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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타인의 패션
정재혁 2007-01-19

일본의 인기배우 오다기리 조는 패션을 메시지라 정의했다. 한국 버전의 한나(<미녀는 괴로워>)는 어울리지 않는 패션은 악, 진심은 내면이라 말했고, 한국의 27% 여성들은 남자들의 스키니가 꼴불견 패션 1위(모 쇼핑몰 설문 결과)라고 주장했다. 패션에 대한 세개의 독설. 이를 종합해보면 패션은 몸의 메시지며, 그 메시지는 진심이여야 하고, 그 진심은 몸을 배반해선 안 된다. 패션의 외모결정론설. 결국 패션은 외모를 중심으로 돌고, 진심은 외모의 변주로 읽힌다.

오다기리 조의 요지는 간단하다. 자신의 생각을 패션을 통해 전달한다는 것. 수상후보에 오르지 못한 서운함은 여고생의 양 갈래 삐친 머리로, 히피에 대한 갈망은 노숙자 스타일의 의상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한국 버전의 한나는 패션과 메시지는 일정 정도의 ‘어울림’을 전제로 해야 한다며 이에 이의를 제기한다. 다분히 자기 고백적인 주장. 뚱뚱한 여자의 새틴 드레스는 섹시해 보이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섹시할 수 없는 여자의 억눌림으로 희화화된다. 여기에 27%의 한국 여성들이 가세한다. 남자들의 스키니 바지는 이해할 수 없는 진심의 과도한 노출이라고. 남성성을 배반하는 가는 다리는 여성성을 거부하는 뱃살만큼 보고 싶지 않은 무엇이다.

가끔 외국을 나가면 나도 모르게 내 몸에 옵션을 하나씩 추가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한국에선 90년대 중반에 유행을 타고 지나갔던 ‘티셔츠의 일부만을 바지 안에 넣어 입는’ 방식, 과도하게 큰 숄더백, 원색의 티셔츠와 눈화장, 혹은 청바지에 부츠 신기 등. 한국에선 꼴불견이라며 눈치를 받았겠지만, 외국에선 꼴불견이라 판단할 기준의 잣대가 달라서 자유롭다. 오다기리 조의 정의에 의하면 이국은 패션의 파라다이스다. 하지만 한나는 이를 진심의 독해가 불가능한, 소통의 가능성이 차단된 세계의 어둠이라고 노래한다. 한국에서 야유받았던 진심은 이국에서 고립된다. 패션과 소통, 어찌 보면 스키니 바지 속의 갑갑한 허벅지는 소통이 불가능한 한국 여성과 남성들의 답답한 내면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오다기리 조의 말대로 패션은 할 수 없이 메시지가 된다.

과도하게 멋을 낸 사람은 패션에 무신경한 사람보다 꼴불견이다. 똥배가 나온 남자는 이해가 되지만, 타이트한 티셔츠에 똥배는 용서가 안 된다. 한국의 27% 여성들이 동의했던 것처럼 과도한 표현은 침묵보다 재수없다. 결국 문제는 하나다. 타인의 패션을 존중할 수 있습니까. 오다기리 조는 ‘예스’라고 대답했고, 한나는 전제를 달았으며, 한국의 27% 여성들은 ‘노’라고 답했다. 그리고 ‘노’는 다시 ‘예스’와 만난다. 한국의 패션은 일정한 기준을 요구한다. 넘지 말아야 할 선. 강동원, 주지훈이 아닌 남자가 스키니를 입으면 안 되고, 한나는 드레스를 사면 안 되며, 타이트한 티셔츠를 입으려면 뱃살을 빼야 한다. 그래서 패션의 진심은 무색무취의 거짓으로 변한다. 스키니 바지보다 더 갑갑한 세상, 소통이 단절된 거리는 누가 뭐래도 가장 꼴불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