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영국 평론가 그레이디 핸드릭스가 본 한국영화 속 폭력

트라우마의 연속인 한국사회의 반영

그것은 낚싯바늘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좀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김기덕의 <섬>에서 자포자기한 도망자의 식도 안으로 밀어넣어진 한 움큼의 낚싯바늘이라고. 유럽 각지에서 수상을 하며 <섬>은 베니스에선 구토를, 뉴욕에선 졸도를 야기했다. 그 한순간 한국영화에 관한 오해가 생겨났고 폭력은 서구 관객의 마음속에서 단단하게 굳어졌다.

5년을 뛰어넘어보자.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지만, 그 영화가 뒤늦게 미국에서 개봉하던 저녁, 미국 평론가들은 그리 깊은 감명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뉴욕타임스>의 마놀라 다지스는 “파산 상태의, 위축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징후”라고 강도 높게 공격했다. 반면 <뉴욕 옵서버>의 앤드루 새리스는 좀더 저열한 지점에서 시작했다. “생마늘과 썩을 때까지 파묻어둔 배추를 혼합하여 질그릇에 담아 공항에서 기념품이라고 파는, 김치를 먹는 나라에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할리우드는 온갖 슬래셔영화의 아류작과 속편들로 공해를 만들어왔다. 그런데 총도 거의 나오지 않는 한국영화들은 잔인하고 짜증을 돋우는 영화들로 낙인찍히곤 한다. 한국 박스오피스는 일반적으로 코미디와 로맨스, 멜로드라마가 점령하지만 서구 배급업자들이 구매하는 영화는 한계까지 밀고가는 장르영화들이다. 2005년 가장 높은 해외수익을 올린 영화는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였다. 반면 한국에서 흥행 1위에 올랐던 영화는 한국전쟁을 다룬 <웰컴 투 동막골>이었고, 2위는 <말아톤>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폭력에 관한 논쟁과 폭력을 향한 찬미를 헷갈려해왔다는 것이다. 박찬욱과 김기덕의 최근 영화들이 대표하는 것은 단지 한국영화의 계급의식, 반독재 파장과 멜로드라마를 향한 오랜 취향 사이의 새로운 충돌일 뿐이다. 20세기 한국은 트라우마의 연속이었다. 일본의 식민통치,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분단, 군부독재, 대통령 암살, 시민 불복종의 폭력적인 억압… 1990년대 한국이 안정화되고 영화감독들이 과도한 검열에서 놓여날 때까지 누구도 권위주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없었다. 권력을 가진 이는 의혹의 시선을 받았고- 경찰은 부패했고, 정치가는 불의와 타협한다고- 그래서 영화는 믿을 만한 영웅을 창조해야 했다. 범죄자 말이다.

1990년대에 한국의 거장인 임권택은 <장군의 아들>을 만들었고 그 인기는 두편의 속편을 낳았다. 이후 10년 남짓,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공공의 적> 같은 영화가 등장했고, 깡패와 비슷하게 행동하는 경찰들은 권력과 투쟁하며 법을 무시하는 단독자로 나타났다. 포스트 밀레니엄 시대의 관객은 <조폭마누라> 같은 일련의 코미디영화에 열광했다.

미국이 영화폭력의 양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넘버원인 반면 한국영화는 질적인 면에서 승리를 거두어왔다. <하녀>에서 <가족>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 속 폭력은 대상에게 밀착돼 있다. 한국영화 역대 흥행 1위작인 <태극기 휘날리며>는 심지어 한국전쟁을 두 형제간에 얽힌 가족불화로 전화시킨다. 이 영화의 감독 강제규는 1999년 <쉬리>로 한국의 첫 번째 메이저 블록버스터를 만들었는데, 지워지지 않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두 연인은 서로의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태극기 휘날리며>

<형사 Duelist>

박찬욱과 김기덕의 손에서 권위를 향한 불신과 계급을 평등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폭력의 사용, 멜로드라마적인 천성은 감상을 공격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서로 섞인다. 한국에서 김기덕은 영화에 드러나는 살육과 하층 계급의 초상으로 인해 심각하게 비난받고 있다. 박찬욱은 남북한 병사들 사이의 우정을 다룬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으로 인해 복수 3부작에 착수할 수 있는 창작권을 부여받았다. 이 3부작은 모든 권위를 부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복수는 나의 것>은 부유한 기업가와 마음 착한 노동자를 충돌시키고, <올드보이>는 언제라도 폐기처분될 수 있는 중산층 샐러리맨과 능수능란한 수완가가 대비된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의 주인공은 이중으로 저주받았다. 전과자이자 여인인 사람보다 어떻게 더 영락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복수는 나의 것>과 <친절한 금자씨> 사이의 어느 즈음에서 한국 감독들은 폭력을 향한 혐오를 키워왔다. 장준환은 가능한 한에서 가장 폭력적이자 반폭력적인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만들었고, 이명세는 액션영화의 언어로 만들어진 로맨스 <형사 Duelist>를 내놓았다. 김기덕마저 비폭력적인 저항을 탐구하는 초현실적인 영화 <빈 집>을 찍었다.

<친절한 금자씨>의 히로인 금자는 어린아이를 살해한 연인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13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녀는 출옥하면서 정화와 구원을 상징하는 전통적인 하얀 두부접시를 들고 있는 요란한 기독교도들에게 환영받는다. 그러나 그녀는 두부를 던져버리고, 그녀의 감옥 동료들을 찾아 정교한 복수계획을 실행한다. 복수는 나르시시즘의 또 다른 형태이다. 마침내 개인적인 임무를 포기한 그녀는 자신의 옛 연인을 향한 공동체적인 복수를 조직하지만 복수란 단지 영혼을 파괴하는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두부조각에 얼굴을 파묻고 용서를 구한다. 기독교적인 도상에 의한다면 <친절한 금자씨>는 박찬욱이 구약성서식의 일대일 복수를 다루는 감독에서 신약성서식의 속죄를 움켜쥔 작가가 되어가는 표식이다.

김지운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자신의 주인공을 파멸로 몰아넣곤 하는 감독이다. 그의 최근작 <달콤한 인생>은 선한 고용인과 악한 보스 사이의 피투성이 충돌을 다루고 있다. 커다란 호텔을 관리하고 있는 선우는 보스가 휴가를 떠난 동안 그의 어린 여자친구를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녀가 바람을 피운다면 그녀를 죽이라는 명령까지 받는다. 물론 그녀는 바람을 피우고 있다. 그러나 선우는 동정심에 그녀를 놓아주고, 김지운은 그가 착한 행위로 인해 거듭하여 처벌을 받도록 한다.

선우의 보스는 불공정하고 무자비하고 구시대적이어서 장르의 요구는 그가 복수를 해야만 한다고 지시한다. 거기엔 선우가 자동차 유리 뒤에서 모든 것을 관찰하며 밤거리를 운전하는 <택시 드라이버>의 메아리도 있다. 트래비스 비클처럼, 선우는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남자다. 선우의 마지막 대결이 대부분 단지 칼로 무장한 적들을 학살하는 것이고 그가 통과하는 악의 소굴이 영화 처음에 등장했던 그 자신의 아늑한 요새라는 사실은 멋진 아이러니다.

<달콤한 인생>은 김지운이 마지막 프레임을 뒤틀기 전까지는 값싼 복제품 이상은 아니다. 오프닝신으로 돌아가 우리는 선우가 섀도복싱을 하는 순간을 보게 된다. 갑자기 이 냉혹한 악당은 <더티 하리> 흉내를 내는 바보 같은 소년 이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영화 전체가 선우의 마초 판타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몇몇 장면들을 보면 김지운은 과묵한 악당의 이야기를 찾고 있는 한국 감독들의 무리에 합류해왔던 듯하다. 그 악당들은 상류계급을 향한 엄혹한 복수에 삶을 소비하며 내러티브의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들의 테크닉은 탁월하니, 우리는 고작 우리의 두부 케이크를 가지고, 그것을 비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