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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매혹시킨 한장의 사진, 영화인이 사랑한 사진작가

창작의 세계에서 영감(靈感)은 신의 선물과도 같다. 찰나의 순간에 스쳐지나간 한 줄기 빛을 잡아늘이다보면 어느새 수심이 가득했던 창작자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종합예술로 불리는 영화는 유독 많은 영감의 원천을 갖고 있다. 한곡의 음악, 한점의 그림, 한편의 소설에도 영감의 선물은 가득하다. 특히 한장의 사진은 영화의 드라마를 창출해내거나, 인물을 창조하기도 하며 장면의 빛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곤 한다. 영화인들에게 신의 선물을 하사한 사진작가들로는 누가 있을지 궁금했다. 연출, 촬영, 미술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8명의 영화인들은 저마다 영화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영향을 끼친 사진작가를 추천했다. 사진과의 첫 만남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이 자신의 작품으로 이어진 사연들을 가나다순으로 소개한다. 그들의 영화세계를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창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청춘의 빛

김지운 영화감독 _ 브루스 데이비드슨의 <영 커플>(1958)

<20TH CENTURY PHOTOGRAPHY>(TASCHEN 펴냄)

“매그넘 회원이기도 한 브루스 데이비드슨은 미국사회의 루저들을 따뜻한 시각으로 촬영해온 작가다. 오래전에 백수생활할 때 이 작가에 관해 알게 됐는데, 그 뒤로도 우리나라 갤러리에서 사진전 등을 할 때 보러 가곤 했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자주 담는 건 흑인, 노동자들, 할렘가의 아이들, 길거리 서민들, 서커스의 난쟁이 단원들 혹은 아주 낮은 곳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다. 대체로 미국사회의 어둡고 낮은 부분들을 많이 다뤄왔는데, 놀라운 것은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놓여 있을, 그 거리감이 마치 증발되어버린 느낌이 있을 만큼 대상이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나를 매혹시킨 한장의 사진은 <영 커플>이라는 제목의 사진이다. 서민들이 지나다닐 법한 허름한 공간에서 두 젊은 남녀가 거울을 보고 몸을 치장하는 것을 포착한 것인데, 마치 그들은 현실이나 세상에 대해서는 관심없다는 투로 아마 그 나이 때에나 가질 수 있는 거침없는 모습을 발산하고 있다. 그들의 전망은 밝지 않은 게 분명한데도,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빛나는 이미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기성세대에 편입되기 직전의 그 찰나,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가질 만한 모습 말이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사진이다. 누구도 뺏어갈 수 없는 짧고 아름다운 순간을 명징하고 아름답게 포착했다. 처음으로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된 내 시나리오 <좋은 시절>도 바로 이런 어두운 시기에 자신만의 빛을 내는 젊은 그들에 대한 느낌을 담으려 했다.”

타인을 인정하는 따뜻한 시선

김태용 영화감독 _ 다이앤 아버스의 <일란성 쌍둥이, 로젤>(1967)

<.diane arbus.> (An Aperture Monograph 펴냄)

“다이앤 아버스는 비정상인들, 아니 이 세계의 이방인들을 많이 찍어왔다. 왜 우리가 그들을 대할 때의 어떤 딜레마가 있지 않나. 특별하다고 말하는 건 위악인데, 그렇다고 평범하게 본다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위선이 되는, 그들을 똑같이 대한다고 말할 때의 혼란. 그런데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은 그것에 대해 너무 당당하여 오히려 그 혼란을 무화하는 지점이 있다. 가령 새로운 사물을 찾기보다 사물을 새롭게 보려고 노력하는 매그넘 사진작가들의 방식이 있는가 하면, 다이앤 아버스의 경우는 실제로 특이한 사람들을 많이 찍는다. 다이앤 아버스 사진 중에는 기형인들이 많다. 그전에는 이런 사진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사람 사진을 보며 생각이 좀 바뀐 것 같다. <일란성 쌍둥이, 로젤>이라는 제목의 이 사진도 그중 하나다. 보고 있으면 내가 이 이방인들과 함께 세상에 같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세계에서 도망가지 않고 그들을 봐야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언급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보다 언급하며 친구가 되려는 것이 촌스러운 것처럼 치부되곤 하지만, 인정하지 않고 멀어지는 것보다는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에는 그걸 인정하는 태도가 있다. 피하기보다 그 자리에서 직시하기, 아프지만 거기에 계속 서서 뻔뻔하기, 다른 데 보며 고상하게 모른 척 있으려 하지 않고 ‘바로 여기 있다’고 응시하기. 딜레마를 대하는 그 태도가 감동적이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영화 같은

민병훈 영화감독 _ 만 레이의 <Noire et Blanche>(1926)

<만 레이 그의 사진작품 105선집>(열화당 펴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포도나무를 베어라>를 연출한 민병훈 감독은 만 레이의 사진에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모성과 자연, 또는 순수함을 느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의아하게 볼 것이다. 그런 다양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고전인 듯하다.” 만 레이는 친구인 파블로 피카소와 마르셀 뒤샹의 초상사진과 여성의 누드와 뒷모습을 담은 작품들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진작가이면서 화가이자 영화감독이다. “만 레이는 삶 자체도 섹시하지만, 사진에 투영된 이미지들도 관능적이다. 현재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에 등장하는 여성의 뒷모습이나 사물들의 이미지에도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만 레이가 발명한 당시로는 혁신적이었던 기법들 또한 민병훈 감독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영화에서 CG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만 레이의 사진들은 기교를 사용하면서도 오히려 그 기교가 가장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민병훈 감독은 전작들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만 레이의 사진에서 얻은 느낌들을 반영했다. “<괜찮아, 울지마>는 영국에서만 사용되는 약품으로 인화했고, <벌이 날다>는 필름에서 색을 뺐다. 영화의 내용과 이미지에 가장 알맞은 기교를 사용하여 관객이 오히려 더욱 자연스럽게 봐주길 원했다.” 민병훈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은 목각인형을 손에 쥔 한 여자의 얼굴이다. “눈을 감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기술이 곧 예술이다

박기형 영화감독 _ 로버트 실버스의 <엘비스>(2001)

<제2회 사진·영상 페스티벌 지금, 사진은 | Now, Wha is Photo>(가나아트센터2002 펴냄)

로버트 실버스는 기존의 사진들을 모자이크로 조직해 새로운 사진을 만드는 포토모자이크의 창시자다. 수천개의 꽃사진으로 다이애나비의 초상을 만들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가 하면, <라이프>의 커버를 가지고 만든 마릴린 먼로의 얼굴은 <라이프>의 60주면 기념 표지를 장식했다. 2002년 한 전시회에서 로버트 실버스의 작품을 처음 보게 된 박기형 감독은 “기술이 곧 예술이라는 말을 체감했다”고 한다. “보자마자 소름이 끼쳤다. 마릴린 먼로나 다이애나비의 초상은 아이디어적인 것이라 할 수 있지만,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스페인 시민전쟁의 사진들로 그려낸 작품은 새로운 형태의 사진예술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박기형 감독이 로버트 실버스의 작품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기존의 것들을 가지고 재조합하여 새로운 창작물을 만든다는 점이었다. “있는 것들의 재조합으로 창작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태도다. 영화 역시 훌륭한 고전이 많고, 새로운 작품들 또한 그것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기술과 노력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점 또한 시사하는 바가 컸다. “기술과 노력이 천재성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창작의 뿌리인 것 같다.” 그가 가장 인상깊게 본 작품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진들로 만든 프레슬리의 초상이다. “그 어떤 사진보다도 엘비스 프레슬리를 가장 정확하고 풍부하게 표현한 작품이 아닐까?”

시각의 혁명

이명세 영화감독 _ 듀안 마이클의 <사물의 기이함>(1973)

<듀안 마이클>(열화당 펴냄)

8인의 영화인이 공통으로 자주 거론하는 작가가 듀안 마이클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그를 선점한 이명세 감독이 듀안 마이클을 말한다. 복잡한 그림과 사진들이 섞여 있는 이명세 감독의 영화 <M>의 콘티 중에도 듀안 마이클의 사진은 어김없이 참조물로 등장한다. <앤디 워홀>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마치 베이컨이 자신의 자화상이나 이런저런 삼면화 시리즈를 통해 보여준, 인간 신체의 늘어짐을 생각나게 하는 사진이다. “듀안 마이클의 사진은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거다. 거기에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듀안 마이클의 사진 중에는 마그리트의 그림 앞에 마그리트를 세워 찍은 사진들도 있다). 듀안 마이클의 사진은 우리가 하고 있는 생각들, 꿈과 현실, 이 모든 것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보게 만드는 감동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로 <사물의 기이함>이라는 제목의 사진이 있다. 처음에는 욕조의 미니어처처럼 보이지만, 연속사진으로 액자 속에 또 액자가 있는 걸 거듭 알게 되면서 과연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액자 안의 무엇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듀안 마이클은 연속 사진을 통해 사진적 철학에 접근한 작가로 유명한데, 이명세 감독이 추천한 <사물의 기이함>은 그의 세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례로 손꼽히고 있다.

풍경과 인물의 리얼리즘

이모개 촬영감독 _ 요제프 쿠델카의 1979년작

<요제프 쿠델카>(열화당 펴냄)

“사람들은 그가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느낀다.” 20년 전 사진동아리의 한 선배가 해준 말은 이모개 감독이 요제프 쿠델카의 사진집을 펼쳐보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사진들이 매우 세게 느껴졌다. 어떤 사진들은 세상에 없는 시간을 찍어낸 것 같더라. 예를 들면 마르케스 소설의 리얼리즘 같은 느낌이다. 한장의 사진 안에 수만 가지의 감정이 있는 듯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사진작가인 요제프 쿠델카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 뛰어들어 셔터를 누른 사진작가로 유명하지만 이모개 감독에게 특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집시들의 삶을 담아낸 사진들이었다. “드라마틱한 사진들은 아니지만, 오히려 느낌이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좋다. 날것 그대로를 담아낸 듯한 사진들도 이면의 사연을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1979년 프랑스에서 촬영된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는 듯한 어느 커플의 모습이 담긴 사진. 감독 자신이 워낙 바다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진작가의 존재감보다는 피사체가 그 자체로 주인공이 되는 사진이기 때문. “개인적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 영화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촬영자의 의도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풍경과 인물에 깊이 몰입하는 태도가 감동적이었다. 나 역시 그런 작업에서 느낄 수 있는 기운을 얻고 싶다.”

사진으로 사람과 소통하는 법

정정훈 촬영감독 _ 낸 골딘의 <담배 연기가 자욱한 차>(1979)

<낸 골딘>(열화당 펴냄)

<친절한 금자씨>를 준비하던 정정훈 촬영감독은 박찬욱 감독의 집에서 낸 골딘의 사진집을 발견했다. 인물들이 슬픔과 기쁨,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의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사진에서 정정훈 감독은 “촌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작가가 구도를 위해서 어느 자리에 위치한 것도 아니고, 알맞은 각도를 위해서 움직인 것도 아니다. 낸 골딘은 그저 그 공간에서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찍은 것 같다.” 특히 책 표지에 나온 ‘세컨드 팁에서 화장을 고치는 C’라는 제목의 사진은 금자를 만든 중요한 모티브였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금자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는 장면이 바로 이 사진에서 비롯된 장면이었다고. 정정훈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낸 골딘의 사진은 ‘담배 연기가 자욱한 차’란 제목의 사진이다. “역광으로 들어오는 빛이 강렬했다. 특별한 연출없이 일상적인 공간에서 빛의 힘을 그토록 자연스럽게 담아낸 게 놀라웠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금자가 제니와 근식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 비슷한 연출을 해보고 싶었다.” 정정훈 감독을 사로잡은 또 한장의 사진은 애인에게 맞아 얼굴에 멍이 든 채로 찍은 낸 골딘 자신의 셀프 포트레이트. “자신의 아픔을 쿨하게 보여준 사진이다. 영화나 사진이나 의사소통의 도구인 측면에서 공유하는 면이 많은데, 낸 골딘도 사진작가의 직함을 떠나 사진으로서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숨은 이야기가 있는 풍경

류성희 미술감독 _ 로버트 프랭크의 <Parade-Hoboken, New Jersey>(1955)

(NATIONAL GALLERY OF ART·SCALO 펴냄)

“영화 작업을 시작하면서 사진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됐다. 로버트 프랭크는 다이앤 아버스와 함께 내 영화 작업에 영향을 준 최초의 사진작가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현대사진의 기수로 불리는 미국의 로버트 프랭크를 꼽는다. “로버트 프랭크는 결정적 장면을 포착해서 본질을 미학적으로 완벽하게 찍어내려던 그 이전의 보도사진들과 달리 연출이 아님에도 현상이나 사건을 주관적인 감정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느낌이 있어 좋다. 성조기가 걸려 있는 이 사진도 보통의 작가라면 난리 법석인 행진 그 자체에 관심을 갖고 그 풍경에서 뭔가 구하려고 했을 텐데, 이 사람은 개인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성조기가 그 사람들을 가리고 있는 이 장면을 찍었다. 위대하다고 치부되던 당시 미국사회의 시민이 실제로는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 국기에 가려진 얼굴들로 느끼게 한다. 우상화를 배제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시적이다. <살인의 추억>을 할 때 봉준호 감독이 참조하라고 준 건 신디 셔먼의 사진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을 많이 생각했다. <살인의 추억>이 감독 개인의 입장에서 주변적인 시각을 모아 복합적인 요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금 말한 그런 방식의 예술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군중성이나 공공성이 아닌 작은 것을 놓치지 않으며 원인을 찾아가는 로버트 프랭크의 작가적 태도는 창작자로서 바로 내가 닮고 싶은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