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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잡지여, 영원히 다음호에 계속!

명랑만화 가득한 <보물섬>부터 인디정신의 <네모라미>까지, 한국 만화잡지 흥망사

뒤돌아보면 참 많은 만화잡지들이 있었다. <아기공룡 둘리> <달려라 하니> 등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캐릭터들이 가득했던 <보물섬>, 수많은 순정만화작가들을 발굴하고 키워냈던 <르네상스>, <드래곤 볼> <원피스> 등 일본 만화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소년 챔프>와 <아이큐 점프>, 언더 혹은 인디만화로 일컬어지는 젊은 작가주의 만화의 <화끈> <네모라미> 등…. 청소년 유해매체라는 낙인찍기와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서의 지원책이 주기적으로 번갈아가면서 만화라는 매체를 쥐락펴락할 때 만화잡지들도 흥망을 반복했고, 인터넷과 휴대폰으로도 만화를 보는 시대에 만화잡지의 존재가치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만화잡지는 각각의 취향이 나름 분명한 만화독자들을 위한 최선의 매체 중 하나이다. 여기 그간 한국의 만화잡지들이 걸어온 굴곡의 시절을 돌아보고, 만화잡지를 만드는 편집자들의 목소리로 만화잡지의 존재이유를 들어보았다.

길가에서 택시를 부르면 냉큼 달려와 내 발 앞에 선다. 쏜살같이 목적지로 달려간다. ‘책’으로 만나는 만화가 그렇다. 내가 원하는 그 작품만 쏙 빼먹을 수 있다. 기차는 다르다. 정해진 시간, 노선, 궤도를 지켜야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십개의 정류장을 거쳐야 하는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기차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동네들만 돌아다닌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주말이 되면 어디로 갈까 고민할 것도 없다. 무조건 그 기차를 올라타고 아무 곳에서나 내리면, 제각각의 즐거움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잡지’로 만나는 만화가 그렇다.

만화와 잡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단행본보다는 잡지를 중심으로 만화 문화를 키워왔다. 짧은 에피소드의 연작이든, 제법 긴 길이의 스토리든, ‘다음호에 계속’이라는 두근거리는 문구로 독자들을 감질나게 만들어왔다.

국내의 만화잡지는 제법 복잡한 곡절을 겪어왔다. 해방 전부터 일본 만화잡지에 기고하는 만화가들도 있었고, 1950년대 들어서는 김성환이 시사만화잡지를 창간하는 등 만화잡지에 얽힌 역사는 짧지 않다. 하지만 본격적인 만화잡지 시대가 수면 위로 확실한 덩치를 드러내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했다. 대본소와 대여점을 통해 만화를 빌려보는 시장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이지만, 만화 문화에 대한 싸늘한 시선과 주기적인 화형식도 적지 않은 원인으로 작용했다.

<보물섬>에는 보물 같은 만화들이 가득

1970년대 들어 비로소 만화의 봄이 왔다. <어깨동무> <새소년> <소년중앙> 등의 어린이 잡지나 학원 교양 잡지들은 앞다투어 만화를 게재했다. <도깨비 감투> <소년 고인돌> 등의 명랑 만화가 최전성기를 구가했고, 만화만을 모은 별도의 부록들도 꾸준히 인기를 모아갔다. 다른 무엇보다 ‘만화를 보기 위해’ 잡지를 구입하는 독자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절반쯤은 만화잡지의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로 제대로 된 만화잡지 시대는 지긋지긋한 유신통치가 종막을 고한 1980년대에 열리게 되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육영재단의 <보물섬>을 통해서였다.

몇년 전 원로 만화가들과 술자리가 있어, 옛 시절의 만화잡지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한 만화가가 대뜸 말했다. “맨 처음이 제일 좋았지. 애들 잡지든 어른 잡지든.” 여기저기서 “그렇지, 그렇고 말고.”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는 ‘옛날이 좋았지’라는 추억의 향수가 뿌려져 있었겠지만, 좀더 객관적인 눈으로 돌이켜보아도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어린이 잡지로는 <보물섬>, 성인 잡지로는 <만화광장>. 본격적인 만화잡지 시대를 연 1980년대의 두 잡지는 동시대의 가장 순도 높은 작가와 작품들만 모아놓은 보물 창고였다. 1982년에 창간된 <보물섬>은 500쪽이 넘는 두께 안에 <아기 공룡 둘리> <달려라 하니> <악동이> 등 한국 만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만화들을 집대성했다. 창간 당시가 1970년대 무르익은 만화의 열기가 한껏 터져나온 시기였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여타의 어린이 잡지가 사라진 상황 속에서 ‘독점’의 지위를 마음껏 구가할 수 있었다는 독특한 상황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만화광장>, 본격 성인 만화잡지의 시작

<보물섬>이 전 시대 명랑 만화의 과실을 훌륭히 이어받았다면, 1985년 창간된 <만화광장>은 만화의 영역을 성인 세계로 넓히기 위한 좀더 야심찬 도전 정신을 보여주었다. 고우영, 강철수, 한희작 등 성애(性愛)와 결합된 감각적인 ‘성인 만화’의 세계를 중심에 두기는 했지만, 새로운 소재와 기법을 통해 만화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새로운 ‘어른 만화’의 장으로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이희재와 오세영은 <성질 수난> 등 시대와 호흡하는 리얼리즘 단편들을 쏟아냈고, 허영만은 <담배 한 개비> 등 독특한 모더니티의 작품들을 이어갔다. 극화 공모를 통해 <백지>의 박흥용을 발굴하는 등 문하생 체제 바깥에서 만화가로 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데 있어서도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얼굴만 바뀐 군부정권하에서 만화에 대한 편견과 검열 장치는 여전했고, 성인 만화 잡지의 꽃봉오리는 열리자마자 잘려버리기 일쑤였다. 치마 입은 여자가 육교를 올라가면 외설로 몰아붙였고, 독일 잠수함인 U보트를 그리면 “보트가 왜 물밑으로 가느냐”며 다시 그리게 했다.

<만화광장> <주간 만화>를 주축으로 한 성인 만화 잡지는 대본소 시장과 경쟁하며 힘겨운 싸움을 벌였지만, 사상적인 억압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점차 시들어갔다. <보물섬> 역시 일본 만화 잡지의 포맷을 그대로 옮겨온 새로운 소년 만화 잡지에 밀리며 뒷전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1990년대 들어 일본 만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다. 동시에 <아이큐 점프>의 서울문화사와 <소년 챔프>의 대원은 일본식 잡지 문화를 경쟁적으로 국내에 이식한다. 준성인지인 <영 점프>와 <영 챔프>, 성인지인 <빅 점프>와 <트웬티 세븐>으로 이어지는 두 출판사의 잡지 배틀은 만화가들에게 새로운 게임의 논리를 강요했다. 독자엽서를 통한 경쟁구도와 일본 만화의 라이선스 번역이라는 냉혹한 장치는 만화의 전장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지만, 단행본 판매로 이어지는 새로운 수익 구조로 인해 이름값이 아니라 실력을 통해 한순간에 스타작가가 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단단하기만 하던 대본소 시장이 흔들리면서 잡지를 중심으로 독자들이 직접 만화를 사서 보는 문화로 이동해갔다.

<르네상스>부터 <윙크>까지, 순정 만화 전성시대

1988년의 <르네상스>를 시초로 쑥쑥 돋아난 <윙크> <댕기> <이슈> 등의 잡지는 1990년대 순정 만화의 전성시대를 펼쳐냈다. 국내의 남성 대작가들이 대본소와 문하생 체제를 통해 다작 양산 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데 반해 여성 만화가들은 개인 작업에 집중하며 적은 수의 질 높은 작품을 그리는 데 집중해왔다. 김혜린, 김진, 강경옥, 이정애 등 순도 높은 작업에 열중하던 작가들에게 순정 만화 잡지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효과적인 활동의 장이었다. 잡지의 신인 공모도 매우 활성화되어 유시진, 나예리, 박희정 등 새로운 감각의 작가들이 대거 순정 만화계에 등장하게 된다.

유소년에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를 대상으로 한 만화잡지 체제가 구축되었지만 눈높이가 올라간 독자들은 새로운 불만을 토로했다. 일본에서는 고단샤의 ‘매거진’ 시리즈를 보며 자란 아이들, 슈에이샤의 ‘점프’ 시리즈를 보며 자란 아이들, 그리고 쇼가쿠칸을 비롯한 여타 출판사 계열의 만화잡지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서 취향도 세계관도 전혀 다른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 그만큼 잡지의 개성이 강하고 편집 방향이 또렷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잡지는 출판사의 이름만 다를 뿐 각 잡지의 색깔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 일본 만화 인기작과 청소년 독자 위주의 시장이 형성되면서 만화를 향해 샘솟는 독자들의 여러 욕구들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실험정신과 보수적 규제의 90년대 후반

거대 출판사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안과 밖에서 일어났다. 세주문화의 <미스터 블루>는 만화가들이 직접 출자한 회사에서 새로운 성인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내놓은 잡지라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일본 만화에 대항해 한국 만화가들의 작품만을 게재했고, 윤태호, 심갑진 등의 신예를 발굴하는 성과를 내놓았다. 바깥에서는 언더 혹은 인디를 표방한 만화잡지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만화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파를 던져주었다. 이우일, 홍승우의 <네모라미>, 신일섭, 강성수의 <히스테리>, 모해규, 김경호의 <화끈> 등이 보여준 실험의 피는 현재의 젊은 작가주의 만화에도 굳건히 흐르고 있다. 월간지 <나인>은 여성 만화 잡지이지만, 전통적인 순정지와 차별을 두며 남성 작가와 인디 성향의 작가들까지 등용하며 주류시장에서 새로운 편집 노선의 가능성을 실험하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 몰아닥친 ‘청소년 보호법’의 한파와 <천국의 신화>에 대한 사법적 제재는 한껏 피어오르던 만화잡지 시장에 쓰나미와 같은 충격을 주었다. 이어 인터넷과 PC게임의 융성으로 청소년 시장에서 만화 미디어가 지닌 힘이 약화되고, IMF 체제 때 대거 등장한 대여점이 결국엔 만화 단행본 시장의 활로를 막는 역할을 해 21세기 들어 만화시장 전체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전통적인 종이잡지 시장이 위기에 봉착하자, 인터넷 웹진과 만화 포털들이 만화잡지의 대체물로 여러 시도를 해왔지만 그 한계는 뚜렷하다. 귀여운 그림체로 간략한 유머를 구사하는 웹툰과 같은 형식은 컴퓨터나 모바일의 모니터도 큰 제약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화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즐거움은 무한히 자가발전하며 어떤 장르도 소화해내지 못하는 다채로운 ‘이야기’에 있다. ‘다음호에 계속’이라는 글자로 우리를 두근거리게 하는 제대로 된 만화잡지의 등장을 기대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생활의 나날이 괴로움의 연속이더라도, 내일 그 잡지가 데려다줄 흥분의 세계를 꿈꾸며 오늘밤 편안히 잠들고 싶다.

자료협조 부천만화정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