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뉴욕 이스트빌리지는 기성세대의 ‘정상적’ 가치를 거부한 젊은 예술가들의 해방구다. 하지만 오줌 냄새 나는 컴컴한 골목의 아찔한 비상계단처럼 이들의 현실은 위태롭다. 집세는 밀리고, 작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건물 주인들은 비루한 예술촌을 쓸어내고 세련된 문화지구로 재개발하려 한다. 독립영화 감독을 꿈꾸는 마크(앤서니 랩)에겐 퇴거 통지서가 날아들고, 한때 무대를 휘어잡던 록 뮤지션 로저(애덤 파스칼)는 에이즈의 절망 속에 시들어가고 있다. 아름다운 스트립댄서 미미(로자리오 도슨)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녀의 마약 중독과 에이즈가 로저를 망설이게 한다. 가난과 에이즈가 자유로운 영혼들을 좀먹는 한편, 에이즈 환자 모임에서 만난 대학 강사 콜린스(제시 L. 마틴)와 트랜스젠더 거리의 악사 앤젤(윌슨 저메인 헤레디아)은 사랑으로 자신들에게 허락된 매 순간을 충만하게 산다. “우리에겐 오직 오늘뿐!”(No Day But Today) 용기를 얻은 보헤미안 예술가들의 난장이 시작된다. 현실의 고난쯤이야 세상에 잠시 머무는 대가로 지불하는 ‘집세’ 정도일 뿐이다.

영화 <렌트>의 원작은 1996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동명 뮤지컬이다. “에이즈에 걸렸어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노래하고, 동성애와 크로스 드레싱, 마약 중독을 따뜻한 시선으로 다뤄 논쟁과 열광을 동시에 몰고 다녔다. <렌트>의 광적인 팬덤인 ‘렌트헤드’(Rent Head)의 한명이었던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나홀로 집에>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은 영화에 원작 초연의 출연진을 거의 통째로 데려오며 원작에 대한 오마주를 표한다. 하지만 감독은 좁은 무대장치를 거대한 세트로 바꾸고 몇 가지 특수효과를 첨가하면 무대의 감동을 되살릴 수 있다고 오해한 듯하다. 건조한 카메라워크는 안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겉돌고, 주인공들간의 갈등은 거칠게 압축된 탓에 희망을 예찬하는 대단원의 설득력을 약화시킨다. 노숙자와 에이즈 환자에게 무작정 카메라만 들이대면 독립영화가 된다고 믿는 주인공 마크처럼 콜럼버스 감독은 원작의 매력에 경도된 나머지 최소한의 가공조차 잊은 듯하다.

무대의 감동을 추억하는 관객에게 관록의 배우들의 춤과 노래는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관능적인 탱고 군무로 영화에서 유일하게 성공적인 스크린 이식을 선보인 <Tango: Maureen>, 영화의 오리지널 캐스트인 로자리오 도슨이 스트립클럽을 누비며 시선을 사로잡는 <Out Tonight>는 영화에서 가장 매혹적인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