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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예술과 영화 세계

캠벨 수프 통조림 등 일상적인 사물의 오브제나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무수히 복제한 실크스크린 혹은 재클린 케네디, 마오쩌둥과 같은 유명 인물들의 이미지들. 앤디 워홀이 ‘생산’하는 작업들은 예술의 높은 권위를 허물고자 하는 의도였다. 현대사회의 특성인 소비와 매스미디어의 속성을 적절히 잡아내 자신의 작업에 반영시킨 그의 작업은 회화, 조각, 사진, 영상까지 다양한 영역까지 아우른다. 앤디 워홀 작고 20주년으로 기획된 리움의 전시 <앤디 워홀 팩토리 전>(3월15일∼6월10일)을 맞아, 그의 작업의 개념들과 그 연장선상에서 제작되었던 영화 세계를 소개한다(전시문의: 02-2014-6901, www.leeum.org).

예술을 바꾸고 싶다면, 매체를 바꾸어라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마셜 맥루언의 말을 기억한다면, 아티스트 앤디 워홀(1928~87)이 영화 세계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힌 것은 아주 논리적으로 보인다. 그는 원래 상품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한 뒤, 영화감독으로 활동을 마감한다. 처음에는 보통 화가들처럼 그림을 그리던 워홀이 30대 초반부터 시각예술 미디어를 회화에서, 사진으로, 그리고 종국에는 영화로까지 점차 바꾸어가면서 세계적인 예술가로 탄생하게 된다. 맥루언의 말은, 미디어가 담고 있는 내용이 주요한 메시지가 아니라,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는 뜻으로, 다시 말해 똑같은 내용이라도 책으로 전달할 때, 그림으로 전달할 때, 그리고 사진으로 전달할 때 그 내용이 다르듯, 중요한 것은 미디어 자체라는 주장이었다. 맥루언의 말대로 워홀은 메시지가 아니라, 미디어를 바꾸어 나갔던 아티스트다.

“미디어는 메시지다”

1962년 워홀은 유화 그리기를 중단하고, 이른바 ‘실크스크린’ 수법에 의한 복사된 작품들을 내놓는다. 이를테면 마릴린 먼로의 사진 이미지를 이용한 실크스크린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재현하지 않고 복사하고, 대량생산하는 ‘희한한’ 행동을 시작했는데, 이게 바로 팝아트의 전성기를 여는 계기가 된다. 그는 더이상 눈에 보이는 대상을 손으로 재현하는 전통적인 수법의 회화로 돌아가지 않고, 기계의 도움을 받아 복사와 반복으로 특징되는 ‘시뮬라크라’의 세상을 열어간다.

워홀이 유화를 포기하고 실크스크린에 의한 수많은 초상화, 꽃, 전기의자 등을 만들어내는 데는 자기 예술표현의 미디어가 바뀌었기 때문인데,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사진이었다. 오래도록 예술가는 손으로 대상을 재현하며 예술의 결과물들을 내놓았는데, 사진의 등장으로 이제 손은 그 중심 역할을 눈에게 양도해야 했다. 동시에 이런 표현방법의 변화 때문에 사진은 탄생과 더불어 늘 예술인지 아닌지를 의심받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보들레르 같은 미학적 전통주의자들은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고 봤다. “너무 직접적이고, 너무 쉽고, 너무 상업적”이라는 이유였다. 예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예술가에 의해 해석되어야 하며, 예술의 결과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얻는 어려운 기술을 보여줘야 하고, 또 대중의 취미에 호응하는 상업적인 작업이 될 수 없는 게 예술의 태생적 성질이라고 보들레르는 말했다. 그러므로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맥루언이 보들레르를 만났다면 뭐라고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대시인 보들레르도 ‘미디어의 이해’에 대해 한참 강의를 들어야 했을 것이다.

사진의 등장으로, 미디어가 바뀌었는데, 다시 말해 예술의 환경이 급격히 변했는데, 예술의 중심부는 여전히 전통적인 수법에 따른 작품들을 내놓았다. 이런 관습에 일격을 가한 인물이 다다이스트 마르셀 뒤샹이다. 그는 논란 많던 사진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예술 행위에 이용했다. 예술의 표현도구가 과거부터 주어진 소재에만 한정돼선 똑같은 결과물만 내놓는다는 반성에서다. 뒤샹은 ‘과거’에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파괴하고자 했다. 부르주아의 견고한 가치관과 과거를 거의 동의어로 봤던 그에게 부르주아적인 미술도 단연코 배격 대상이었다. 뒤샹이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맥루언의 주장을 먼저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디어를 바꾸어야 예술이, 곧 세상이 바뀐다는 혜안은 본능적으로 먼저 체득한 것 같다. 뒤샹의 체험을 논리로 설명한 대표적인 글이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다. 사진과 영화의 등장으로 기술복제 시대가 열렸고, 다시 말해 미디어가 바뀌었고, 따라서 메시지도 변한다는 것이다. 벤야민도 뒤샹처럼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으로 과거의 예술은 물러가고, 따라서 과거의 질서는 해체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으로 희망했다. 벤야민의 주장이 다 맞은 건 아니지만, 예술은 그 표현 내용이 아니라, 매체에 의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는 사실을 지적했다는 점은 여전히 중요하다.

영화제작 제1기: ‘팩토리’ 세계에 대한 찬가

예술 환경을 급변시켰던 뒤샹의 후계자를 꼽자면 단연 워홀이다. 뒤샹의 시도가 파리의 엘리트들 사이에서만 소통된 데 비해 워홀의 작업은 대중과 소통하는 데까지 성공한다. 예술가가 팝스타들처럼 말 그대로 대중의 스타로 부상하는 시기가 열린 것이다.

워홀의 예술은 ‘반복’이다. 사진 이미지에서 빌린 대상을 실크스크린으로 수없이 복사한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를 의도적으로 지워버리는 것이다. 복사된 것을 또 복사하는 그의 작업은 원본이라는 상위 개념을 무너뜨리고, 오로지 복사본‘들’이라는 동등한 지위의 결과물들만 쏟아놓는다. 원본 없는 복사본, 곧 시뮬라크라의 세상이 워홀의 작품 세계다. 예술이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은 다 무너진다. 워홀이 즐기는 것은 바로 그런 관습의 파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이라는 의미의 ‘Factory’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

그는 ‘화가’, ‘작가’ 같은 권위의 상징으로서의 예술가로 불리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는 “기계가 되고 싶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주체를 의식하는 이성적인 인간이 아니라, 기계처럼 메시지 따위는 의도하지 않는 가치중립적인 존재가 되고 싶고, 무한 복사가 가능한 사진기/기계가 되고 싶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작가는 없다는 뜻이다. 롤랑 바르트 같은 구조주의자들이 말한 ‘작가의 죽음’이니 ‘작가의 부재’니 하는 개념들을 워홀은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맥루언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이런 모든 행위는 그의 예술 미디어가 바뀌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다. 워홀은 사진 작업을 시작하면서 과거와는 환경이 다른 조건 속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던 것이다.

워홀이 사진에서 영화로 넘어가는 것은 1963년 캠펠 수프 시리즈를 발표하며 뉴욕의 스타로 부상할 때다. 똑같은 수프 깡통을 수없이 복사하며, 작품에는 작가가 없듯, 의미도 없다는 개념을 퍼뜨릴 때다. 이제 워홀의 미디어는 사진에서 영화로 바뀌었고, 영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 그는 1965년 공식적으로 ‘미술세계에서의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영화는 캠펠 수프 시리즈처럼 반복되고, 변화없는 모습을 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첫 작품이 <수면>(Sleep, 1963)이다. 무려 6시간짜리 작품으로, 워홀의 친구이자 팩토리(Factory)의 고정 멤버였던 시인 존 조르노가 자는 모습을 계속 찍은 다큐멘터리다. 이 작품으로 그는 단숨에 뉴욕언더그라운드 영화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수십개씩 복사하여 스타의 유일성을 희석시키듯, 자는 모습만 계속 보여주어 행위 자체의 의미도 지워버리는 작품으로 해석됐다. 대중이 영화관을 가는 이유는 스타들을 과잉소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한 워홀은, 자신의 영화에 등장하는 대상도 과잉소비의 대상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새벽부터 자정까지 찍은 <엠파이어>(Empire, 1964)는 8시간짜리로, 역시 흑백에 정적인 영화다. 카메라는 빌딩을 향해 고정돼 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빛의 밝기가 변함에 따라 빌딩이 다르게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촬영한 것이다. 그에겐 과거의 작가 개념 따위가 없는 게 이 영화를 찍기 위해 그는 카메라 뒤에 서 있지도 않았고, 그의 조감독 역할을 했던 폴 모리세이가 시간마다 나타나 필름만 갈아주었다. 그러니 이 영화는 기계가 찍은 것이다.

영화제작 제2기: 내러티브의 도입

전혀 움직이지 않던 카메라가 조금씩 움직이고, 무엇보다도 편집이 끼어들기 시작하는 게 워홀 영화의 첫 변화다. 1963년작 <키스>(Kiss)는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키스를 나누는 두 얼굴을 보여주는데, 스크린을 가득 채울 정도로 얼굴이 크게 나오고 또 얼굴이 매우 앳되게 나와 누가 남자이고 여자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다. 50분짜리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두명의 남자 동성애자가 그 얼굴의 주인공들임을 알 수 있다.

오로지 ‘바라보기’에만 집중하던 초기의 영화는 1965년 워홀의 첫 사운드 영화로 기록되는 <하롯>( Harlot)이 발표되며 변화의 큰 조짐을 보인다. 이 영화뿐만 아니라 워홀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전부 팩토리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자신들을 재밌게도 ‘슈퍼스타’라고 불렀다. <하롯>엔 여장남자 스타인 마리오 몬테스가 다른 여자와 함께 앉아, 화면 밖에서 다른 남자들이 떠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대사를 계속 듣는 것으로 진행되고 끝난다. 초기작부터 이 영화까지는 워홀의 팩토리 인생에 대한 찬가로 읽힌다. 그들의 일상이 반복해서 보이는 까닭이다. 자유분방한 섹스 개념, 특히 동성애에 대한 노골적인 지지, 누드, 댄디즘, 일상화된 퍼포먼스, 뉴욕풍 펑크록에 대한 애착 등 워홀의 팩토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들이 거울처럼 기록돼 있다.

편집이 적용되고, 사운드도 도입되니, 그의 영화는 서서히 일반 영화의 한 부분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일반 영화의 재미를 기대했다간 여전히 낭패보기 십상이다. 그냥 캠펠 깡통 보듯 접근하는 게 오히려 감상을 위해 나을 듯싶다. 이 시기의 가장 큰 변화는 내러티브의 도입이다. 그 첫 작품이 앤서니 버지스 소설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를 각색한 <비닐>(Vinyl, 1965)이다. 물론 스탠리 큐브릭이 만들 듯 하진 않았다. 시인이었던 ‘슈퍼스타’ 제라드 말랑가가 의자에 앉아 갖가지 고문을 받는 것으로 진행된다. <루페>(Lupe, 1966)는 멕시코 출신 여배우 루페 벨레스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 밤을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초창기 팩토리 슈퍼스타 중 워홀이 큰 애착을 보였던 앳된 얼굴의 에디 세그윅이 주연을 맡았는데, 영화는 루페 이야기라기보다는 세그윅의 삶을 표현하고 예언한 작품으로 남았다. 세그윅은 그 뒤 약물과용으로 28살의 나이에 숨졌다.

내러티브 시절 워홀의 최대 유명작은 <첼시의 소녀들>(Chelsea Girls, 1966)이다. 3시간 반짜리 영화인데, 처음으로 영화관에 배급도 됐다. 이 영화로 워홀은 미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에 자신의 영화 경력을 알릴 수 있었다. 뉴욕의 첼시호텔에 같은 방을 정해놓고, 다른 두 사람을 그곳에 넣어 어떤 행동을 하는지 계속 지켜보는 것이다. 워홀의 작품 중 가장 코믹한 것으로 평가됐으며, 하나의 스크린에 두 화면이 동시에 상영된 사실로도 유명하다.

영화제작 제3기: 은둔의 제작자 시절

<첼시의 소녀들>은 상업영화 식으로 말하면, 수입도 좀 올린 작품이 됐다. 워홀은 이후 작품 길이를 상업영화에 맞추는 등 좀더 대중적인 형식에 접근한 영화들을 연속해 발표하는데, 이때의 작품들은 모두 누드와 섹스의 삽입으로 입소문이 났고, 지금도 워홀 관련 영화 중 가장 쉽고 유명한 것으로 남아 있다. <나, 남자>(I, A Man, 1967), <자전거 소년>(Bike Boy, 1967), <누드 레스토랑>(Nude Restaurant, 1967), <외로운 카우보이>(Lonesome Cowboys, 1969) 등이 그것들이다.

이중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았던 작품이 <외로운 카우보이>다. 웨스턴 형식을 이용했는데, 슈퍼스타 중 일반 관객에게도 사랑을 받았던 조 달레산드로가 주연으로 나온 점도 유리하게 적용됐다. 근육질의 몸매에 금발인 달레산드로는 워홀 영화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들의 상징으로 수용됐던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남성 섹스 심벌이었다.

1968년, 워홀은 팩토리의 주변 인물이었던 발레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에게 총으로 저격당했다. 이 사건은 메리 해론에 의해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1996)라는 극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저격사건 이후로 워홀은 외부와의 접촉을 자제하는 은둔적인 생활을 시작했다. 영화는 자신의 조감독이었던 폴 모리세이에게 모두 맡기고, 워홀은 제작만 담당했다. 모리세이의 작품들은 내러티브도 있고, 언더그라운드의 스타도 등장하고, 이야기의 전개가 모티브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조 달레산드로가 대부분 주연을 맡아, 오로지 그를 보러 오는 일반 관객도 많았다. <플레시>(Flesh, 1968), <트래시>(Trash, 1970), <히트>(Heat, 1972) 등이 인기작이다. 특히 <히트>는 빌리 와일더의 <선셋대로>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달레산드로와 또 다른 스타였던 실비아 마일즈가 출연해 큰 사랑을 받았다.

지금 워홀이 살아 있다면

워홀은 그림에서, 사진으로, 그리고 영화로 미디어를 바꾸어가며 자신의 경력을 쌓았다. 그러면서 예술의 역할과 의미도 급격하게 바뀌었다. 아마 본인도 그 변화의 범위를 분명히 인식하거나 통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작가는 죽었다’는데, 작가가 예술 행위의 중심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변화의 큰 흐름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앤디 워홀의 몸을 거쳐 지나간 점은 그가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예술가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아마 인터넷의 가상공간에서 또다시 예술의 새로운 안테나 역할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여전히 대중은 새로운 미디어의 메시지에 당황해하며, 그의 작품에 환호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