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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무엇인가 <눈부신 날에>

불치병 꼬마의 희생으로 성장하는 철없는 아빠.

영화 속에서 ‘아이’들은 언제나 성장의 아이콘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주인공일 때에는 스스로 무럭무럭 자라고, 미성숙한 어른들이 주인공일 때에는 그들이 성장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래서 아이들의 순수함은 이중적으로 기능한다. 순진한 아이는 세상의 비열함과 직면하면서 순진함에서 벗어나고 폭력적인 현실을 인식하면서 어른이 된다. 그러나 비열한 세상과 이미 하나가 되어버린 어른들은 어린이의 순수함과 대면하면서 본래의 자아를 되찾는다. 그러니까 전자는 순수함이 깨어지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후자는 순수함과 재회함으로써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박광수 감독의 신작 <눈부신 날에>는 후자에 속하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던 한 남자가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딸을 만나 어디서부터 어긋나버렸는지 알 수도 없는 삶을 제대로 살기 시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야바위판의 바람잡이 우종대(박신양)는 깡패나 조폭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애매한, 폼 안 나는 날건달이다. 조직 내에서조차 왕따처럼 겉도는 그는 패싸움에 휘말린 자신을 동료들이 버리고 가는 바람에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 그에게 선영(예지원)이 찾아와 준(서신애)이라는 아이와 몇달간 살아주면 합의도 해주고 입양비조로 얼마간의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해온다. 그렇게 우종대와 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지만, 종대는 한순간도 아이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거나 애틋한 마음을 주지 않는다. 이때부터 그를 아빠라고 부르는 준이의 처절한 짝사랑, 사부곡(思父曲)이 시작된다. 그리고 종대가 아이를 유기해서 사고가 날 때마다 선영이 찾아와 호통을 치고, 둘을 다시 꽁꽁 연결해준다.

이 영화가 제기하는 가장 강력한 문제의식은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선영이 온갖 억지스러운 상황을 감수하고, 불합리한 비용을 감당하면서 종대에게 준을 맡기는 것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준에게 생의 마지막이자, 가장 큰 소원인 아빠와의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준이 무심하고 폭력적인 남자 종대에게 대가없는 사랑을 무한정 퍼붓는 이유는 오로지 그가 자신의 아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앞가림하기도 벅찬 인간인 종대가 이 두 여자의 애착이 엉뚱하다고 여기면서도 미적미적 그들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이유는 준이 자기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그들의 그런 믿음은 한낱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다. 결국 셋은 원장 수녀의 기이한 장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했다는 것은 정말 잔인한 장난이라고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때문에 거짓된 유대감을 기반으로 묘한 사랑을 경험하고 실천한 셈이 된다.

그렇다면 정말 이 영화는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들이 모여 나누는 연대의식이 혈연을 중심으로 한 가족모델의 대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종대와 준 그리고 선영의 결합은 외관상으로는 혈연 중심의 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애정을 추동하는 힘이 너무나 혈연지향적이라는 데 있다. 준이 죽을 때까지 세 주인공은 모두 종대가 그녀의 친부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준의 절대적인 사랑과 희생은 모두 그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부신 날에>는 화려한 카메라워크와 감각적인 편집으로 매우 스타일리시한 외관을 갖고 있음에도 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가족을 모색하기보다 고전적인 가족이데올로기를 위해 복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구 기증’이라는 중요한 소재 역시, 실명 위기에 처한 종대의 탁한 눈동자가 준의 아름다운 눈동자로 이식되고 타인을 향한 사랑의 확산이라는 의미보다는 가족애로 변색되면서 이 작품이 21세기판 <심청전>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부녀의 비밀을 좀더 일찍 폭로하여 준과 종대에게 다른 갈등을 안겨줬더라면, 관객이 비혈연 가족의 새로운 면모를 더 많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칠수와 만수>로 시작하여 <그들도 우리처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재수의 난> 등에서 낮은 곳에서 사회를 조망하면서도 정제된 미학을 선보였던 박광수 감독은 이 영화에서는 민족과 정치라는 거대한 문제에서 벗어나 가족이라는, 작지만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더 흥미로운 지점은 ‘월드컵’을 바라보는 감독의 분열된 시선이다. 2002년 월드컵은 종대와 준 부녀의 사랑이 외화되는 동기이자,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시공간적 배경으로 작용한다. 감독은 민족주의의 뜨거운 열기의 한복판에서 공감의 정점을 맞이하는 부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수많은 민중의 환희와 열정의 분화구였던 월드컵을 이야기한다. 동시에 그 군중이 병원에 가는 길을 가로막아 절규하는 종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수의 행복에 동화될 수 없는 소외된 소수의 모습을 장면화한다. 기쁨과 슬픔이 한순간에 전환되는 이 장면은 조작된 민족족의의 상징이자, 민중의 자발적인 열정의 발산인 월드컵의 이중적인 얼굴을 폭로하며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한다. 이처럼 박광수 감독의 미덕을 자꾸만 사회적인 것과 연결시키려는 것은 철지난 습관일 뿐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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