사(情死)도 잦았다. <모던 보이>의 이해명은 단순한 인간이지만, 그처럼 불안하고도 짜릿한 공기가 그를 둘러싸고 술렁이고 있다.

<모던 보이>의 캐스팅은 진행 중이다. 주요 배역 가운데 일본인이 있으나 한국인 배우가 분한다. 일본식의 한국 억양, 한국식 일본어 억양, 예스러운 어투 등 예민한 말맛은 배우들의 리딩을 통해 무리없는 방식으로 조율한다. 1930년대 공간을 재현하는 컴퓨터그래픽이 영화 전체의 30% 분량에 들어가는 만큼 착실한 기본기 혹은 연극 무대 경험이 있는 배우가 적절하다. <시카고>의 캐서린 제타 존스처럼 훈련이 아니라 혈관에 흐르는 ‘끼‘로 객석을 압도하는 노래와 춤도 갖추어야 한다. 여주인공 조난실 역의 배우는 이해명의 열렬한 집착을 관객이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감독은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는 심증이 확실한 순간에도 ‘가실래요?” 손 내밀면 ‘네네’ 하며 절로 따라나서게 만드는” 마성의 여자라고 묘사한다.

정지우 감독은 우리의 집단적 기억 속에 흑백과 세피아톤 이미지로 현상된 1930년대를 총천연색으로 그릴 심산이다. 그러나 시대극에 흔히 쓰이는 과시적이고 육중한 카메라 움직임은 피할 생각이다. 예컨대 경성의 전경을 보여주는 와이드 숏이라 해도 단순한 인서트가 아니라 그 안에 인물과 서사적 기능을 불어넣고자 한다. 인물에게 자유를 주는 것도 그의 중요한 과제다.“우리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과거의 사람인지 모른다. 종로통을 재현한 세트가 마침 있다고 그들에게 종로만 거닐도록 강요하고 싶지 않다. 전차를 타고 싶으면 타고 내달리고 싶으면 그렇게 해주고 싶다.”그러기 위해서는 확고한 비전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생강> <해피엔드> <사랑니>에서 여성의 필체로 세계를 서술했던 정지우 감독은 경쾌한 인물들이 달리는 활극 <모던 보이>를 앞두고 속도와 밀도의 함수관계를 숙고 중이다.“이면과 깊이를 보여주려면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는 건 물리적으로 어쩔 수 없는 법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간을 통해 나의 근본적 욕심도 살리고 싶다.”이해명과 조난실의 파란만장한 운명은 감독의 머릿속에서 아직 미결된 채다. 다만 많은 한국 대작 영화들이 클라이맥스를 의지한 자폭의 불꽃놀이를 벌이지는 않을 조짐이다. 원작 제목도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있겠니” 아닌가. <모던 보이>은 150일의 프리 프로덕션을 거쳐 2007년 여름이 오긴 전 촬영에 돌입한다. 경성 문화구락부 ‘뽀이’가 외친다. 즐거운 시간 되슈!

정지우 감독, 대작을 만나다

정지우 감독의 전작 <사랑니>는 2005년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한편으로 평가받았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사랑니>의 제작자이기도 한 강우석 감독은 “잘 만든 영화, 좋은 영화였다.… 단, 이번에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정지우 감독은 웃으며 전한다. <모던 보이>가 감독에게 갖는 의미는 자못 묵직하다.“내겐 배수진을 치고 만드는 영화일 수도 있다. 어중간한 결과가 가장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솔직히 털어놓을 정도다. “돈 쓸 때는 영화학교에서 워크숍 찍는 마음으로, 장면 만들 때는 SF영화를 찍듯 미리 계획해서.”80억원의 대규모 예산 영화 <모던 보이>에 임하는 정지우 감독의 원칙이다. 올초 정지우 감독은 상하이의 처둔 세트를 견학하기도 했다. 서울은 워낙 시간의 흔적을 서둘러 지워버린 도시인데다가, 20세기 초 시대극 영화는 만들어진 예도 적어 민속촌과 한옥 마을이 약간의 인프라 노릇을 하는 사극보다 더 열악한 조건이다. <모던 보이>는 거리를 통째로 재현하는 세트 건축은 최소화하고 남대문, 동대문, 명동성당, 서울시청 등 살아남은 건축물과 부천의 <야인시대> <하류인생> 세트, 수원의 <동양극장> 세트, 파주의 <패션 70s> 세트, 합천의 <서울, 1945> 세트를 활용할 계획이다. 외관은 창의적인 CG를 보태 기본 뼈대의 활용도를 높이는 한편 시대감각에 더욱 결정적인 건물 내부에 공을 들인다는 방침이다. 정지우 감독은 앞으로 1920, 30년대 도시 배경 프로젝트들이 가동되는 만큼 영진위나 특수목적회사, 관련 기획을 보유한 투자사에서 랜드마크로 공히 등장할 만한 화신백화점 거리, 종로 경찰서 등을 짓는 방안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제언한다. 2.35 대 1 비율로 촬영되는 <모던 보이>는 많은 장면에서 두대 이상의 카메라를 가동할 예정이다. 정지우 감독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쓰인 HD 바이퍼카메라 기용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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