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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의 젊은 작가들] 김중혁
최하나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7-04-27

문학은 죽었다? 문학의 위기는 새롭지 않은 화두다.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매번 비장하게 강조되는 위기론은 다매체 환경 속에서 책의 입지가 축소되어가는 일차적인 현상 외에도 문학 자체의 존재방식이 변화하고 있음에 기인한다. 과거 70~80년대 지적·도덕적 발언대 역할을 하며 현실사회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문학의 권위는 90년대 이후 사실상 그 힘을 잃었다. 자아와 일상의 탐구에 시선을 돌린 90년대 작가들의 미학적 성과와는 별도로, 문학의 위상과 역할을 둘러싼 비관적 목소리는 점차 높아졌고 이는 최근 “근대문학의 종언”(가라타니 고진)이라는 다소 극단적인 선언으로도 이어지기도 했다.

2000년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고 있는 신진 작가들의 출현은 어쩌면 그래서 더욱 고무적이다. 김중혁(<펭귄뉴스>), 이기호(<최순덕 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박형서(<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자정의 픽션>). 이제 한편 혹은 두편의 소설집을 내놓고 나란히 장편을 준비 중인 세 사람의 젊은 작가는 기존의 관습을 깨뜨리는 독특한 어법과 미학을 형성해가고 있다. 뒤통수에 난 눈으로 세상을 보고, 게릴라가 되어 비트를 전파하며, 두피의 기름에서 유전을 발견하는 이들의 이야기보따리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능청스레 넘나든다. 엄숙과 권위를 걷어낸 발랄한 유머감각과 상상력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는 대신 유희를 통한 전복과 확장을 꿈꾸는 중이다. 풍성한 이야기와 재기 넘치는 입담으로 문학의 종언이라는 잿빛 선언을 무색하게 만드는 젊은 작가 세 사람을 직접 만났다. 아직 온전히 무르익지 않았으되, 저만의 파릇한 에너지로 한국 소설의 지평을 확장 중인 김중혁, 이기호, 박형서의 이야기 속으로 당신을 안내한다.

헐렁한 소설을 꿈꾸는 0.5cm SF

<펭귄뉴스>의 김중혁

그의 소설을 읽기 위해선 눈을 감아야 한다. 라디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 끝의 촉감을 느끼며,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에 몸을 실어야 한다. 총 8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김중혁의 소설집 <펭귄뉴스>는 제각기 감각을 자극하는 음표들이 모여 우아한 화음을 빚어내는 연주곡과도 같다. 시각 장애인용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려주는 <무용지물 박물관>이 청각에 의지해 사물의 모습을 머릿속에 재현해낸다면,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는 나무의 굴곡을 손으로 느끼며 해안선 모양을 유추하는 나무 조각 지도를 제시한다. 손의 촉각을 극대화한 <회색 괴물>은 낡은 타자기에 꿈틀대는 생명을 불어넣고, <바나나 주식회사>는 자전거 바퀴가 구르는 리듬을 음미하며 길을 찾아나간다. 라디오, 타자기, 자전거. 그가 연주하는 악기는 그렇듯 시대의 속도에 반걸음씩 뒤처진 사물들이다. “세계는 계속 진보하는데, 인간은 점점 퇴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도구가 발달할수록 감각은 점점 무뎌지는데, 그 감각을 촉발시킬 수 있는 사물들이 아날로그적인 것들이었다.”

해커와 스파이와 발명가가 책장을 넘나드는 김중혁의 소설은 이른바 “0.5cm SF”다. 지상에서 살짝 떨어져 있되 순전한 허구도 아닌, 현실과 상상이 자유로이 접점을 이루는 3차원 영역에서 그의 이야기들은 전파를 보낸다. “소설이 재밌는 것은 이런 거다. 내 머릿속에서 가상의 공간과 가상의 인물로 구축한 3차원 세트를 나는 평면에 옮긴다. 그러면 읽는 사람들은 그 평면을 다시 자신의 영사기를 통해 3차원으로 떠올린다. 그런데 그 세계는 내가 원래 생각했던 것과 다르지 않나. 그게 참 재미있다.” 현실의 제어로부터 탈주된 사물들은 관습을 벗고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예컨대 <바나나 주식회사>의 자전거가 후진이 불가능한 삶의 논리를 은유한다면, <펭귄뉴스>의 비트(beat)는 몸과 마음을 뒤흔드는 박동을 통해 경직된 체제에의 저항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감각을 경유한 상상의 덩어리들은 결국, “내 스피드”를 찾아나가는 <사백 미터 마라톤>의 주인공처럼, 자신만의 고유한 감각과 리듬을 회복해가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사회를 비판하거나 현실을 개혁하거나 교훈을 주고자 하는 글이 아니다. 그저 사람들이 잊고 있던 것을 재발견하고, 잊고 있던 감각들을 깨우쳐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차가운 사물로부터 감각을 끌어내고, 그 감각을 이야기의 행간에 촘촘히 엮어넣는 것은 김중혁만의 문화적 감수성이다. 요리잡지와 여행잡지 기자, 웹기획자 등 무수한 직업을 거쳐 지금 현재 작가이자 기자로 활동 중인 그는 자신의 다양한 문화적 체험들, 이른바 “딴 짓 하며 산만하게 놀았던 것들”을 양분 삼아 독특하고도 섬세한 감수성을 직조해냈다. ‘작가의 말’을 통해 톰 웨이츠, 보스턴 레드삭스, 레이먼드 카버, 팀 버튼 등 100여개에 가까운 레퍼런스를 제시하는 김중혁은 자신이 무수한 “조각”들로 이루어진 “레고 블록”이라고 표현한다. “작곡가가 되기보다는 DJ가 되고 싶다. 내게 소설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기보다는 그동안 스스로 쌓아왔던 문화적 취향들을 버무려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야기들, 이미지들, 소리들을 리믹스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실 DJ라는 존재는 자신의 취향을 통해 수많은 다른 것들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대한 창작자이기도 하다.”

2000년 <펭귄뉴스>로 등단하기 전까지 무수한 낙방을 경험했고, 등단 뒤에도 한동안 청탁의 기근을 겪었노라 장난스레 이야기하는 김중혁은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머리를 짜내는 타입의 소설가가 아니다. 재미있는 제안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고, 소설에만 매달리기에는 흥미로운 일이 너무나 많다는 그는 “완벽하게 꽉 짜인” 소설 대신 자신의 딴 짓들이 자연스레 묻어나는 “헐렁한” 소설을 꿈꾼다. “좀비에 관한 장편을 준비 중인데, 잘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웃음) 앞으로도 지금과 비슷한 속도로, 너무 빠르지 않게 달려가고 싶다. 책을 많이 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쓰고 싶은 것을 잘 쓰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눈을 감고, 세상을 향해 감각의 촉수를 세우고, 지금 그는 자신의 스피드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