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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것들을 필사적으로 불러내는 초혼가, <스틸 라이프>

사라져가는 것들을 필사적으로 불러내는 초혼가.

한 감독은 평생 단 한편의 영화만 만든다. 지아장커야말로 그렇다. <소무>에서 <플랫폼>과 <임소요>를 거쳐 <세계>에 이를 때까지, 그는 늘 변하는 것을 찍으면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아장커가 만들어내는 단 한편의 영화는 <스틸 라이프>에서 마침내 정점에 올랐다. 이 영화는 완전하다. 그리고 여기엔 장이모와 첸카이거의 요즘 작품들에선 절대로 찾을 수 없는 현실의 중국이 있다.

지아장커는 서른살 무렵에 쓴 글에서 불안정한 자신의 생활을 떠올리며, 영화를 선택한다는 건 뿌리뽑힌 삶을 선택한다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는 늘 자신의 삶과 영화를 일치시키는 감독이다. <플랫폼>이 그랬고, <세계>가 그랬으며, 이제 <스틸 라이프>가 그렇다. 이 영화엔 무너진 돌들이 있고 뿌리 뽑힌 사람들이 있다.

산밍은 16년 전 자신을 버리고 딸과 함께 가출한 아내를 찾아 주소만 달랑 들고 산샤로 찾아든다. 그러나 산샤의 그 주소지는 댐 건설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수몰되어버렸다. 션홍 역시 소식이 2년째 끊겨 있는 남편을 찾아 산샤로 온다. 물어물어 가까스로 남편을 찾아낸 션홍은 그의 곁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된다.

지아장커의 영화가 책상이 아니라 현장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스틸 라이프>가 가장 잘 알려준다. 이 작품의 로케이션은 그 자체로 이 영화가 하고 싶어하는 모든 이야기를 직접 보여준다. 철근 콘크리트 댐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중국의 자랑’이면서, 수몰로 113만명의 이주민을 낳은 ‘중국의 그늘’이기도 한 산샤댐 주변 거주지가 곳곳에서 골조를 드러내며 철거되는 모습은 때때로 초현실적인 풍경으로까지 보인다. 지아장커의 영화론 지극히 이례적이게도 폐건물이 로켓처럼 하늘로 쏘아올려지고 UFO가 하늘을 나는 장면이 들어 있는 것은 결코 미학적인 무리수가 아니다.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삶이 통째로 수장된 곳에서 낙관과 진보로 허옇게 분칠한 미래의 유령이 배회하는 모습은 사실 우리에게도 낯선 풍경이 아니다. 하루에 수십만명이 새로 주식시장에 뛰어들고 경제성장률이 10%가 넘는 중국의 이면에 그려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서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며 아우성치는 복마전은, 개발도상국의 허허로운 고속 성장을 막 이뤄내며 채찍질로 질주하려는 어느 나라의 밑그림이기도 하다.

<소무>에서 <첩혈쌍웅>의 한 장면을 넣었던 지아장커는 <스틸 라이프>에서 다시금 마크라는 이름의 청년이 <영웅본색>에 매혹되는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홍콩 폭력영화를 즐겨보며 건달의 꿈을 꾸었던 자신의 10대 시절을 떠올린다. 이어 무너져내리는 돌더미에 깔려 죽고 마는 마크의 시신과 함께 스스로의 과거를 강물 위에 띄워 보낸 뒤 눈을 들어 조국의 현실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토해낸다.

영화 속에서 세계화를 찬양하듯 백지를 달러로, 유로화로, 인민폐로 거듭 바꾸어내는 마술쇼는 강제로 푼돈을 뜯어내려는 사기이고, 미래를 약속하듯 “어디든지 데려다준다”고 호기롭게 외치던 오토바이 기사들이 도달한 곳은 이미 수몰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웃고 떠드는 많은 사람들을 근접 촬영하며 시작한 이 영화는 줄 위를 위태롭게 걷는 단 한 사람을 멀리서 비추며 쓸쓸하게 끝난다.

그러나, 영화 속 인물들끼리 담배와 술과 차와 사탕처럼 너저분한 기호품들을 주고받게 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희망을 주고받으려는 이 영화의 손길을 끝내 뿌리칠 수 있을까. 부박한 현실이 최고의 예술을 만드는 역설에서 그나마 위안을 찾을 순 없을까. <스틸 라이프>는 예술이란 다가올 것들을 찬양하며 흥청대는 권주가가 아니라 사라져가는 것들을 필사적으로 불러내는 초혼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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