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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기계에 깃든 시대정신

사이보그에서 심보그로, <스파이더 맨> 시리즈가 보여주는 사이보그 진화론

어렸을 적에 ‘스파이더 맨’은 해상도가 낮은 흑백TV 속에 ‘왕거미’였다. <왕거미>를 보고 골목으로 몰려나온 아이들은 온몸에 영화를 흠뻑 뒤집어쓴 채 손바닥을 벌려 벽에 들러붙곤 했다. 찍찍거리는 흑백TV로 보던 저해상의 왕거미가 이제 최첨단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만든 고해상의 ‘스파이더 맨’이 되어 다시 찾아왔다. 곧 개봉될 <스파이더맨 3>는 3천억달러를 들여 컴퓨터그래픽의 정수를 보여줄 예정이란다.

옥토퍼스와 헥사포드

<스파이더 맨2>에서 닥터 옥타비우스는 자신의 몸에 기계로 만든 네개의 다리를 이식한다. 하지만 신체와 기계의 소통을 담당하는 칩에 이상이 생기고, 결국 그는 몸에 붙은 기계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사악한 ‘닥터 옥토퍼스’가 된다. 결정적인 순간에 되돌아온 신체의 양심은 기생충처럼 몸에 들러붙은 기계의 사악함을 떨치기 위해 스스로 몰락을 택한다. 괴물 옥토퍼스는 물에 가라앉으면서 인간 옥타비우스로 되돌아간다.

이 장면을 보며 당장 스텔락의 <헥사포드>를 떠올렸다. 이 호주의 행위예술가는 언젠가 인간의 팔과 연결된 여섯개의 기계 다리를 선보였다. 어떻게 보면 스파이더 맨 같고, 어떻게 보면 닥터 옥토푸스 같기도 한데, 내 눈엔 거미 인간보다는 문어 박사에 가까워 보인다. ‘헥사’(여섯)와 ‘옥토’(여덟)라는 말의 대구 효과 때문일 게다. 아무튼 기계장치 이식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스텔락의 야심은 문어 박사의 그것을 닮았다.

신체는 고루하다

“신체는 고루하다.”(The body is obsolete) 스텔락의 공식 홈페이지가 방문객에게 보내는 인사말이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이미 50년대에 미디어 철학자 귄터 안더스는 <인간의 골동성>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기술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나, 인간의 자연적 신체와 정신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그 격차로 인해 날로 새로워지는 테크놀로지 앞에서 인간이 ‘골동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얘기. 미디어가 새로워지고 신체는 고루해진다.

인간을 결함을 가진 존재로 보는 견해는 매우 오래됐다. 인간은 맹수처럼 날카로운 이빨도, 새처럼 우아한 날개도, 초식동물처럼 재빠른 다리도 갖지 못했기에 그 간극을 메우려 도구(미디어)를 만들었고, 그 결과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는 것. 그런 맥락에서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를 “인간의 확장”으로 규정한다. TV는 눈의 연장, 라디오는 귀의 연장, 자동차는 다리의 연장, 크레인은 팔의 연장, 컴퓨터는 두뇌의 연장. 이런 견해를 흔히 미디어의 ‘의족명제’(prothesenthese)라 한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은 확정할 수 없는 동물”이다. 몸에 의족을 붙임으로써 인간은 자연적 한계를 넘어 무한히 진화한다. 기계이식으로 신체를 진화시키는 닥터 옥타비우스는 미디어 시대의 ‘니체리언’이다. 반면, 플라톤의 문제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것. 사실 신체가 자연의 바깥으로 벗어나는 데에는 어떤 불안함이 있다. 가령 최첨단 가짜 신체가 고루한 진짜 신체를 지배하는 시나리오를 생각해보라. 그런 의미에서 닥터 옥토푸스의 죽음은 ‘플라토닉’한 몰락이다.

사이보그 선언

폴 비릴리오는 속도혁명은 이미 광속에 도달했기에 제3의 미디어 혁명은 ‘이식혁명’이 될 것이라 말한다. 이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기적 신체에 무기적 기계를 결합시키는 방법, 다른 하나는 유기적 신체에 유기적 기관을 옮겨 심는 방법. 스텔락의 퍼포먼스는 몸에 기계를 다는 수준을 넘어 기관을 이식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그의 다음 퍼포먼스는 제 팔뚝에 인공배양한 귀를 이식하는 것이라 한다.

스텔락이나 비릴리오나 미래를 이식혁명의 시대로 전망하는 데에는 일치하나, 평가는 갈린다. 비릴리오의 전망은 다분히 묵시론적. 그는 그런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상정하고, 거기에 대한 저항을 사유한다. 반면 스텔락의 비전은 온통 장밋빛. 미래는 인간이 제 몸을 맘대로 디자인해 사용하는 유토피아다. 폴 비릴리오는 스텔락의 이런 철없는 낙관주의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의 눈에 스텔락의 퍼포먼스는 가공할 몰취향으로 보일 뿐이다.

유기체와 무기체가 결합한 ‘사이보그’는 오늘날 인간의 숙명이 되었다. 여기에 열광하는 것은 스텔락만이 아니다. 도나 해러웨이는 그 유명한 <사이보그 선언>(1985)에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연상시키는 어조로 사이보그 시대의 혁명적 잠재성에 주목한다. 사이보그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새로운 토대다. 즉 인간과 동물, 신체와 기계, 물질과 가상의 이항대립을 무너뜨리는 사이보그 혁명이 결국은 남성/여성의 차별과 그것의 재생산 역시 무력화시키리라는 것이다.

사이보그에서 심보그로

‘사이보그’라는 낱말은 그 사이에 ‘심보그’(symborg)라는 신조어로 진화했다. ‘symbios’와 ‘organization’의 합성어인 심보그는 한마디로 인간과 동물, 신체와 기계, 가상과 현실의 공생관계 위에서 살아가는 유기체를 가리킨다.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 진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명 자체가 실은 다른 생명체와의 공생을 통해서만 탄생하고 존속할 수 있다는 얘기. 이 자연현상을 인공적으로 수행하는 존재가 바로 ‘심보그’다.

사이보그가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이식된 타자에 대한 자아의 지배를 의미한다면, 심보그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평등한 공존을 함축한다. 어느 퍼포먼스에서 스텔락은 여러 개의 낚싯바늘로 제 몸을 공중에 띄웠다. 인포머틱과 로보틱스를 결합한 이 퍼포먼스에서 그는 네티즌들로 하여금 인터넷을 통해 원격으로 크레인을 조종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그의 신체는 더이상 그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와 공존하는 어떤 것이 된다.

그 타자가 굳이 기계나 기관처럼 물질성을 띨 필요는 없다. 오늘날 누구나 사이버공간에서 자기의 ID를 갖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바타’라는 이름으로 제 자신의 화신을 갖고 있다. 숙주가 돈을 들여 아바타를 먹여주고 입혀주면, 아바타는 그 대가로 숙주에게 삶의 보람과 기쁨을 선사한다. 심보그는 자아가 사이버공간의 이 도플갱어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게 된 어떤 상황을 가리킨다. 이 공생이 과연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

검은 스파이더 맨

<스파이더맨 3>에는 악당이 셋이 등장한다고 한다. 하지만 셋으로 늘어나봤자, 각 악당의 위협감은 1/3로 줄어들 뿐이다. <스파이더맨 3>에서 상상력의 진전이 있다면, 그것은 검게 변한 그의 복장. 3편에서는 ‘심비오트’라는 이름의 외계 생명체가 그의 몸에 들어온다고 한다. 스파이더 맨은 악당 셋과의 외적인 대결은 물론이고, 이제 자기 자신과도 내적인 투쟁까지 벌여야 한단다. 한마디로 2편을 이끌어갔던 ‘사이보그’의 악몽이 3편에서 ‘심보그’의 악몽으로 진화한 것이다.

인터넷을 찾다 보니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을 비판하는 글이 눈에 띈다. “사이보그는 너무나 모순에 가득 차고, 군사주의적 함의가 가득 차서”, “자유의 상징으로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 글을 쓴 이는 낡은 사이보그를 대체할 새로운 선언을 제안한다. “사이버공간의 유령이 기호언어와 기술유기체적 소통의 네트워크, 기계로 된 시대정신 안을 배회하고 있다. 시대정신은 기계에 있다. 그 유령은 공생적 유기체, 심보그다.”

추기: 미국의 좌파들이 사이보그나 심보그를 해방의 상징으로 삼을 때, 헐리우드는 그것을 악몽의 화신으로 만든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좌파가 철없이 미래주의적인 반면, 할리우드는 역시 현명하게 보수적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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