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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끝내 나눌 수 없는 고통 <밀양>
김혜리 2007-05-23

죽고 싶은 명백한 이유, 살아야 할 은밀한 이유

스포일러 있습니다.

남들이 나를 불행한 여자라고 부르지만 않으면, 난 감쪽같이 다시 행복해질 수도 있을 거야.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기만 하면, 그럴 수만 있다면…. 신애(전도연)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교통사고로 죽어버린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아들 준(선정엽)을 데리고 이사한다. 밀양 오는 길에 고장난 차를 고쳐주러 온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에게 신애는 문득 묻는다. “밀양의 뜻이 뭔 줄 아세요? 비밀의 햇볕이래요.” 그녀의 인생은 의미에 목말라 있다. 그리고 종찬은 이 속모를 여자를 그날부터 졸졸 따른다. 늘 네댓 걸음 뒤에서, 부르면 다가서고 밀쳐내면 물러나면서.

사실 남편이 신애를 떠난 건 죽음이 처음이 아니었다. 남편은 다른 사람을 사랑했었다. <밀양>은 시작이 시작이 아니고, 끝이 끝이 아닌 영화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신애는 먼 길을 걸어왔고 영화가 끝나도 신애에게 끝난 일은 없다. 2시간20여분의 러닝타임은 툭 베어낸 생의 고약한 한 토막일 뿐이다. 신애는 관객이 모르는 과거에 (아마도) 세번의 절망을 맛보았고 관객의 눈앞에서 두번의 끔찍한 상실을 경험한다. 짐작건대 그녀는 아버지와 불화했고 피아노 공부를 후원받지 못했으며 그 꿈 대신 사랑에 인생을 걸었으나 배신당했다. <밀양>이 보여주는 신애의 시간은 플래시백이나 판타지 장면 없이 곧바로 흐르며 마디가 분명히 구분된다(밀양으로 간다-산다-아들을 유괴당한다-기독교에 감화돼 범인을 용서한다-신에게 분노하여 미친다-치료받고 퇴원한다). 오래전 이창동 감독은 소설은 사건이 필요한데 우리의 일상은 기승전결이 없다며 혹시 영화는 다른 서사가 가능할지 모른다는 희망을 비친 바 있다. <밀양>은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한 점에서 시작하고 끝난다는 ‘기원의 신화’에 반발한다.

밀양은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이 아니다. 일상이 특별한 의미도 품위도 얻지 못한 채 소진되는 무수한 도시의 대명사일 뿐이다. 반면 신애는 ‘아이를 유괴당한 엄마’의 전형이 아니라, 운명에 특이한 태도로 반응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인생에 납득할 만한 스토리를 끈질기게 부여하려고 몸부림치는 여자다. 아들을 잃은 신애가 붙든 논리는 ‘신의 뜻’이다. 하지만 범인의 죄를 사하는 특권마저 하나님이 가로챘다는 사실을 발견한 순간 신애는 쓰러진다. 남은 건, 자기를 망가뜨려 신이 지은 세계에 흠집을 내려는 ‘자해 공갈’뿐이다. 신애로 분한 전도연은 바싹 마른 풀포기처럼 메마르고 작다. 영화에서 그녀는 피해자지만 줄곧 극한상황을 표현해야 하는 까닭에 결과적으로 배우 전도연은 전에 볼 수 없던 악의와 독기를 연기한다. 송강호의 종찬은, 단순히 유머로 비극의 숨통을 트는 환기구 역할이 아니다. 종찬의 존재로 인해 <밀양>은 원작 <벌레 이야기>와 결정적으로 다른 이야기가 된다. “우리가 어디 뜻보고 삽니까? 그냥 살지예”를 비롯해 그의 대사는 구구절절 명언이다. 종찬은 곧 밀양이고, 신애가 눈을 맞추어야 할 현실이며, 이 영화의 혼이다.

<밀양>은 또한 타인과 끝내 나눌 수 없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다. <밀양> 속 기독교인들은 모두 선의와 진심을 갖고 자신과 이웃을 위해 기구한다. 극중 교인들이 위선자로 보일 수는 있으나, 이 영화는 그들이 다른 인간들보다 특별히 더 위선적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밀양>은 긴 영화지만, 인물과 함께 물리적 시간을 견디는 일이 꼭 필요한 드라마다. 영화의 종장에서 신애는 종찬이 든 거울 앞에 앉아 짝짝이 머리칼을 썩둑썩둑 자른다. 이창동 감독은, 절망이 완전히 잦아들어야 희망이 오는 것도, 용서가 시작됐다고 미움이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신애의 머리칼처럼 삐죽삐죽 못난 물건이 인간의 삶이라고, 그러니까 당신은 결국 가장자리 없는 무(無)를 감당하는 법을 깨우쳐야 할 거라고. <밀양>은 삶의 이유라 여겼던 모든 명분과 가치가 소멸한 후에도, 생을 놓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우리 안의 힘에서 신을 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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