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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꿈을 피우다
권리(소설가) 2007-01-19

거대한 코끼리 세 마리가 나타나 친구를 납치해가는 꿈을 꿨다. 혹시 태몽이 아닌가 싶어 친구에게 물어보았지만 남편이 한달간 출장 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며칠 전 서점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독일의 한 꼬마가 코끼리와 함께 찍은 화보집을 보았는데 아무래도 그때의 인상이 무의식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코끼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꿈을 자주, 그것도 스펙터클하게 꾸는 편이다. 납치는 물론이고 살인, 방화, 추적 등 온갖 스릴러영화의 소재들이 내 꿈에 자주 등장한다. 꿈은 게으름, 거드름, 담배처럼 마음만 먹으면 피울 수 있는 나의 일상이 되었다.

꿈은 내게 많은 영감을 준다. 예전엔 꿈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본 적이 있다. 노란 표지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두께의 그 책의 제목은 <모래시계>였다. 어쩐지 하루키와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미지가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돌아다녔고 결국 모래시계가 내 소설의 한 페이지를 독점하게 되었다. 꿈에 내 소설의 등장인물이 나올 때도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란 현실의 인물을 모방한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내가 만든 피그말리온이 내 꿈에 재등장했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꿈을 꾸는 내내 그와 즐겁게 놀았건만,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그는 눈코입이나 성별조차 잃어버린 진흙덩어리로 돌아갔다.

언젠가부터 이런 기억의 한계를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머리맡에 노트를 두고 자기 시작했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눈을 감은 채 열심히 손을 놀린다. 펜을 쥘 힘조차 없을 땐 휴대폰에 키워드만 저장해놓는다. 물론 다음날 세수를 하고 이것을 보게 되었을 때 온전히 해석가능한 단어는 몇개 되지 않는다. 정신분열환자가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쓴 낙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끔 유용한 결과물을 얻기도 한다. <개그콘서트>의 개그맨들이 일렬로 서서 내게 청혼을 했다든가, 주드 로가 연기와 그림자의 방향으로 수학을 가르쳐주었다든가 하는 사실도 꿈 일기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한번은 왼쪽 앞니가 똑 부러지는 꿈을 꿨다. 주변인에게 우환이 닥친다는 해몽을 듣고 기분이 참 찜찜했는데, 실제로 그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무질서를 대표하는 꿈을 질서있게 정리하고 나자 두 가지 무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는 내 꿈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 고등학교 교실이란 점이었다(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나 되었는데!). 주로 시험을 망친다든가, 시험장에서 내고 왔어야 할 시험지가 가방에 그대로 남아 있다거나 하는 식이지만, 가끔 미국의 교실에서 일본어 선생님이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등의 엉뚱한 꿈을 꾸기도 한다. 두 번째 무서운 사실은 꿈에서 내가 자주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가볍게 말이다. 꿈에서 누군가를 샤프심으로 찔러 죽였는데, 피가 나오자 죄책감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다 깬 적도 있다. 무의식이 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초의 사건이다.

꿈을 해석한다는 것은 사실 자신을 해석한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꿈의 기록들은 내가 직접적으로 행한 일이 아니기에 늘 도덕성이 문제가 되곤 한다. ‘살인을 저지르려고 했다’는 의도만으론 법적 처벌을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때로 그 의도가 무의식으로 확대‘해석’돼 의도로 인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테면 평론 같은 것. 나는 가끔 정신분석학자를 대하는 마음으로 평론을 보곤 한다. 평론가들은 내가 쌓아올릴 생각조차 없었던 무의식의 레고들을 그럴듯하게 재조합해서 보여준다. 첫인상을 의도로 오해하는 데서 발생되는 것이 ‘분석’의 메커니즘이란 말인가?(평론평론가들이 등장해야 할 날도 머지않았다). 평론뿐 아니라 독자들의 꿈도 그러하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꿈에서 나와 놀았다는 블로거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전혀 본 적도 없는 사람과 그것도 내가 아닌 그의 꿈에서 놀았다니 잘 모르는 사람의 집들이에 초대받은 것만큼이나 어색한 일이었다. 그 꿈의 내용이 좀 엽기적이었는데 그가 내게 받은 첫인상이 이해되고도 남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